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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양명학 학파.2. 상세
명나라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이 양명학파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 중종 때 서경덕 학파와 왕실 종친이 양명학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퇴계 이황이 저서인 <전습록변傳習錄辨>에서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날카롭게 비판을 가한 것을 시작으로 류성룡과 같은 성리학자들은 사문난적으로 취급했으므로 양명학은 주요한 학파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당대의 대학자 소재 노수신은[1] 양명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여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유학자들의 날선 공격과 정여립의 난에 얽혀 후학을 양성할 틈도 없이 정계와 학계에서 사라졌고, 양명학을 이단시하는 영남학파가 견재하여 그의 이름은 이황이나 조헌 같은 학자만큼 알려지진 않았다.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도 양명학을 연구한 것으로 보이는데, 허균의 제자였던 이식과 후대의 인물 김창흡은 "허균의 사상인 욕망의 긍정이 양명학자 안산농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허균은 저서 <학산초담>에서 "왕수인은 문장을 전공하지 않고 학문을 가지고 표현했기 때문에 매끄럽지 못했다."라고 왕수인을 평한 적이 있다. #[출처1]
그러나 17세기 이후 장유, 최명길 등이 양명학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3] 그리고 18세기 초, 소론 측에 있던 정제두(鄭齊斗 1649~1736)가 노론에게 축출되고 강화도로 낙향하여 양명학을 가르치면서 강화학파를 창시하였다.[4] 이들은 주로 소론이었는데, 양명학뿐 아니라 역사학, 국어학, 서학, 문학 등도 연구하였고 실학자들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강화학파로는 이광사와 그의 제자 이광두, 이건창,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준소의 영수 심수현과 그의 아들 소론 산림 대사헌 심육, 심수현의 고손 대실학자 심대윤 등이 있다. 박은식[5]과 정인보 또한 양명학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양명학은 청나라 때 고증학이 발전하며 본고장에서 쇠퇴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쇠퇴하며 현재 대한민국에서 양명학은 성리학이나 실학보다 인지도가 낮아졌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현재도 최재목 교수와 같은 연구자나 한국양명학회 등을 통해 양명학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1]
당시엔 퇴계 이황과 어깨를 견주던 대학자였다. 주일론을 지지했으나 주리론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으며 고승들과의 교류도 있었다.
[출처1]
이종호 지음,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 247쪽, 249쪽 (2004)
[3]
장유와 최명길은 모두 당시로서는 서인 정권의 핵심에 해당하던 인사들로 반정공신에 포함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애초에 '관념론적 이기론'의 발달은 '서인 정권'의 차원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당파를 막론하고 성리학자 전반의 경향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장 '육왕심학'을 강도 높게 비판한 사람이
이황임을 생각하면 '서인'이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심지어 이것이 '정권' 차원에서 자행되었냐면 그렇지도 않다. 애초에 각 당파에서 학문 연구의 중심이 되었던 '산림'이 정권에 어느 정도나 참여했는지 부터가 실증이 안 된다. 개중에 정치 일선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송시열 조차도 '정권'의 수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4]
관련 저서로 「존언(存言)」이 있다. 강화학파는 19세기에 강화도를 중심으로 포교를 시작하던
성공회와 조우하였다. 성공회
강화읍성당에 당시 양명학과 성공회가 포용적으로 교류했던 흔적들이 있다.
[5]
이승만에 이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로, 양명학의 양지(良知)라는 개념을
그리스도교의 '성령'과 비교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결국 박은식의 양지론은 양명학의 기반 하에서 그리스도교의 '성령'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인격을 가진 신으로의 개념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하여 유교계의 개혁을 촉구하면서 '대동교'를 창립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