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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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er, sedan chair
2명 이상의 사람이 손으로 들고, 혹은 멜빵에 메고 운반하는 탈것. 나무 상자에 의자를 올려놓고 그 나무 상자를 막대기로 연결해 만든 교통수단이다.
2. 역사
신라의 기와에 가마와 같은 모습의 무늬가 새겨져 있고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가마에 앉은 부인의 모습이 있어서 삼국시대 이전부터 가마가 존재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조선 이전에는 마차도 널리 사용했다. 높으신 분들이 많이 이용했다.조선시대에 이르러 가마는 그것을 타는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됨으로써 신분에 따라 가마의 종류와 이름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물론 어떤 가마든 상관없이 신분이 매우 높은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이동수단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일반인들은 주로 결혼식이 있을때에나 타던 수준이었다. 일반 양인들의 결혼식 때 남성은 사모관대를 차려입고 말이나 나귀를 타며, 여성은 궁중에서 입는 당의를 입고 가마를 타는 식인데 일반인들이 평생 해 보기 힘든 양반들의 사치를 결혼식 날에 특별히 누릴 수 있도록 당국에서 허가를 내준것이다.
현대에는 사실상 사라진 교통수단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바퀴가 달리는 등의 형태로 개량한 인력거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현대에는 인도와 같은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사라졌다. 전세계에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보급되어 있고 인건비의 상승으로 굳이 인력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만 이따금씩 전통 결혼식과 같은 전통문화 재현 행사에서 등장하긴 한다.
3. 모양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가마의 형태는 조그마한 집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다. 사극에서 보이는 사각형의 상자 모양에 지붕을 얹어 덮고 정면에 문을 달아 그것을 들고 내리며 사람이 출입하는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아무래도 아녀자들이 얼굴을 내보이기 꺼리던 사회니만큼 여자들의 가마에 한해서 완전히 밀폐된 것으로 보인다.남성의 경우 일반적으로 벽과 지붕이 없이 개방되어 있는 교자(轎子)를 주로 사용했다. 현대에 비유하자면 나름 오픈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왕이 타던 어가(御駕) 역시 지붕은 있어도 벽은 없다.
가마의 육면체 아래쪽에는 가마 채라고 하는 두 개의 긴 막대를 나란히 덧대어 가마의 앞뒤에서 두 사람 또는 네 사람이 손으로 들거나 끈으로 매어 가마를 운반하도록 되어 있다. 간혹 사람이 드는 대신 말이나 당나귀 두 마리로 가마 앞뒤에서 가마를 짊어지게 하는 가교(駕轎)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4. 종류
타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종류가 나뉘어 있는데, 임금이 타던 연(輦)과 가교(駕轎)[1], 왕녀가 타던 덩[2], 종1품 이상의 고위관리와 기로(예순 이상의 노인)가 타던 평교자(平轎子)[3], 정2품 판서급 관리와 재상이 타던 사인교(四人轎)[4], 종2품 참판 이상 관리가 타던 사인남여(四人籃輿)[5], 종2품 및 정3품 참의와 승지가 타는 남여(籃輿)(사극에 등장하는 의자 모양의 위가 트인 가마)[6], 종2품 이상 관리가 타던 보교(步轎)[7]와 초헌(종 3품의 관리가 타는 외바퀴 달린 가마)[8], 하급 관리가 타던 장보교(帳步轎)[9], 물건을 나를 때 사용하는 채여, 갸자 등이 있다. 혼인날에 신부가 타고 친정에서 결혼식장으로 갈 때 타는 가마 역시 평교자이다.[10]가마가 그것을 타는 사람의 위세를 대변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는 하급관리로 계층이 내려갈수록 자신보다 낮은 하층민에게 더욱 위세를 과시하는 경향이 나타나서, 장보교는 가마의 네 모서리에 각각 기둥을 세우고 네 면에 휘장을 둘러 자유롭게 꾸미거나 뜯어낼 수 있도록 화려하게 변해갔다.
보통 앉아있을 공간만 안에 갖추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나 침대나 웬만한 가구들까지 갖추어진, 작은 집 수준의 초대형 가마들도 존재한다. 이 경우 16~64명 수준의 대규모 인원이 운반하며 이용자는 대부분 제국의 황제 수준의 거물들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 제국 정복 과정에서 마주쳤던 아타우알파의 가마. 주성치 주연의 영화 녹정기에서 황제가 타는 가마의 크기와 운송수단으로 이용되는 대규모의 인력이 잘 묘사되어 나온다. 또 HBO의 드라마 ROME에서도 클레오파트라 7세가 이런 가마를 타고 다니는 장면이 나왔다. #
5. 용도
속도는 딱히 빠르지 않다. 사람의 손으로 들고 가는 것이니 최대 속도는 사람이 걷는 속도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걷는 것보다 좀 더 느렸는데, 가마꾼들이 정확하게 손발을 맞춰야 가마가 제대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된 데에는 다음의 이유가 있다.첫번째로 가마는 당시의 다른 탈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승차감이 좋았다. 요즘에야 평탄한 도로에서 굴러가는 고무 타이어 바퀴로 된 탈것의 승차감이 압도적으로 좋지만 고대, 중세의 도로는 현대의 흙길이 고속도로로 보일 정도로 상태가 열악했다. 여기에 더해 고무야 근대에 와서야 들어온 물건이고[11] 나무 같은 것으로 바퀴틀을 짜면 승차감이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승마는 빠르긴 하지만 기술이 필요하며 체력도 많이 소모되는 데다 낙마의 위험도 크다.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에서는 마음대로 달릴 수도 없었고, 말의 뜀박질에 따라 흔들리므로 탑승감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반면 가마는 사람이 본능적으로 가마의 수평을 조정하므로 매우 안정적이었다. 드는 사람 수를 늘리면 늘릴수록 땅에서 올라오는 진동을 잘 잡아주었기 때문에 상류층은 최소 단위가 10명 이상인 대형 가마를 애용했고 제왕급이면 100명 안팎이 드는 초대형 가마를 타기도 했다.[12] 그리고 속도가 걷는 것보다 느리다곤 해도 탄 사람은 자기가 걷는 것이 아니니 힘을 안 들이고 이동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두번째는 부수적 효과로 과시성이 아주 좋았다. 하층 신분을 부려먹을 수 있어 인건비가 요즘에 비해서야 훨씬 적게 들었다지만 건장한 성인 남자를 부릴 수 있다는 거 자체가 보통 신분이 아니다란 걸 아주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가마꾼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시현효과가 장난 아니었으며 이런 경우 가마 역시 비례해서 커졌기 때문에 둘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주위에 높으신 분이란 걸 확실히 각인시켰다.
또한 가마꾼이 최소 둘 이상 수행하기 때문에 가마에서 내리면 가마꾼을 하인 내지 경비원으로 부릴 수 있다는 장점 또한 있었다. 시간은 넘쳐나고 과시욕은 강렬했던 귀족들에게 가마는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6. 풍습
상가마는 신분이 높은 자들이 이용하는 만큼, 가마를 타고 지날 때 그 위세를 더하기 위해 하인들을 시켜 목청을 가늘고 길게 뽑아내며 소리내어 외치게도 했다. "물렀거라, ~~~ 나리 행차하신다."와 같은 식의 외침이 주를 이루었다. 위세있는 양반을 따라다니는 건장한 하인들을 구종별배, 길을 비키라고 외치는 소리를 벽제라고 한다. 서울 종로구의 '피맛골'도 이와 연관되어 있는데, 과거 종로 거리는 이런 고관대작들이 탄 가마들이 빈번하게 다니는 길이었으므로, 이런 벽제를 귀찮아 하는 백성들이 뒷골목으로 도망치는(?) 경우가 있었다. 이 뒷골목이 바로 피맛골, 즉 가마나 말을 피하는 골목이란 뜻이란 야사이다.이렇듯 위세를 떠는 양상 때문에 맞은편에서 오는 다른 행렬의 가마를 만나게 되면, 서로 길을 비키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13] 이 보이지 않은 기싸움이 물리적인 실력행사로 변할 경우 서로의 가마를 맞대고 밀어젖히기도 했는데, 기세에 밀려 뒤로 물러나거나 싸움에서 져서 가마가 땅에 닿거나 가마 자체가 땅으로 떨어질 경우에는 진 사람은 자신의 운수가 사납고 불길하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러한 관습이 발달하여 한국의 민속놀이 중 하나인 가마싸움이 만들어졌는데, 추석에 수십 명의 청년이 두 팀으로 나누어 서로의 깃발을 앞세우고 상대편의 가마와 맞부딪쳐 먼저 많이 부순 팀이 이기는 놀이가 되었다. 전라남도의 고싸움(고놀이), 경상북도의 차전놀이도 비슷한 형식이지만 이 경우는 가마싸움과 달리 깃발을 뺏는 쪽이 이긴다.
가마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사회적 사고방식인 체면과 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습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마는 전통적인 한국 사회의 모습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다. 한국인들은 체면과 품위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그것을 유지하며 고고한 자세로 생활했던 그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가마에 녹아 있다.[14]
7. 가마꾼
가마를 지고 가는 가마꾼들은 체력이 상당히 좋은 사람만 할 수 있다. 당장 가마는 사람이 타는 물건이다. 아무리 가벼운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최소 50kg은 된다. 특히 두 사람이 50kg의 성인이 타고 있는 가마를 들고 이동을 하려면 상당한 체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가마 자체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권력자들은 체중이 제법 나가는 편이기에 가마꾼 2명으로 벅차다고 여겨서인지 가마꾼 4명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가마꾼이 많을수록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8. 외국
유럽에도 고대 로마에서 렉티카(lectica)라는 가마가 있었다. 비스듬히 누워서 타는 것인데, 이 쪽들도 높으신 분들 전용이었다.교황이 타는 가마도 있는데 세디아 제스타토리아라고 한다. 원래는 다른 가마처럼 사람이 직접 들고 운반했으나 현대에는 바퀴가 달린 수레의 형태로 간소화되었다.
오늘날 자동차의 형태 중 하나를 뜻하는 세단도 원래는 가마를 뜻했다.
일본에서도 귀족과 무사들이 가마를 많이 사용했다. 특이한 것은 가마를 메는 손잡이가 가마 지붕 위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일본 축제( 마츠리)에서는 신사에 신령의 가마, 오미코시(お神輿)를 들어 옮기는 행사가 많이 이루어진다.
북아메리카의 아즈텍 제국과 남아메리카 잉카 제국에도 왕과 귀족이 타고 다니는 가마가 있었다. 특히 잉카에서는 왕은 땅을 밟아서는 안 됐기에 항상 가마를 타고 이동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쳐들어 왔을 때에도 스페인 병사들이 왕의 가마꾼들을 도륙한 바람에 당대 왕 아타우알파가 도망치지 못했다고 한다.
9. 다른 탈것
가마에 바퀴를 달고 여전히 손으로 끌면 인력거가 된다. 동아시아에서 특히 인력거가 널리 보급된 데에는 가마의 영향이 없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가마에 바퀴를 달고 말을 연결하면 마차, 소를 연결하면 우차가 된다.현대에 이르러서는 가마에 바퀴를 달고 오토바이를 연결해서 화물오토바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1]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전용 관용차
[2]
한자를 빌려 덕응(德應)이라고도 표기했다.
[3]
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와
부총리급 전용 관용차
[4]
오늘날로 치면
장관급 및
처장(차관급) 전용 관용차
[5]
오늘날로 치면
차관급 및 준차관급 전용 관용차
[6]
오늘날로 치면
고위공무원단 전용 관용차
[7]
오늘날로 치면 차관급 및 준차관급 전용 관용차
[8]
오늘날로 치면
고위공무원단 전용 관용차
[9]
오늘날로 치면 4~5급 전용 관용차
[10]
이런 식으로 신분별로 탈 수 있는 가마가 정해져 있다 보니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11월 12일자 기사에는 이와 관련된 사고도 기록되어 있다.
[11]
고무 타이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의 일이다.
[12]
물론 다른 탈것에 비해 좋았다는 것이지, 위아래로 흔들리는 건 사실이어서 처녀가 시집 갈 때 가마를 처음 타 보고 멀미로 드러눕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고 한다. 특히나 일반 양인의 경우는 재력 문제 때문에 시집 보내도 두명만 드는 가장 기본적인 가마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었다.
[13]
유럽에서도 좁은 길에서 귀족들
마차가 마주 치면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4]
국립국어원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