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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폴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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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리볼루 (
차낙칼레) Gelibolu ( 튀르키예어) | Gelibolu ( 영어) Καλλίπολις ( 그리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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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튀르키예 차낙칼레 도에 위치한 인구 3만의 도시. 마르마라 해와 에게 해를 이어주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유럽 쪽 도시이다. 중세 이름은 갈리폴리(Gallipoli). 그리스어로 좋은 도시(η καλή πολή)를 의미하는 καλλίπολη (칼리폴리)에서 명칭이 유래되었다.[1]고대부터 트라키아 지방의 항구 도시였고, 1354년에 오스만 베이국에게 점령되었는데, 튀르크인들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정복한 도시이다. 이때부터 갈리폴리는 튀르키예 발음인 겔리볼루로 불리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일어난 갈리폴리 전투로 유명하다.
2. 역사
항구의 옛 석축과 성채
비잔티움과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인의 식민 도시로 지어진 칼리폴리스는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절에 요새화되었고 군대의 보급 기지가 되었다. 1300여년간 변함없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갈리폴리는 14세기에 대격변을 겪게 된다.
2.1. 중세
1204년에 4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라틴 제국을 세우자, 갈리폴리는 베네치아 공화국령이 되었다. 다만 이후 니케아 제국이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회복하고 동로마 제국이 부활하였는데, 1294년에 제노바-베네치아 간의 전쟁에서 동로마-제노바 함대가 베네치아 함대를 갈리폴리 앞바다에서 격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3세기 말부터 튀르크인들의 소아시아 침투가 가속화되자 동로마 제국 측은 스페인의 카탈루냐 용병단을 고용하여 효과를 보았다(1303~1304년). 하지만 이후 그들은 제국에 반기를 들어 트라키아와 그리스 일대를 약탈하였고 1306년에 갈리폴리가 그들에게 함락되었다. 시민들은 학살되었고 이에 동로마 제국군이 1307년에 도시를 포위하자 그들은 성벽을 파괴한 후 도주하였다.이후 지진까지 겹치며 파괴된 도시에 오스만군이 입성하였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1352년부터 1357년까지 이어질 내전으로 이 사실을 인지조차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잘 이용한 오스만의 군주였던 오르한 1세가 유럽 진출을 염두에 두고 아들인 쉴레이만 파샤를 파견하여 이룩해낸 성과이다(1354년 3월). 이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6세가 오르한에게 돈을 주고 도시를 회복하려 하였으나 그는 '신의 명으로 무혈입성한 도시'라며 거절하였다. 겔리볼루를 거점으로, 오스만 베이국은 10년 내로 트라키아 일대를 석권하고 무라트 1세를 거치며 동남부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1366년 8월 사보이아 백국 백작 아메데오 6세가 이끄는 십자군이 도시를 점령하였으나 곧 오스만군이 수복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내전 중에 안드로니코스 4세가 오스만 측의 도움을 얻는 대가로 도시를 포기하였다. 따라서 1376~77년 오스만 군주 무라트 1세가 갈리폴리를 무혈점령하였고, 이후 변함없이 오스만령으로 유지되었다. 바예지트 1세는 1400년 경에 해군 육성을 위해 겔리볼루에 성과 탑을 쌓아 항구로 만들었다. 다만 오스만 해군이 1416년 5월 29일에 베네치아 해군에게 겔리볼루 앞바다에서 대패하기도 하였다.(제독이던 칼리 파샤가 전사.) 이후, 15세기 중반의 오스만 해군의 인도양 방면 제독이자 지도 제작자로 유명한 피리 레이스가 1465년 경에 겔리볼루에서 탄생하였다. 15세기 겔리볼루는 오스만령 유럽(루멜리아)에서 2번째로 큰 도시였다.
2.1.1. 사보이아 십자군
1366년 8월 22일, 동로마-십자군 연합군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갈리폴리에 상륙, 도시를 포위하였다. 공격이 시작되자 튀르크 수비대는 밤을 틈타 도주하였고 주민들은 성문을 열어 항복하였다. 시타델도 26일까지 접수되었다. 아메데오 6세 백작은 자코모 디 루세르나와 애모네 미카엘레를 각각 도시와 시타델의 지휘관으로 봉하고 수비대를 두었다. 이들은 비단 도시의 방어 뿐만 아니라 해협의 입구를 지켜 원정군의 퇴로를 확보하는 중책을 맡았다. 27일 '이교도 튀르크인'에 대한 백작의 첫 승전보를 알렸다. 다만 연대기에 제시된 손쉬운 승리에 대한 묘사와는 달리,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한 아메데오 6세 백작은 9월 12일 페라 지구에서 갈리폴리에서 전사한 동료들에 대한 장례를 준비하였다.전사자 중에서 십자군을 위해 창설된 칼라 기사단(데비사 콜라리움)원 시몽 드 생아무르와 롤랑 드 베이시가 있었고, 백작의 재무관 안토니오 바르비어가 장례를 위해 18개의 기사단 문장을 구입한 것을 보면 상당수의 기사들이 전사한 사실을 알 수 있다.(따라서 일반 병사들의 손실은 더욱 컸을 것.) 지라드 마레샬과 장 디베르봉의 장례 시에도 81개의 횃불 등의 물품이 준비되었다. 비록 마르마라 해의 폭풍으로 지연되었지만 십자군 함대는 9월 4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당도, 제노바의 페라 구역에 상륙하였다. 이후 백작은 불가리아를 공격해 비딘에서 묶여있던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의 석방을 이끌어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였다.
교황의 요청대로 동서교회 갈등 봉합을 위해 노력한 아마데오는 협상에서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라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파울을 갈리폴리에 두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 신도들을 버리고 1367년 6월 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난 십자군과 이탈리아로 귀환하였다. 6월 13/14일 갈리폴리로 돌아온 백작은 수비대에게 급료를 지불하고 도시와 시타델을 동로마 측에 넘겨주었다. 이후 함대는 6월 16일 테네도스 섬에 당도하였다.
2.2. 근현대
1718년의 겔리볼루
겔리볼루 산작의 치소로 번영하던 도시는 크림 전쟁 기간인 1854년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기지로 쓰였고, 요새와 병원이 세워졌다. 다만 많은 영프 연합군측 군인들이 콜레라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1878년에는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하여 신식 대포들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1864년의 행정 개편으로 겔리볼루는 1920년까지 에디르네 엘리아트에 속하였다. 1차 발칸 전쟁으로 도시는 불가리아 왕국으로 넘어갔으나 그해 (1912년) 말에 2차 발칸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이 재차 차지하였다.
1차 대전 당시 갈리폴리 전투의 격전지가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이 패망하자 세브르 조약으로 그리스가 동트라키아(루멜리)를 점령하여 다시 그리스의 영토가 되는듯 하였으나,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으로 튀르키예령으로 확정되어 현대에 이른다. 한편, 갈리폴리에 살던 그리스인들은 1904년에 주교구가 대주교구로 승격되는 영광을 맞았지만 튀르키예 독립 전쟁과 로잔 조약의 체결 이후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때 고향을 떠나야 했다.
[1]
여담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레체 지방에 gallipoli 라는 도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