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Arcaea의 Archive Story를 기록한 문서.2. 시라베
2.1. 해금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6-1 | Scarlet-1 | Purgatorium 클리어 | ||
6-2 | Scarlet-2 | Scarlet Cage 클리어 | ||
6-3 | Scarlet-3 | VECTOЯ 클리어 |
2.2. Scarlet Cage
====# 6-1 #====어딘가에 사람이 있으리라 계속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소녀의 시선을 메우고 있는 것은 오래되어 무너져가는 건물만이 가득 찬 새하얀 황무지일 뿐이었다.
생명이라고는 본인밖에 없었다.
소녀는 아무런 기억 없이 이 세상에서 며칠 전에 깨어났다. 그 사이에 꽤 먼 거리를 걸으며 여기저기를 탐험했으나, 저 황량한 건물들에 해답은 없었다. 비어있을 뿐이었다.
건물들이 어째선지 익숙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소녀는 저것들의 이름, 형태, 목적 따위를 배운 기억은 없었다.
소녀에게 지식은 있었으나,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이 세상이나 본인에 대해 더 자세히 아는 것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도피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세계는 기묘하고 신기한 곳이라는 것이다.
소녀가 어깨에 두른 기타의 스트랩을 꽉 쥐자 의문이 다시금 찾아왔다. 이 기타는 어디서 난 걸까? 대체 왜 내가 이걸 갖고 있는 걸까?
소녀는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이 기타와 함께였지만 그 질문들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소녀가 아는 것이라곤 줄을 튕기고 프렛을 잡아 다양한 소리를 내는 법.
리듬과 멜로디, 코드, 화음을 내는 법이었다.
그렇게 기타를 손에 쥐고 있을 때면 소녀는... 아득함을 느꼈다.
하지만 왜일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왜 모르는 걸까?
그녀가 밟은 모래는 억겁의 시간동안 바위가 물에 풍화된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곳에 물은 없다. 그 어떤 액체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모래가 있는 걸까? 소녀는 걸을 수 있었다. 어째서? 답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답을 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이 지식들이 “기억”이긴 한 걸까? 정말로 나는 이 지식들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다른 것들은 “잊어버린” 것인가? 기억상실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 특정한 기억만 골라서 사라지는 게 기억상실이던가?
지식을 갖고 있으나, 어째서 그 지식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소녀는 굉장히 불편했다.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의 피부와 근육과 뼈를 빼내어 다른 몸에 넣어두고 중요한 장기는 빼먹은 듯한, 텅 비고, 잊힌 느낌.
소녀는 무지(無知)가 너무나 싫었다.
소녀의 머릿속에서 질문들이 만화경의 풍경처럼 지나갔다. 그 풍경에 힘껏 집중을 해보지만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맨발로 여행하던 소녀는 (힐을 신고 걷는 것은 힘들었기에 벗어 목에 두르고 있기로 했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더 많은 것을 볼수록, 오히려 아는 것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무지가 싫었다. 소녀는 많은 것을 알았으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여태껏 보아온 것들은 대부분 말도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중에선, 도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기 중에 떠다니는 유리 조각이 있었다. 그 유리 조각들은 다른 사람들, 다른 시간대,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광경은, 이상하게도 소녀의 마음에 울렸다. 그 광경은, 틀림없이 소녀에게 친숙했다.
하지만 그 친숙함은 말 그대로 느낌에 불과했다. 그 광경에 소녀 자신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기억이 아니다... 적어도 이 아르케아들은, 그녀의 기억이 아니다.
그 무엇도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소녀의 마음속에서 감정이 요동쳤다. 그러면서 온몸으로 우려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소외된 느낌, 혼란, 희미한 외로움, 그리고 자신 안의 소중한 무언가가 없다는 감각.
소녀는 이 감각이 싫었다.
소녀는 다시 걸었다. 걸으면 잡념을 떨쳐낼 수 있다.
걸으면 자신의 내면보다 바깥의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소녀의 시선을 메우고 있는 것은 오래되어 무너져가는 건물만이 가득 찬 새하얀 황무지일 뿐이었다.
생명이라고는 본인밖에 없었다.
소녀는 아무런 기억 없이 이 세상에서 며칠 전에 깨어났다. 그 사이에 꽤 먼 거리를 걸으며 여기저기를 탐험했으나, 저 황량한 건물들에 해답은 없었다. 비어있을 뿐이었다.
건물들이 어째선지 익숙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소녀는 저것들의 이름, 형태, 목적 따위를 배운 기억은 없었다.
소녀에게 지식은 있었으나,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이 세상이나 본인에 대해 더 자세히 아는 것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도피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세계는 기묘하고 신기한 곳이라는 것이다.
소녀가 어깨에 두른 기타의 스트랩을 꽉 쥐자 의문이 다시금 찾아왔다. 이 기타는 어디서 난 걸까? 대체 왜 내가 이걸 갖고 있는 걸까?
소녀는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이 기타와 함께였지만 그 질문들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소녀가 아는 것이라곤 줄을 튕기고 프렛을 잡아 다양한 소리를 내는 법.
리듬과 멜로디, 코드, 화음을 내는 법이었다.
그렇게 기타를 손에 쥐고 있을 때면 소녀는... 아득함을 느꼈다.
하지만 왜일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왜 모르는 걸까?
그녀가 밟은 모래는 억겁의 시간동안 바위가 물에 풍화된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곳에 물은 없다. 그 어떤 액체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모래가 있는 걸까? 소녀는 걸을 수 있었다. 어째서? 답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답을 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이 지식들이 “기억”이긴 한 걸까? 정말로 나는 이 지식들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다른 것들은 “잊어버린” 것인가? 기억상실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 특정한 기억만 골라서 사라지는 게 기억상실이던가?
지식을 갖고 있으나, 어째서 그 지식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소녀는 굉장히 불편했다.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의 피부와 근육과 뼈를 빼내어 다른 몸에 넣어두고 중요한 장기는 빼먹은 듯한, 텅 비고, 잊힌 느낌.
소녀는 무지(無知)가 너무나 싫었다.
소녀의 머릿속에서 질문들이 만화경의 풍경처럼 지나갔다. 그 풍경에 힘껏 집중을 해보지만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맨발로 여행하던 소녀는 (힐을 신고 걷는 것은 힘들었기에 벗어 목에 두르고 있기로 했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더 많은 것을 볼수록, 오히려 아는 것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무지가 싫었다. 소녀는 많은 것을 알았으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여태껏 보아온 것들은 대부분 말도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중에선, 도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기 중에 떠다니는 유리 조각이 있었다. 그 유리 조각들은 다른 사람들, 다른 시간대,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광경은, 이상하게도 소녀의 마음에 울렸다. 그 광경은, 틀림없이 소녀에게 친숙했다.
하지만 그 친숙함은 말 그대로 느낌에 불과했다. 그 광경에 소녀 자신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기억이 아니다... 적어도 이 아르케아들은, 그녀의 기억이 아니다.
그 무엇도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소녀의 마음속에서 감정이 요동쳤다. 그러면서 온몸으로 우려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소외된 느낌, 혼란, 희미한 외로움, 그리고 자신 안의 소중한 무언가가 없다는 감각.
소녀는 이 감각이 싫었다.
소녀는 다시 걸었다. 걸으면 잡념을 떨쳐낼 수 있다.
걸으면 자신의 내면보다 바깥의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6-2 #====
하지만 얼마 못가 그 감각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소녀는 비교적 부드러운 바위에 앉아 불안한 듯 머리를 매만졌다. 뒤로 돌아보자, 색이 바랜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이 지평선까지 긴 대열을 그리고 있었다.
어째서 모래가 이렇게 많은 걸까?
모래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한 후, 소녀는 또다시 기타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또다시 밀려오는 그 아늑한 감각을 느꼈다.
그 기타는 마치... 위로해 주는 부모님이나 친구와 같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숨을 내뱉었다. 이거면 됐다.
이거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소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손가락으로는 기타줄을 튕겼다. 조용하게 울리는 코드의 음이 콧노래와 멋진 화음을 이루었다. 소녀는 걷는 방법도, 기타를 연주하는 방법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 두 행동만큼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그 얼굴에 잠시 미소가 찾아왔다.
얼마 못가 그 미소는 사라졌다. 소녀의 혀가, 이가, 입술이, 가사를 이 노래에 붙이고 싶어 했다.
처음으로 내뱉은 그 단어들이 공기 중으로 퍼지며 어떤 풍경을 그리려는 듯 소용돌이쳤다.
그렇게 붉고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노래했다. 이 새하얀 세계에서, 무색의, 무한한 감옥에서.
점점, 노랫소리가 커져갔다. 마음속에서 감정이 복받쳐 올라 점점 거세졌다.
본능이 내뱉는 그 단어들은 새로운 것도 아니었으며, 과거에 잊힌 것도 아니었다. 그녀와 항상 함께해왔던 것들이다.
이제 그것들이 소녀의 가슴속에서 기어 나와 소리높이 울리고 있었다. 단순히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포효와 같은 소리로 이 죽은 세계의 가장 외진 구석까지 닿을 정도로 크게 외쳐야 했다.
소녀는 최대한 크게, 그 단어들을 외쳤다.
그렇게 해야 할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운 감정, 무지, 황량한 풍경, 조그만 유리 조각들이 찰나의 순간 동안 비추다 사라지는 수많은 기억들,
그리고...
공포에 대해 외쳤다.
연주하던 도중 그 한순간, 소녀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텅 빈 세계와, 텅 빈 자신의 기억...
그것들이 두려웠다.
나는 누굴까? 여긴 어딜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소녀는 이미 그 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는.
목소리가 음을 찾지 못하고 갈라졌지만, 억지로 폐에 있던 공기를 쥐어짜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6개의 현 사이로 미친 듯이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 소리가 마음속으로 생생하게 들렸다. 강력하고 우렁찬, 마치 비명과도 같은 그 진동이.
그 가사 밑으로 흐르는 세찬 파도와 함께, 일렁이는 공포가 강력한 열을 내뿜으며 그녀의 눈에서 빛났다.
영혼과 음악이 자아낸 폭풍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소녀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조금 덜 혼란스러웠고, 조금 덜 두려웠다.
잠시 후, 그 외침의 메아리조차 잦아들고 난 후, 마지막으로 현을 몇 번 뜯은 뒤 소녀는 팔을 늘어뜨렸다.
노래는 밝은 하늘을 향해 잦아들어, 그 존재의 흔적은 이제 그녀의 텅 빈 기억 속에 밖에 남지 않았다.
소녀는 왼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 손은 덜덜 떨며, 자신의 노래를 가져간 하늘을 보길 거부했다.
그리고 웃었다. 소녀 자신도 놀라웠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한바탕 해내고 난 후의 후련한 미소.
손을 옷에 닦듯이 비비고 숨을 내뱉었다.
정말, 이 세상이 싫었다.
소녀는 비교적 부드러운 바위에 앉아 불안한 듯 머리를 매만졌다. 뒤로 돌아보자, 색이 바랜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이 지평선까지 긴 대열을 그리고 있었다.
어째서 모래가 이렇게 많은 걸까?
모래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한 후, 소녀는 또다시 기타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또다시 밀려오는 그 아늑한 감각을 느꼈다.
그 기타는 마치... 위로해 주는 부모님이나 친구와 같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숨을 내뱉었다. 이거면 됐다.
이거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소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손가락으로는 기타줄을 튕겼다. 조용하게 울리는 코드의 음이 콧노래와 멋진 화음을 이루었다. 소녀는 걷는 방법도, 기타를 연주하는 방법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 두 행동만큼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그 얼굴에 잠시 미소가 찾아왔다.
얼마 못가 그 미소는 사라졌다. 소녀의 혀가, 이가, 입술이, 가사를 이 노래에 붙이고 싶어 했다.
처음으로 내뱉은 그 단어들이 공기 중으로 퍼지며 어떤 풍경을 그리려는 듯 소용돌이쳤다.
그렇게 붉고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노래했다. 이 새하얀 세계에서, 무색의, 무한한 감옥에서.
점점, 노랫소리가 커져갔다. 마음속에서 감정이 복받쳐 올라 점점 거세졌다.
본능이 내뱉는 그 단어들은 새로운 것도 아니었으며, 과거에 잊힌 것도 아니었다. 그녀와 항상 함께해왔던 것들이다.
이제 그것들이 소녀의 가슴속에서 기어 나와 소리높이 울리고 있었다. 단순히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포효와 같은 소리로 이 죽은 세계의 가장 외진 구석까지 닿을 정도로 크게 외쳐야 했다.
소녀는 최대한 크게, 그 단어들을 외쳤다.
그렇게 해야 할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운 감정, 무지, 황량한 풍경, 조그만 유리 조각들이 찰나의 순간 동안 비추다 사라지는 수많은 기억들,
그리고...
공포에 대해 외쳤다.
연주하던 도중 그 한순간, 소녀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텅 빈 세계와, 텅 빈 자신의 기억...
그것들이 두려웠다.
나는 누굴까? 여긴 어딜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소녀는 이미 그 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는.
목소리가 음을 찾지 못하고 갈라졌지만, 억지로 폐에 있던 공기를 쥐어짜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6개의 현 사이로 미친 듯이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 소리가 마음속으로 생생하게 들렸다. 강력하고 우렁찬, 마치 비명과도 같은 그 진동이.
그 가사 밑으로 흐르는 세찬 파도와 함께, 일렁이는 공포가 강력한 열을 내뿜으며 그녀의 눈에서 빛났다.
영혼과 음악이 자아낸 폭풍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소녀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조금 덜 혼란스러웠고, 조금 덜 두려웠다.
잠시 후, 그 외침의 메아리조차 잦아들고 난 후, 마지막으로 현을 몇 번 뜯은 뒤 소녀는 팔을 늘어뜨렸다.
노래는 밝은 하늘을 향해 잦아들어, 그 존재의 흔적은 이제 그녀의 텅 빈 기억 속에 밖에 남지 않았다.
소녀는 왼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 손은 덜덜 떨며, 자신의 노래를 가져간 하늘을 보길 거부했다.
그리고 웃었다. 소녀 자신도 놀라웠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한바탕 해내고 난 후의 후련한 미소.
손을 옷에 닦듯이 비비고 숨을 내뱉었다.
정말, 이 세상이 싫었다.
====# 6-3 #====
이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무섭고, 여전히 비어있고, 여전히 무자비했지만,
소녀는 이제 맞설 준비가 되었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소녀는 분명 공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공포에 질리면 사람은 오금이 저리고, 도망가고 싶어지며, 판단력이 흐려지고, 제어를 잃게 된다.
미지의 공포, 실패의 공포란 그런 것이었다.
그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은 본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예전에도 불러본 적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지금과 같이, 공포를 이겨내고 노래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소녀는 공포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틀린 감정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세계에서 제정신으로 있으려면, 공포를 마주하고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도록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공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녀는 숨을 뱉고 앉은 자세를 가다듬은 뒤 조심스레 기타를 옆에 내려놓았다.
갑작스레 짤랑, 하고 조그마한 소리가 울렸다.
드레스의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보따리가 떨어져 모래 위에 튀어나온 돌 위로 떨어졌다. 그 안에는 바늘, 가위, 골무, 실타래, 그리고 줄자가 들어있었다. 바느질 도구다.
소녀가 깨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어, 자신의 것이라고 짐작했던 물건이다.
이 보따리를 처음 찾았을 땐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대체 왜 자기가 이걸 갖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보따리 속에 든 각 물건의 용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기타처럼... 도대체 이 보따리가 어디서 온 물건인지에 대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소녀는 손을 뻗어 주머니를 주우려고 했다. 그렇게 자기 옷의 소매를 보는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다.
알고 있었다... 이 소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든 바늘땀과 재봉선을, 그것이 어떤 색의 실인지.
그 실은 저 바느질 도구 보따리 안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연결점은 찾을 수 없었다. 논리적으로 자신의 옷과 저 보따리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답답한 기분은 걷히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소녀의 경험과 지식은 단절되어 있었다.
매우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하지만 더 이상, 소녀는 그 단절이 일으키는 공포에 삼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 공포를 제대로 알고, 이용할 것이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떻다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소녀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목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미래에 목표를 찾을지도 모른다.
다시 걸어가는 소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보따리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여정 도중에 옷이 망가지면 고칠 방도가 있다는 것은 꽤 편리했다.
그녀의 옷은 절대로 편하거나 실용적이진 않았지만, 자신의 것이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자신의 것이었다.
옷, 기타, 바느질 도구, 이 기억의 황무지에서, 그것들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더 나아졌다.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는 힘이 났다.
몇 걸음을 걷자, 땅에 있는 무언가가 소녀의 눈에 띄었다.
모래에 새겨진 발자국...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을 가로질러 왼쪽으로 나아간 그 발자국은 분명, 크기가 달랐다.
그 발자국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작은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또다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가 소녀의 얼굴에 새겨졌다.
흠...
어쩌면, 누군가 내 음악을 들은 걸지도...
소녀는 이제 맞설 준비가 되었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소녀는 분명 공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공포에 질리면 사람은 오금이 저리고, 도망가고 싶어지며, 판단력이 흐려지고, 제어를 잃게 된다.
미지의 공포, 실패의 공포란 그런 것이었다.
그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은 본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예전에도 불러본 적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지금과 같이, 공포를 이겨내고 노래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소녀는 공포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틀린 감정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세계에서 제정신으로 있으려면, 공포를 마주하고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도록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공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녀는 숨을 뱉고 앉은 자세를 가다듬은 뒤 조심스레 기타를 옆에 내려놓았다.
갑작스레 짤랑, 하고 조그마한 소리가 울렸다.
드레스의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보따리가 떨어져 모래 위에 튀어나온 돌 위로 떨어졌다. 그 안에는 바늘, 가위, 골무, 실타래, 그리고 줄자가 들어있었다. 바느질 도구다.
소녀가 깨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어, 자신의 것이라고 짐작했던 물건이다.
이 보따리를 처음 찾았을 땐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대체 왜 자기가 이걸 갖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보따리 속에 든 각 물건의 용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기타처럼... 도대체 이 보따리가 어디서 온 물건인지에 대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소녀는 손을 뻗어 주머니를 주우려고 했다. 그렇게 자기 옷의 소매를 보는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다.
알고 있었다... 이 소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든 바늘땀과 재봉선을, 그것이 어떤 색의 실인지.
그 실은 저 바느질 도구 보따리 안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연결점은 찾을 수 없었다. 논리적으로 자신의 옷과 저 보따리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답답한 기분은 걷히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소녀의 경험과 지식은 단절되어 있었다.
매우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하지만 더 이상, 소녀는 그 단절이 일으키는 공포에 삼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 공포를 제대로 알고, 이용할 것이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떻다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소녀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목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미래에 목표를 찾을지도 모른다.
다시 걸어가는 소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보따리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여정 도중에 옷이 망가지면 고칠 방도가 있다는 것은 꽤 편리했다.
그녀의 옷은 절대로 편하거나 실용적이진 않았지만, 자신의 것이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자신의 것이었다.
옷, 기타, 바느질 도구, 이 기억의 황무지에서, 그것들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더 나아졌다.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는 힘이 났다.
몇 걸음을 걷자, 땅에 있는 무언가가 소녀의 눈에 띄었다.
모래에 새겨진 발자국...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을 가로질러 왼쪽으로 나아간 그 발자국은 분명, 크기가 달랐다.
그 발자국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작은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또다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가 소녀의 얼굴에 새겨졌다.
흠...
어쩌면, 누군가 내 음악을 들은 걸지도...
3. 미르
3.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8-1 | Obsidian-1 | GIMME DA BLOOD 클리어 | ||
8-2 | Obsidian-2 | Bookmaker (2D Version) 클리어 | ||
8-3 | Obsidian-3 | Illegal Paradise 클리어 | ||
8-4 | Vermillion-1 |
선행 조건
Dies irae 혹은
Spirit of the Dauntless 보유 ReviXy 클리어 |
||
8-5 | Vermillion-2 | 8-4 스토리 열람[1] | ||
8-6 | Vermillion-3 | |||
8-7 | Vermillion-4 | |||
8-8 | Vermillion-5 | LunarOrbit -believe in the Espebranch road- 클리어 | ||
8-9 | Vermillion-6 | 8-8 스토리 열람 |
3.2. Obsidian Blade
====# 8-1 #====달도 비추지 않는 밤이 숲에 내려앉았다.
푸른 숲과 그 안의 마을을 향해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불길을 덮으려는 듯이.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 끔찍한 형체가 내지르는 끔찍한 소리,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화염.
사람들이 자욱한 연기 속에서 공포에 질려 죽을힘을 향해 달아났다.
하지만 소녀는 친숙한 느낌에 휩싸여 있었다.
전투의 순수한 황홀감.
흑요석과 같은 검은 광택을 두른 미르의 검이 그림자를 가를 때마다 반짝였다.
그림자는 네 발로 걸어 다니는 일그러진 짐승의 형상을 했지만, 싸울 때는 교묘하게 뒷다리로 서서 움직였다.
그녀가 쥔 검의 날이 짐승의 형상을 한 그림자의 어깨를 베어내자 떨어진 신체가 채 땅에 닿기도 전에 그 몸은 소멸하여 연기가 되듯 흩날렸다.
그녀는, 그 짐승들이 숲에 번진 불길에서 일어난 연기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잘 알지 못했다.
서로 구분할 수 있는 점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한 마리를 쓰러뜨리면 그 정수가 다시 연기 속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돌아온다는 것뿐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검의 날을 그림자 짐승에게 찔러 넣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숲속을 거의 빠져나가, 전진하는 군대의 전열 속으로 피난했다.
미르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했다. 이 황홀감이 끝을 보도록.
그녀가 몸을 날리자 한 번의 도약만으로도 거의 들판에 가까운 길이를 긴 머리를 흩날리며 뛰어넘었고, 도망치는 농부에게 연기로 된 발톱을 세운 또 다른 짐승의 목을 날려버렸다.
키가 작은 근육질의 여성이 도망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미르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어떠한 손짓을 보인 후 다시 바삐 달아났다. 감사의 표시였을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이 세계의 기술이 얼마나 진보했는지, 그 사람들의 철학이 어떤지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언제나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다.
죽이고, 도륙하고, 끝내 버리는 것. 모든 적이 사라졌으리라 짐작될 때까지.
마침내 마을의 마지막 난민이 창을 든 군인들의 열에 도달했다. 미르는 군인들의 눈썹에 맺힌 땀과 눈에 어린 공포를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의 자세에서 보이는 결연한 의지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내 검을 내려놓고 숨을 내쉰 그녀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난번보다 더욱 일찍.
그리고, 마치 유리로 만들어져 투영된 이미지처럼 그녀를 둘러싼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엷은 빛이 그녀를 완전히 에워싸게 두었고...
그녀는 다시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왔다.
푸른 숲과 그 안의 마을을 향해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불길을 덮으려는 듯이.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 끔찍한 형체가 내지르는 끔찍한 소리,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화염.
사람들이 자욱한 연기 속에서 공포에 질려 죽을힘을 향해 달아났다.
하지만 소녀는 친숙한 느낌에 휩싸여 있었다.
전투의 순수한 황홀감.
흑요석과 같은 검은 광택을 두른 미르의 검이 그림자를 가를 때마다 반짝였다.
그림자는 네 발로 걸어 다니는 일그러진 짐승의 형상을 했지만, 싸울 때는 교묘하게 뒷다리로 서서 움직였다.
그녀가 쥔 검의 날이 짐승의 형상을 한 그림자의 어깨를 베어내자 떨어진 신체가 채 땅에 닿기도 전에 그 몸은 소멸하여 연기가 되듯 흩날렸다.
그녀는, 그 짐승들이 숲에 번진 불길에서 일어난 연기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잘 알지 못했다.
서로 구분할 수 있는 점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한 마리를 쓰러뜨리면 그 정수가 다시 연기 속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돌아온다는 것뿐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검의 날을 그림자 짐승에게 찔러 넣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숲속을 거의 빠져나가, 전진하는 군대의 전열 속으로 피난했다.
미르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했다. 이 황홀감이 끝을 보도록.
그녀가 몸을 날리자 한 번의 도약만으로도 거의 들판에 가까운 길이를 긴 머리를 흩날리며 뛰어넘었고, 도망치는 농부에게 연기로 된 발톱을 세운 또 다른 짐승의 목을 날려버렸다.
키가 작은 근육질의 여성이 도망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미르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어떠한 손짓을 보인 후 다시 바삐 달아났다. 감사의 표시였을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이 세계의 기술이 얼마나 진보했는지, 그 사람들의 철학이 어떤지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언제나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다.
죽이고, 도륙하고, 끝내 버리는 것. 모든 적이 사라졌으리라 짐작될 때까지.
마침내 마을의 마지막 난민이 창을 든 군인들의 열에 도달했다. 미르는 군인들의 눈썹에 맺힌 땀과 눈에 어린 공포를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의 자세에서 보이는 결연한 의지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내 검을 내려놓고 숨을 내쉰 그녀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난번보다 더욱 일찍.
그리고, 마치 유리로 만들어져 투영된 이미지처럼 그녀를 둘러싼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엷은 빛이 그녀를 완전히 에워싸게 두었고...
그녀는 다시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왔다.
====# 8-2 #====
미르는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죽어버린 이 세계에 오기 전에 지니고 있던 기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에 미르를 불러낸 유리 조각은 멀리 날아가기 전에 잠시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잇따른 경험을 통해 그녀는 다시는 그 조각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조각의 이름은 아르케아. 깨어났을 때부터 어째선지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아르케아는 ‘상황’에 놓인 다른 세계의 모습을 미르에게 보여주었다.
미르는 조각을 만질 수는 없었지만, 조각은 미르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수없이도 조각은 미르를 불러내어, 다양한 상황에 놓인 다양한 세계로 데려가 주었다.
하지만 미르의 목적은 언제나 같았다.
적을 쓰러뜨리는 것. 철저하게 부수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하는 것.
언제나 필연적으로 미르의 뒤에는 스스로는 싸울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피를 끓게 하는 전투의 황홀감 앞에서는 무색해졌지만.
언제부터 지니고 있었는지는 몰랐으나, 미르는 눈을 떴을 때부터 함께했던 이 검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어쩌면, 너무 지나칠 정도로 능숙하게. 미르는 여러 세계의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아주 간단하게 해낼 수 있었다.
적들을 쓰러뜨리는 것조차 크게 어렵지 않았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사람들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투를 마주하면 그러한 걱정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맹렬한 폭력의 기쁨이 온몸에 흐르도록 하며 전투를 즐겼다.
그러나 그런 황홀감이 사라지는 순간은 점점 더 빨리 찾아왔다. 공허함과 피로감만이 미르를 채웠고, 그로부터 회복하기 까지는 몇 시간, 며칠이 걸렸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되기까지는 더 오래 걸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차분해졌을 때엔, 미르는 그 세계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세계들이 이곳과는 다른 세계라는, 여태껏 굳게 믿어왔던 ‘사실’조차 이제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장소들은 마치 세계가 아니라… 어째선지 안에 들어가 행동할 수 있는 ‘동영상’처럼 느껴졌다.
답이 뻔한 의문이다. 미르는 그렇게 느끼면서도 도저히 해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지쳐버린 미르는 검을 어깨에 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풍경은 온통 흰모래뿐. 색이 쭉 빠진 사막은 마치 탈진한 미르의 모습과 같았다.
미르가 조각에게 ‘잡혀가기’ 전 모래 위에 새겼던 발자국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바람조차 없는 이 세계에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기 힘들었다.
시간이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또 다른 부름. 사방이 또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타올라 갈색으로 변해버린 들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 급조한 울타리와 참호.
미르는 갑작스레 피곤해졌다. 이렇게 짧은 주기로 ‘부름’을 받은 적은 없었다. 거기에, 미르가 지켜야 할 약자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각이 자신을 부르는 이유는 그들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보다, 미르의 적은 어디에 있는 걸까?
미르의 싸움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번에 미르를 불러낸 유리 조각은 멀리 날아가기 전에 잠시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잇따른 경험을 통해 그녀는 다시는 그 조각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조각의 이름은 아르케아. 깨어났을 때부터 어째선지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아르케아는 ‘상황’에 놓인 다른 세계의 모습을 미르에게 보여주었다.
미르는 조각을 만질 수는 없었지만, 조각은 미르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수없이도 조각은 미르를 불러내어, 다양한 상황에 놓인 다양한 세계로 데려가 주었다.
하지만 미르의 목적은 언제나 같았다.
적을 쓰러뜨리는 것. 철저하게 부수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하는 것.
언제나 필연적으로 미르의 뒤에는 스스로는 싸울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피를 끓게 하는 전투의 황홀감 앞에서는 무색해졌지만.
언제부터 지니고 있었는지는 몰랐으나, 미르는 눈을 떴을 때부터 함께했던 이 검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어쩌면, 너무 지나칠 정도로 능숙하게. 미르는 여러 세계의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아주 간단하게 해낼 수 있었다.
적들을 쓰러뜨리는 것조차 크게 어렵지 않았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사람들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투를 마주하면 그러한 걱정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맹렬한 폭력의 기쁨이 온몸에 흐르도록 하며 전투를 즐겼다.
그러나 그런 황홀감이 사라지는 순간은 점점 더 빨리 찾아왔다. 공허함과 피로감만이 미르를 채웠고, 그로부터 회복하기 까지는 몇 시간, 며칠이 걸렸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되기까지는 더 오래 걸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차분해졌을 때엔, 미르는 그 세계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세계들이 이곳과는 다른 세계라는, 여태껏 굳게 믿어왔던 ‘사실’조차 이제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장소들은 마치 세계가 아니라… 어째선지 안에 들어가 행동할 수 있는 ‘동영상’처럼 느껴졌다.
답이 뻔한 의문이다. 미르는 그렇게 느끼면서도 도저히 해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지쳐버린 미르는 검을 어깨에 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풍경은 온통 흰모래뿐. 색이 쭉 빠진 사막은 마치 탈진한 미르의 모습과 같았다.
미르가 조각에게 ‘잡혀가기’ 전 모래 위에 새겼던 발자국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바람조차 없는 이 세계에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기 힘들었다.
시간이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또 다른 부름. 사방이 또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타올라 갈색으로 변해버린 들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 급조한 울타리와 참호.
미르는 갑작스레 피곤해졌다. 이렇게 짧은 주기로 ‘부름’을 받은 적은 없었다. 거기에, 미르가 지켜야 할 약자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각이 자신을 부르는 이유는 그들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보다, 미르의 적은 어디에 있는 걸까?
미르의 싸움은, 어디에 있는 걸까?
====# 8-3 #====
전쟁.
미르는 전투는 몇 번이고 경험했지만, 전쟁은 경험해 본 바가 없다.
그녀는 사람들이 끔찍할 정도로 효율적인 방법으로 타인을 죽이고, 공포에 질려 살기 위해 달아나고, 영웅적인 업적을 이뤄내고, 지독하게 불명예스러운 추태를 보이는 모습을 보았다.
어디를 돌아보든 미르보다 약한 자들만이 존재했다.
공포에 질린 순박한 얼굴,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미르를 볼 수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마치 환영인 것처럼, 빛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처럼. 그럼에도 미르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그 덕에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어디를 돌아보든, 적들만이 존재했다. 군인들은 무장을 해제한 적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가공할 만한 무기, 인간성이라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다가오는 죽음.
미르는 그 무기들을 파괴했고, 그럴수록 더 많은 적이 다른 편에서 몰려왔다.
푸른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붉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싸우고 있었다. 미르는 재빨리 결단을 내리고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붉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미르의 등 뒤에서, 방금 전 지켜낸 사람들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마치 연기처럼.
머리 위로 치솟은 전함이 대지에 순수한 파괴의 비를 뿌렸다. 푸른 군복에 달린 것과 같은 휘장이 그려진 전함이었다.
전함의 일격은 한순간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저들이 진정한 적인 걸까?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미르는 팔을 뒤로 빼고서, 조준을 위해 잠시 멈춘 후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을 허공에 던졌다.
칼날은 함대를 향해 위로 날아올랐고, 전함을 갈가리 찢으며 창공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전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미르의 눈에 비쳤다. 새하얀 천이 그들의 위로 솟아올랐다. 낙하산인가?
붉은 군인들이 노리기 아주 좋은 속도로, 그들은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황홀감은 사라졌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허탈함이 다시 몰려왔다.
이번에는 절망도 함께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
망설임. 잘못된 판단을 내린 후의 망설임과, 쓰러뜨릴 적을 확실히 정하지 못한 망설임.
공포, 자신의 결정이 더 나쁜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공포.
황홀감은 사라졌다.
믿고 있던 동료가 자신을 배신한 기분이었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자신을 남겨두고 간 듯한 느낌. 미르는 손을 뻗어 없는 것을 찾으려 애썼다.
여기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데. 다시 한 걸음 내디딜 힘조차 없는데.
그래도 그 황홀감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미르는, 마치 저기 부상입은 군인들처럼, 무릎을 꿇었다.
몇 시간이 지났다.
격렬했던 전투는 점점 잦아들었고, 전쟁의 공포만이 대지를 잠식했다.
미르는 손으로 귀를 막아 사람들의 신음과 비명을 듣지 않으려 애썼다. 눈을 꼭 감아 그 무엇도 보지 않으려 했고, 냄새조차 맡지 않으려 했다.
내 탓이 아니야. 내 탓이 아니야.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명백히 이 모든 건 미르의 탓이었다.
뭔가 방법이, 이 상황을 바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미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방법 따위는 없었다. 이를 깨닫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일련의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신경 그 자체가 닳아빠져 공황이 몸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
마침내 주변의 광경이 다시 하얗게 변하며, 미르는 언제나 그랬듯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왔다.
즉시, 미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땅으로 무너져내렸다. 몇 시간 전 하늘로 날렸던 검이 건조한 소리를 내며 모래 위로 떨어졌다.
미르는 가만히 제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저 망할 하늘의 지독한 하얀 빛이 자신을 잠식하지 않도록.
난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 세계가 나에게서 원하는 게 뭘까?
이 세계에서 깨어난 이후로, 미르에게는 ‘소환’에 대해 생각하거나 잠을 자는 데에만 시간을 썼다. 하지만 자신에게 기억이 없다는 사실은, 마치 유령처럼 미르의 머리를 맴돌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뭐지?
미르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길게 뻗은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가는 길에 목적지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미르도 모르는 사이에, 멀리 떨어진 곳에 찍힌 그녀의 발자국은 다른 사람의 발자국과 겹쳐있었다.
미르는 기도할 뿐. 도대체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그럼에도 기도했다.
언젠가 이 공허한 모래 구덩이에서, 조금이라도 안식을 찾을 수 있기를 빌며.
미르는 전투는 몇 번이고 경험했지만, 전쟁은 경험해 본 바가 없다.
그녀는 사람들이 끔찍할 정도로 효율적인 방법으로 타인을 죽이고, 공포에 질려 살기 위해 달아나고, 영웅적인 업적을 이뤄내고, 지독하게 불명예스러운 추태를 보이는 모습을 보았다.
어디를 돌아보든 미르보다 약한 자들만이 존재했다.
공포에 질린 순박한 얼굴,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미르를 볼 수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마치 환영인 것처럼, 빛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처럼. 그럼에도 미르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그 덕에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어디를 돌아보든, 적들만이 존재했다. 군인들은 무장을 해제한 적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가공할 만한 무기, 인간성이라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다가오는 죽음.
미르는 그 무기들을 파괴했고, 그럴수록 더 많은 적이 다른 편에서 몰려왔다.
푸른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붉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싸우고 있었다. 미르는 재빨리 결단을 내리고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붉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미르의 등 뒤에서, 방금 전 지켜낸 사람들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마치 연기처럼.
머리 위로 치솟은 전함이 대지에 순수한 파괴의 비를 뿌렸다. 푸른 군복에 달린 것과 같은 휘장이 그려진 전함이었다.
전함의 일격은 한순간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저들이 진정한 적인 걸까?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미르는 팔을 뒤로 빼고서, 조준을 위해 잠시 멈춘 후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을 허공에 던졌다.
칼날은 함대를 향해 위로 날아올랐고, 전함을 갈가리 찢으며 창공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전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미르의 눈에 비쳤다. 새하얀 천이 그들의 위로 솟아올랐다. 낙하산인가?
붉은 군인들이 노리기 아주 좋은 속도로, 그들은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황홀감은 사라졌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허탈함이 다시 몰려왔다.
이번에는 절망도 함께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
망설임. 잘못된 판단을 내린 후의 망설임과, 쓰러뜨릴 적을 확실히 정하지 못한 망설임.
공포, 자신의 결정이 더 나쁜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공포.
황홀감은 사라졌다.
믿고 있던 동료가 자신을 배신한 기분이었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자신을 남겨두고 간 듯한 느낌. 미르는 손을 뻗어 없는 것을 찾으려 애썼다.
여기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데. 다시 한 걸음 내디딜 힘조차 없는데.
그래도 그 황홀감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미르는, 마치 저기 부상입은 군인들처럼, 무릎을 꿇었다.
몇 시간이 지났다.
격렬했던 전투는 점점 잦아들었고, 전쟁의 공포만이 대지를 잠식했다.
미르는 손으로 귀를 막아 사람들의 신음과 비명을 듣지 않으려 애썼다. 눈을 꼭 감아 그 무엇도 보지 않으려 했고, 냄새조차 맡지 않으려 했다.
내 탓이 아니야. 내 탓이 아니야.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명백히 이 모든 건 미르의 탓이었다.
뭔가 방법이, 이 상황을 바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미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방법 따위는 없었다. 이를 깨닫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일련의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신경 그 자체가 닳아빠져 공황이 몸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
마침내 주변의 광경이 다시 하얗게 변하며, 미르는 언제나 그랬듯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왔다.
즉시, 미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땅으로 무너져내렸다. 몇 시간 전 하늘로 날렸던 검이 건조한 소리를 내며 모래 위로 떨어졌다.
미르는 가만히 제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저 망할 하늘의 지독한 하얀 빛이 자신을 잠식하지 않도록.
난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 세계가 나에게서 원하는 게 뭘까?
이 세계에서 깨어난 이후로, 미르에게는 ‘소환’에 대해 생각하거나 잠을 자는 데에만 시간을 썼다. 하지만 자신에게 기억이 없다는 사실은, 마치 유령처럼 미르의 머리를 맴돌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뭐지?
미르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길게 뻗은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가는 길에 목적지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미르도 모르는 사이에, 멀리 떨어진 곳에 찍힌 그녀의 발자국은 다른 사람의 발자국과 겹쳐있었다.
미르는 기도할 뿐. 도대체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그럼에도 기도했다.
언젠가 이 공허한 모래 구덩이에서, 조금이라도 안식을 찾을 수 있기를 빌며.
3.3. Vermillion Shield
Vermillion은 Scarlet과 동일한 '주홍빛'으로, 시라베를 의미하고 Shield는 '방패'로 미르를 의미한다.====# 8-4 #====
이 애, 죽고 말거야.
기억 속이든...
아르케아에서든...
...
이 텅 빈 지옥에서 죽으면, 영혼은 어떻게 되어버리는 걸까?
미르는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여태까지는 자신이 살아남는 것만으로 족했다.
이 곳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미르는 언제나 혼자였으며, 오로지 검만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지금, 그녀의 곁에 있는 소녀가 죽는다.
미르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구를 지켜야 할 지, 누가 살아남을지, 누가 마지막 숨을 내뱉을지.
전부 알 수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미르는 확신했다.
이 소녀는 죽을 운명이라고.
====# 8-5 #====기억 속이든...
아르케아에서든...
...
이 텅 빈 지옥에서 죽으면, 영혼은 어떻게 되어버리는 걸까?
미르는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여태까지는 자신이 살아남는 것만으로 족했다.
이 곳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미르는 언제나 혼자였으며, 오로지 검만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지금, 그녀의 곁에 있는 소녀가 죽는다.
미르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구를 지켜야 할 지, 누가 살아남을지, 누가 마지막 숨을 내뱉을지.
전부 알 수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미르는 확신했다.
이 소녀는 죽을 운명이라고.
새하얀 모래를 파고드는 두 맨발.
누운 등 뒤로 전해지는 사막의 온기를 느끼던 미르가,
지금 보이는 풍경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원히 빛나는 하늘을 등지고 몸을 기울여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소녀의 실루엣.
이상하게 생긴 드레스를 입고, 미르 자신과 비슷한 길이의 은빛 머리칼을 두 갈래로 묶어올린 소녀.
...미르도, 본인조차도 모르는 그 소녀의 이름은 시라베였다.
미르의 시선이 저 소녀가 들고 있는 물건으로 옮겨갔다.
악기인가?
소녀의 말로 침묵이 깨졌다.
"괜찮냐?"
미르는 침묵을 지켰다. 아래를 내려보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채색의 모래 언덕. 위를 올려보았다.
언제나 자기를 맞이해주던 새하얀 하늘. 마지막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다..." 미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미르의 머릿속에서 한 기억이 불꽃처럼 반짝였다. 언젠가 들었던 노랫소리.
...이 소녀가 부렀던 것이겠지.
"놀랐어? 나는 어떻겠냐." 소녀가 말했다. "그나저나 괜찮냐? 일어설 수는 있겠어?"
일어선다니. 정말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미르는 지쳤다. 너무나도 지쳤다.
"...어디 안 좋냐?"
어디 안 좋냐고? 모든 게 안 좋았다. 안 좋다는 것 만이 미르의 삶에 있어 유일한 상수였다.
소녀가 미르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까보다 더욱 걱정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음... 아니다, 일단은... 자기소개부터 해보자. 넌 어떤 사람이니?"
어떤 사람이냐고? 미르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만이 잔뜩 떠올랐다. 방랑자. 용사. 광전사. 참살자. 발키리...
무능력하고, 무식한, 실패자.
...미르는 고개를 한 번 털었다.
"모르겠어? 나도 똑같아." 소녀가 말했다. "여기서 깨어나기 전의 기억은 아무것도 안 떠올라. 내 이름조차도."
"나는 꼭두각시야."
미르가 마침내 대답했다.
"이 망할 세계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기 위해 태어난 꼭두각시..."
소녀가 놀란 얼굴로 미르를 바라보았다. "어... 뭐라고?"
"나도 모르겠어..." 미르가 말을 흐렸다. "이 세계의 장단에 맞춰 춤출 수 밖에 없다는 것 외에는..."
소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할 수 밖에 없다'니... 너무 무거운 거 아냐? 우리 모두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어, 나는."
"...말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는데, 정확히 뭐가 잘못된 건지 말해줄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미르는 마침내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소녀는 만났다.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소녀가 또 둘이.
텅 빈 세상에 홀로 남은 외로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두 소녀.
새하얀 양갈래 머리의 소녀는 끈질기게 미르의 곁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말했다.
밋밋한 회색 모래에 대해, 창백한 하늘에 대해, 자기 자신의 경험에 대해,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렇게 혼자 말하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미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 8-6 #====누운 등 뒤로 전해지는 사막의 온기를 느끼던 미르가,
지금 보이는 풍경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원히 빛나는 하늘을 등지고 몸을 기울여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소녀의 실루엣.
이상하게 생긴 드레스를 입고, 미르 자신과 비슷한 길이의 은빛 머리칼을 두 갈래로 묶어올린 소녀.
...미르도, 본인조차도 모르는 그 소녀의 이름은 시라베였다.
미르의 시선이 저 소녀가 들고 있는 물건으로 옮겨갔다.
악기인가?
소녀의 말로 침묵이 깨졌다.
"괜찮냐?"
미르는 침묵을 지켰다. 아래를 내려보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채색의 모래 언덕. 위를 올려보았다.
언제나 자기를 맞이해주던 새하얀 하늘. 마지막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다..." 미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미르의 머릿속에서 한 기억이 불꽃처럼 반짝였다. 언젠가 들었던 노랫소리.
...이 소녀가 부렀던 것이겠지.
"놀랐어? 나는 어떻겠냐." 소녀가 말했다. "그나저나 괜찮냐? 일어설 수는 있겠어?"
일어선다니. 정말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미르는 지쳤다. 너무나도 지쳤다.
"...어디 안 좋냐?"
어디 안 좋냐고? 모든 게 안 좋았다. 안 좋다는 것 만이 미르의 삶에 있어 유일한 상수였다.
소녀가 미르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까보다 더욱 걱정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음... 아니다, 일단은... 자기소개부터 해보자. 넌 어떤 사람이니?"
어떤 사람이냐고? 미르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만이 잔뜩 떠올랐다. 방랑자. 용사. 광전사. 참살자. 발키리...
무능력하고, 무식한, 실패자.
...미르는 고개를 한 번 털었다.
"모르겠어? 나도 똑같아." 소녀가 말했다. "여기서 깨어나기 전의 기억은 아무것도 안 떠올라. 내 이름조차도."
"나는 꼭두각시야."
미르가 마침내 대답했다.
"이 망할 세계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기 위해 태어난 꼭두각시..."
소녀가 놀란 얼굴로 미르를 바라보았다. "어... 뭐라고?"
"나도 모르겠어..." 미르가 말을 흐렸다. "이 세계의 장단에 맞춰 춤출 수 밖에 없다는 것 외에는..."
소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할 수 밖에 없다'니... 너무 무거운 거 아냐? 우리 모두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어, 나는."
"...말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는데, 정확히 뭐가 잘못된 건지 말해줄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미르는 마침내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소녀는 만났다.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소녀가 또 둘이.
텅 빈 세상에 홀로 남은 외로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두 소녀.
새하얀 양갈래 머리의 소녀는 끈질기게 미르의 곁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말했다.
밋밋한 회색 모래에 대해, 창백한 하늘에 대해, 자기 자신의 경험에 대해,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렇게 혼자 말하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미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몇 시간, 어쩌면 며칠. 모래 구덩이들을 헤쳐나가며,
이따금씩 미르의 말소리만이 적막을 깨는 의미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고통, 피, 혼돈, 잃어버린 황홀감,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온 탈력감.
미르는 그것들을 이야기했다.
아르케아, 유리 조각 속에서 마주한 세계들에 대해.
자신의 실패들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실패자인지 대해...
소녀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미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히, 가만히.
미르는 말을 이어갔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소녀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알려주었다.
저 유리조각들, '아르케아'는 사실 기억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 지는 본인도 알 수 없다.
그냥 알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의문이 생겨날 뿐이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항상 행복하냐? 나라도 무리지 그건..."
백발의 소녀가 언젠가 미르에게 말했다.
"사실 아직도... 아직도 무서워. 모든 게. 계속해서 질문이 떠올라.
'왜 내가 여기에 있는거지?' '왜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는 거지?'
그도 그럴게, 여긴 이해할 수가 없는 말도 안되는 세계니까."
미르는 말 없이 고개를 내렸다. 무어라 답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을, 너를 만나고 나서는 이제 그 때만큼 걱정은 안하게 됐어." 소녀가 덧붙였다.
미르가 움찔했다.
아무런 경고 없이, 그녀의 마음 속에 무언가 찔리는 감각이 들었다.
소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미르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마침내 소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악기를 연주할 줄 안다는 게 있지... 응? 왜 그래?"
미르의 눈이 소녀를 스쳐지나가는 물체에 꽃혔다.
또다.
또 그 세계다.
안돼.
지금은... 안돼...
미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온 몸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소녀의 말이 또다시 귀에 닿았다.
"괜찮아? 잠깐, 저거... 저게 그 '소환'인가 하는 그거냐?" 시라베가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팔을 잡는 손이 느껴졌다.
미르가 눈을 뜨자, 백발의 소녀가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눈엔 당혹스러움이 서려있었다.
그렇게, '소환'이 시작되었다.
미르 뿐만이 아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소녀와 함께 기억의 세계로 소환되었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불안감이 미르를 덮쳤다.
이 소녀는...
왜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미르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겨대한 불안감이 미르를 덮쳤다.
이 소녀는...
왜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미르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소녀는 이곳에서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단이 없다. 불가능하다.
이 애, 죽고 말거야.
====# 8-7 #====이따금씩 미르의 말소리만이 적막을 깨는 의미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고통, 피, 혼돈, 잃어버린 황홀감,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온 탈력감.
미르는 그것들을 이야기했다.
아르케아, 유리 조각 속에서 마주한 세계들에 대해.
자신의 실패들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실패자인지 대해...
소녀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미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히, 가만히.
미르는 말을 이어갔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소녀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알려주었다.
저 유리조각들, '아르케아'는 사실 기억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 지는 본인도 알 수 없다.
그냥 알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의문이 생겨날 뿐이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항상 행복하냐? 나라도 무리지 그건..."
백발의 소녀가 언젠가 미르에게 말했다.
"사실 아직도... 아직도 무서워. 모든 게. 계속해서 질문이 떠올라.
'왜 내가 여기에 있는거지?' '왜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는 거지?'
그도 그럴게, 여긴 이해할 수가 없는 말도 안되는 세계니까."
미르는 말 없이 고개를 내렸다. 무어라 답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을, 너를 만나고 나서는 이제 그 때만큼 걱정은 안하게 됐어." 소녀가 덧붙였다.
미르가 움찔했다.
아무런 경고 없이, 그녀의 마음 속에 무언가 찔리는 감각이 들었다.
소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미르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마침내 소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악기를 연주할 줄 안다는 게 있지... 응? 왜 그래?"
미르의 눈이 소녀를 스쳐지나가는 물체에 꽃혔다.
또다.
또 그 세계다.
안돼.
지금은... 안돼...
미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온 몸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소녀의 말이 또다시 귀에 닿았다.
"괜찮아? 잠깐, 저거... 저게 그 '소환'인가 하는 그거냐?" 시라베가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팔을 잡는 손이 느껴졌다.
미르가 눈을 뜨자, 백발의 소녀가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눈엔 당혹스러움이 서려있었다.
그렇게, '소환'이 시작되었다.
미르 뿐만이 아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소녀와 함께 기억의 세계로 소환되었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불안감이 미르를 덮쳤다.
이 소녀는...
왜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미르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겨대한 불안감이 미르를 덮쳤다.
이 소녀는...
왜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미르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소녀는 이곳에서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단이 없다. 불가능하다.
이 애, 죽고 말거야.
아직 자신의 팔에 꼭 달라붙어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미르가 판단하기를 시라베는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그렇다. 몸을 지킬 수단이 있든 없든, 이 소녀는 이 기억에서 죽는다.
그 과정이나 이유는 미르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소녀는 분명히 여기서 죽을 운명이다.
이전이었다면 이 소녀는 그저 이 세계의 또다른 이름 없는 행인이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달랐다.
미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끔찍하게 뒤틀린 형상의 날짐승 무리가 두 소녀를 향해 바람을 타고 쏜살같이 낙하했다.
그 뒤로 보이는 만월이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이전의 기억에서 마주한 적들과 같이, 괴물들의 몸은 칠흑같은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빛나는 것은 세 개의 붉은 눈동자 뿐이었다.
미르는 싸울 줄은 알아도 나는 법은 몰랐다.
이 기억의 '주인'도 아마 나는 법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미르는 팔을 흔들어 소녀를 뿌리쳤다.
"놔."
그렇게 말하고 검을 빼들어 날짐승의 형상을 한 그림자에게 겨누었다.
온 몸의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들리는 것은...
"이, 이길 수 있어?"
미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르는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또다시 '황홀감'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수없이 많은 핏빛 전장을 헤쳐나올 수 있게 해준 그 감각을.
...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피로와 절망으로 절여진 몸을 움직여 검을 휘둘러 적들을 베어냈다.
괴물들이 하나 둘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소녀의 비명이 들렸다.
한 무리의 괴물이 방향을 틀어 소녀를 향해 날아가 머리 위를 둥글게 선회하고 있었다.
직감이,
직감이 말햇다.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갑작스레 나타난 전장에서 싸우는 것과 같이.
패배가 확정된 전투에서 싸우는 것과 같이.
소녀의 죽음은 결정된 일이다. 그러니 굳이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
시라베의 인생조차도...
...지금 끝나든, 앞으로 이어져가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기억은 미르에게 불가능한 도전을 밀어붙였다.
스무 마리를 베어내면 곧 백마리가 또 나타났다.
앞으로는 벽. 뒤로는 한 사람의 죽음.
'지킨다'는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무슨 가치가 있냐는 말이야.
...아니, 가치는 있어. 이미 알아차렸잖아, 안 그래?
이 이상한 기억은...
...이미 죽어버린 기억의 주인과, 미르 자신과, 소녀가 남길 유품이 될 것이라는 걸.
그 순간, 놀랍게도...
그 체념과 비관을 깨부수는 황금빛 포효가 울려퍼졌다.
신념의 목소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아름다운 목소리가 근엄하게 명했다.
"야 이 멍청아! 뭘 가만히 있어! 빨리 칼 안 휘두르고!"
====# 8-8 #====미르가 판단하기를 시라베는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그렇다. 몸을 지킬 수단이 있든 없든, 이 소녀는 이 기억에서 죽는다.
그 과정이나 이유는 미르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소녀는 분명히 여기서 죽을 운명이다.
이전이었다면 이 소녀는 그저 이 세계의 또다른 이름 없는 행인이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달랐다.
미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끔찍하게 뒤틀린 형상의 날짐승 무리가 두 소녀를 향해 바람을 타고 쏜살같이 낙하했다.
그 뒤로 보이는 만월이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이전의 기억에서 마주한 적들과 같이, 괴물들의 몸은 칠흑같은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빛나는 것은 세 개의 붉은 눈동자 뿐이었다.
미르는 싸울 줄은 알아도 나는 법은 몰랐다.
이 기억의 '주인'도 아마 나는 법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미르는 팔을 흔들어 소녀를 뿌리쳤다.
"놔."
그렇게 말하고 검을 빼들어 날짐승의 형상을 한 그림자에게 겨누었다.
온 몸의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들리는 것은...
"이, 이길 수 있어?"
미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르는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또다시 '황홀감'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수없이 많은 핏빛 전장을 헤쳐나올 수 있게 해준 그 감각을.
...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피로와 절망으로 절여진 몸을 움직여 검을 휘둘러 적들을 베어냈다.
괴물들이 하나 둘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소녀의 비명이 들렸다.
한 무리의 괴물이 방향을 틀어 소녀를 향해 날아가 머리 위를 둥글게 선회하고 있었다.
직감이,
직감이 말햇다.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갑작스레 나타난 전장에서 싸우는 것과 같이.
패배가 확정된 전투에서 싸우는 것과 같이.
소녀의 죽음은 결정된 일이다. 그러니 굳이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
시라베의 인생조차도...
...지금 끝나든, 앞으로 이어져가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기억은 미르에게 불가능한 도전을 밀어붙였다.
스무 마리를 베어내면 곧 백마리가 또 나타났다.
앞으로는 벽. 뒤로는 한 사람의 죽음.
'지킨다'는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무슨 가치가 있냐는 말이야.
...아니, 가치는 있어. 이미 알아차렸잖아, 안 그래?
이 이상한 기억은...
...이미 죽어버린 기억의 주인과, 미르 자신과, 소녀가 남길 유품이 될 것이라는 걸.
그 순간, 놀랍게도...
그 체념과 비관을 깨부수는 황금빛 포효가 울려퍼졌다.
신념의 목소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아름다운 목소리가 근엄하게 명했다.
"야 이 멍청아! 뭘 가만히 있어! 빨리 칼 안 휘두르고!"
소녀가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미르의 앞에 나타났다.
미르의 눈 앞으로 도끼가 번쩍이며 괴수를 갈랐다.
...소녀의 연약한 팔이 도끼 자루를 꼭 붙잡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건 '도끼'가 아니었다.
기타였다.
시라베가 기타의 헤드로 괴물들의 머리통을 깨부수었다.
괴물의 무리가 새로 나타나자 힘차게 기타를 땅에 내리쳤다.
무릎, 팔, 다리,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쓰러질 것만 같이 보였음에도, 시라베는 그 의지력만으로... 단단하게 체간을 고정시켜 똑바로 섰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에서 눈을 휘둥그레 뜬 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소리쳤다. 아름다운 황금빛 목소리로.
"야! 앞에 똑바로 봐!"
"그 칼 들고 있음 뭐하냐!! 휘두르라고!!"
목소리에 담긴 결의와 의지.
분명 진작 포기했을 터이다. 그런데도... 검을 쥔 미르의 손에 또다시 힘이 들어갔다.
소녀가 미르를 노려다보았다. 두려움보다는 분노에 찬 눈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어?" 소녀가 말했다. "그럼 내가 기회를 줄게! 길을 만들어 주겠다고! 앞을 봐!"
시라베는 진실로 그리 하였다.
"자유는 네가 스스로 쟁취해! 너 자신을 위한게 아니더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그 칼을 쓰란 말이야 이 멍청아!"
미르의 이가 갈렸다. 괴물이 하나 그녀에게 날아들어 거의 넘어질 뻔 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곧 굳게 닫은 이가 미소를 머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바로 지금이야 말로, 앞에 놓인 길을 나아가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그림자 괴물들이 또다시 강하해왔다...
"그래, 알았어." 미르가 조그맣게 말했다. "휘두를 테니까, 머리 숙여...!"
자세를 바로잡고, 발을 한 번 구르고 지면에 고정시켰다.
칼을 뒤로 빼고 숨을 길게 내뱉았다.
...증기처럼, 타오르는 불길처럼.
근육이 수축하며, 미르의 흑요석 검이...
기이한 에너지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미르의 힘인 걸까?
...집중하고, 더욱 큰 힘을 검으로 흘려보냈다.
칼을 천천히 치켜들고서...
태풍을 부르듯, 두 팔로, 두 손으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듯,
칼을 내려치고, 길을 열었다.
머리 위로 세차게 부는 강력한 돌풍에 시라베의 은빛 머리칼이 마구 춤췄다.
소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림자들이 찢겨져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르는 관성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맡겼다.
미르가 검을 땅에 내리친 후 앞으로 죽 그었다.
또다시 폭풍이 일어나 이번엔 그녀의 왼쪽의 하늘로 칼날같은 바람이 몰아쳤다.
찰나의 시간동안 멈춘 후, 똑같은 바람을 오른쪽 하늘에도 일으켰다.
우아함과 분노가 자아내는 춤. 어두웠던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미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곧 입술 사이로 작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중요한 건... 싸움 그 자체가 아니었던 거야.
아니, 나의 목적은...
검이자, 방패가 되는 것.
미르는 마지막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그림자 괴물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미르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끝이라는 것을. 그 짜증나는 사실을.
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팔을 꼭 껴안은 소녀를 보며, 또 다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시작이라는 것을.
미르가 칼날을 찌르듯 앞으로 내밀자 강력한 힘이 그림자들을 뚫고 솟구쳐올랐다.
구름과 하늘을 가로질러,
보이지 않는 태양을 향해...
그리고 기억의 경계선 너머로.
'운명'? '필연'? 그런게 아니다.
이것은, 그녀의 '자유'였다.
기억이 멈추었다. '이 장소'의 현실 그 자체가 뒤틀리고 풀어헤쳐지고 찢겨나갔다.
이미 결말이 난 비극에 행복한 끝이 찾아오다니, 용납할 수 없다. 운명의 계획이 어긋나가고 말았다.
깨진 유리 조각과 공기와 함께, 이 조그마한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모든 것이 끝난 후 미르가 주변을 둘러보자
그녀의 직감과 지식, 그 보든 것과는 상충되는 모습이 펼쳐져있었다.
적의 군세를 섬멸한 후 돌아온 익숙한 아르케아의 황량한 땅.
멎은 기억의 잔향이 미르 주변의 '공간'에서 반짝거렸다.
그리고 소녀가... 살아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미르는 아르케아에서 깨어난 이후로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웃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크게 웃었다. 이 백색의 세계를, 미르가 웃음과 울음으로 덧칠했다.
====# 8-9 #====미르의 눈 앞으로 도끼가 번쩍이며 괴수를 갈랐다.
...소녀의 연약한 팔이 도끼 자루를 꼭 붙잡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건 '도끼'가 아니었다.
기타였다.
시라베가 기타의 헤드로 괴물들의 머리통을 깨부수었다.
괴물의 무리가 새로 나타나자 힘차게 기타를 땅에 내리쳤다.
무릎, 팔, 다리,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쓰러질 것만 같이 보였음에도, 시라베는 그 의지력만으로... 단단하게 체간을 고정시켜 똑바로 섰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에서 눈을 휘둥그레 뜬 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소리쳤다. 아름다운 황금빛 목소리로.
"야! 앞에 똑바로 봐!"
"그 칼 들고 있음 뭐하냐!! 휘두르라고!!"
목소리에 담긴 결의와 의지.
분명 진작 포기했을 터이다. 그런데도... 검을 쥔 미르의 손에 또다시 힘이 들어갔다.
소녀가 미르를 노려다보았다. 두려움보다는 분노에 찬 눈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어?" 소녀가 말했다. "그럼 내가 기회를 줄게! 길을 만들어 주겠다고! 앞을 봐!"
시라베는 진실로 그리 하였다.
"자유는 네가 스스로 쟁취해! 너 자신을 위한게 아니더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그 칼을 쓰란 말이야 이 멍청아!"
미르의 이가 갈렸다. 괴물이 하나 그녀에게 날아들어 거의 넘어질 뻔 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곧 굳게 닫은 이가 미소를 머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바로 지금이야 말로, 앞에 놓인 길을 나아가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그림자 괴물들이 또다시 강하해왔다...
"그래, 알았어." 미르가 조그맣게 말했다. "휘두를 테니까, 머리 숙여...!"
자세를 바로잡고, 발을 한 번 구르고 지면에 고정시켰다.
칼을 뒤로 빼고 숨을 길게 내뱉았다.
...증기처럼, 타오르는 불길처럼.
근육이 수축하며, 미르의 흑요석 검이...
기이한 에너지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미르의 힘인 걸까?
...집중하고, 더욱 큰 힘을 검으로 흘려보냈다.
칼을 천천히 치켜들고서...
태풍을 부르듯, 두 팔로, 두 손으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듯,
칼을 내려치고, 길을 열었다.
머리 위로 세차게 부는 강력한 돌풍에 시라베의 은빛 머리칼이 마구 춤췄다.
소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림자들이 찢겨져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르는 관성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맡겼다.
미르가 검을 땅에 내리친 후 앞으로 죽 그었다.
또다시 폭풍이 일어나 이번엔 그녀의 왼쪽의 하늘로 칼날같은 바람이 몰아쳤다.
찰나의 시간동안 멈춘 후, 똑같은 바람을 오른쪽 하늘에도 일으켰다.
우아함과 분노가 자아내는 춤. 어두웠던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미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곧 입술 사이로 작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중요한 건... 싸움 그 자체가 아니었던 거야.
아니, 나의 목적은...
검이자, 방패가 되는 것.
미르는 마지막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그림자 괴물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미르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끝이라는 것을. 그 짜증나는 사실을.
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팔을 꼭 껴안은 소녀를 보며, 또 다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시작이라는 것을.
미르가 칼날을 찌르듯 앞으로 내밀자 강력한 힘이 그림자들을 뚫고 솟구쳐올랐다.
구름과 하늘을 가로질러,
보이지 않는 태양을 향해...
그리고 기억의 경계선 너머로.
'운명'? '필연'? 그런게 아니다.
이것은, 그녀의 '자유'였다.
기억이 멈추었다. '이 장소'의 현실 그 자체가 뒤틀리고 풀어헤쳐지고 찢겨나갔다.
이미 결말이 난 비극에 행복한 끝이 찾아오다니, 용납할 수 없다. 운명의 계획이 어긋나가고 말았다.
깨진 유리 조각과 공기와 함께, 이 조그마한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모든 것이 끝난 후 미르가 주변을 둘러보자
그녀의 직감과 지식, 그 보든 것과는 상충되는 모습이 펼쳐져있었다.
적의 군세를 섬멸한 후 돌아온 익숙한 아르케아의 황량한 땅.
멎은 기억의 잔향이 미르 주변의 '공간'에서 반짝거렸다.
그리고 소녀가... 살아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미르는 아르케아에서 깨어난 이후로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웃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크게 웃었다. 이 백색의 세계를, 미르가 웃음과 울음으로 덧칠했다.
둘은 잠시 앉아있기로 했다. 미르는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있었고,
소녀는 조용히 천 조각에 무언가를 바느질해 넣고 있었다. 새빨간 사각형 천에 새겨지는 익숙한 검은 형상...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미르는 마침내 떠올렸다.
그 기억 속의 괴물들이다. 조금... 귀여워진 형태였다. 미르의 목에서 조그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세계에서 시라베는 미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어쩌면 미르가 그저 자신의 절망감을 잘 숨기지 못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잠시 후, 소녀가 마침내 바느질을 끝내고 실과 바늘을 주섬주섬 챙겨넣었다.
미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때 치웠던 생각들이 다시 미르의 머릿속으로 찾아왔다.
어떻게 기억의 결말을 바꾼다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걸까?
그보다도, 이 세계는 도대체 뭘까? 나는 누구일까? 이 세계 이전에 존재하던 사람일까?
'이전'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낡은 의문들이지만, 지금이야말로 숙고할 가치가 있는 의문들이었다.
미르는 소녀를 한 번 쳐다보고 일어나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또 몇 걸음, 또 몇 걸음... 소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미르가 뒤로 돌아보고 말했다. "같이 안 갈거야?"
소녀는 마치 미르의 의중을 재려는 듯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 아니, 가야지."
"그래." 미르가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이제야 앞을 보는구나."
"음... 그러게."
미르가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뒤에서 나를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으니... 안심이 되서 그런가봐."
미르가 등 뒤로 눈길을 흘리자, 시라베의 창백한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치." 소녀가 말했다. "또, 또 그런 세계로 빨려들어갈 것 같으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그렇지... 그래도 네가 말한 것 처럼, 반드시 뒤에서 너를 지켜봐주겠어."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럼 나도 나아갈거야." 소녀가 말했다. "너를 찾아낼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세상 반대편에 있어도? 절벽 아래에, 산중턱 한가운데에..."
"응... 상관 없어."
황금빛 목소리도... 조용할 수 있는 법이구나.
미르는 한 번 더, 그 목소리를 믿었다. 어깨의 힘이 풀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 상관 없지."
그렇게 두 소녀는 함께, 앞으로 걸어나갔다.
소녀는 조용히 천 조각에 무언가를 바느질해 넣고 있었다. 새빨간 사각형 천에 새겨지는 익숙한 검은 형상...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미르는 마침내 떠올렸다.
그 기억 속의 괴물들이다. 조금... 귀여워진 형태였다. 미르의 목에서 조그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세계에서 시라베는 미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어쩌면 미르가 그저 자신의 절망감을 잘 숨기지 못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잠시 후, 소녀가 마침내 바느질을 끝내고 실과 바늘을 주섬주섬 챙겨넣었다.
미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때 치웠던 생각들이 다시 미르의 머릿속으로 찾아왔다.
어떻게 기억의 결말을 바꾼다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걸까?
그보다도, 이 세계는 도대체 뭘까? 나는 누구일까? 이 세계 이전에 존재하던 사람일까?
'이전'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낡은 의문들이지만, 지금이야말로 숙고할 가치가 있는 의문들이었다.
미르는 소녀를 한 번 쳐다보고 일어나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또 몇 걸음, 또 몇 걸음... 소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미르가 뒤로 돌아보고 말했다. "같이 안 갈거야?"
소녀는 마치 미르의 의중을 재려는 듯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 아니, 가야지."
"그래." 미르가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이제야 앞을 보는구나."
"음... 그러게."
미르가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뒤에서 나를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으니... 안심이 되서 그런가봐."
미르가 등 뒤로 눈길을 흘리자, 시라베의 창백한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치." 소녀가 말했다. "또, 또 그런 세계로 빨려들어갈 것 같으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그렇지... 그래도 네가 말한 것 처럼, 반드시 뒤에서 너를 지켜봐주겠어."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럼 나도 나아갈거야." 소녀가 말했다. "너를 찾아낼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세상 반대편에 있어도? 절벽 아래에, 산중턱 한가운데에..."
"응... 상관 없어."
황금빛 목소리도... 조용할 수 있는 법이구나.
미르는 한 번 더, 그 목소리를 믿었다. 어깨의 힘이 풀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 상관 없지."
그렇게 두 소녀는 함께, 앞으로 걸어나갔다.
4. 아유
4.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1-1 | Colorful-1 | Oblivia 클리어 | ||
11-2 | Colorful-2 | Rugie 클리어 | ||
11-3 | Colorful-3 | init() 클리어 | ||
11-4 | Colorful-4 | 11-3 스토리 열람[2] | ||
11-5 | Colorful-5 | |||
11-6 | Colorful-6 | |||
11-7 | Colorful-7 | |||
11-8 | Colorful-8 | Désive 클리어 |
4.2. Colorful Dream
====# 11-1 #====이 사이로 느껴지는 평평하고 단단한 감촉. 딱 원하던 느낌이다.
날카롭고 삐죽삐죽한 모서리 때문에 혀가 간지럽다.
상실의 기억. 절박함과 실패로 이루어진 고통의 기억.
하지만 소녀는 이 기억을 그렇게 묘사하지 않고 단 한마디, “슬픈 기억”으로 정리해버릴 것이다.
어찌나 기대되는지,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안 먹어봐도 알 수 있다. 이건 아주 고소한 맛이 날 거라는 걸.
소녀는 유리 조각을 깨물었다.
“오...”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주황색과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박쥐같은 생물이 소녀의 오른쪽 어깨 위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이 생물의 이름은 팬즈다.
“배고팠어?”
검은색과 하얀색, 그리고 초록색과 주황색으로 이루어진 박쥐같은 생물이 소녀의 왼쪽 어깨 위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배고플 땐 언제든지 말해.”
이 생물의 이름은 드렘이다.
“음~!”
그녀는 행복에 가득 차 뺨에 손을 올리고 감탄했다. 이 사이로 유리 조각이 부서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산산조각 난 유리와 그 가루가 혀를 덮었다. 따뜻한 느낌. 멋진 저녁식사...
이를테면 소금기를 머금은 진한 육즙으로 가득 찬 고기와 같은 맛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소녀의 어휘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입에서 침을 흘리며 그녀가 내뱉은 감상은... “맛있어” 뿐이었다.
“잘됐네!” 신난 듯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팬즈가 말했다.
“마시쪙!” 유리 조각을 삼키며 아유가 말했다.
“맛있어, 라... 정확히 어떻게 맛있니?”
아유의 등 뒤에서 드렘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응... 스테이크 같아!”
그렇게 말하며 아유는 앞으로 힘차게 걸어나갔다. ‘박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스테이크는 어떤 맛이니?”
“에휴, 드렘아…”
길 잃은 아이를 대하는 듯한 억양으로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넌 아는 게 없구나!”
“스테이크가 무슨 맛인지 모를 뿐인걸.”
드렘은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정말 어떤 맛인데?”
“고기 맛이지!” 아유가 그렇게 말하고선, 무언가 특이한 걸 발견했는지 공기 중에 떠다니던 유리 조각 하나를 움켜쥐었다.
“그럼... 짠 맛인가?” 드렘이 물었다.
“짜고 맛있는 맛!”
맛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 아유는 방금 전에 움켜쥔 유리 조각을 입으로 털어넣었다. 웃음으로 가득 찬 새로운 삶과 성취와 축하의 기억이다.
아유의 언어로는 “행복한 기억”이다.
“그래! 짠거 다음엔 단 걸 먹어야지!” 팬즈가 소리쳤다.
“봐, 팬즈가 드렘 너보다 똑똑하네!” 코로 웃음 소리를 내며 아유가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어.” 드렘이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다고...”
새로 찾은 유리 조각을 쪽쪽 빨며, 드렘의 말을 흘려듣듯 아유는 “응 그래”라고 대답한 후 콧노래를 부르면서 팔을 흔들었다. 유리 조각에선 설탕과 같은 맛과 감촉이 느껴졌다.
그들의 앞으로는 백색의 세계가, 등 뒤로는 폐허로 가득 찬 대지가 펼쳐져 있다. 그 두 풍경은 같은 공간이다.
그리고 온 세상에는, 유리 조각이 흩뿌려져있다.
온 세상에서, 맛있는 음식이 소녀를 기다리고 있다.
아유가 어금니로 기억을 깨물어 부쉈다. 그 기억에 담긴 역사가 사라졌다.
먹을 것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 눈을 떴을 때부터 끊임없이 배고픈 소녀가 있다.
날카롭고 삐죽삐죽한 모서리 때문에 혀가 간지럽다.
상실의 기억. 절박함과 실패로 이루어진 고통의 기억.
하지만 소녀는 이 기억을 그렇게 묘사하지 않고 단 한마디, “슬픈 기억”으로 정리해버릴 것이다.
어찌나 기대되는지,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안 먹어봐도 알 수 있다. 이건 아주 고소한 맛이 날 거라는 걸.
소녀는 유리 조각을 깨물었다.
“오...”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주황색과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박쥐같은 생물이 소녀의 오른쪽 어깨 위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이 생물의 이름은 팬즈다.
“배고팠어?”
검은색과 하얀색, 그리고 초록색과 주황색으로 이루어진 박쥐같은 생물이 소녀의 왼쪽 어깨 위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배고플 땐 언제든지 말해.”
이 생물의 이름은 드렘이다.
“음~!”
그녀는 행복에 가득 차 뺨에 손을 올리고 감탄했다. 이 사이로 유리 조각이 부서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산산조각 난 유리와 그 가루가 혀를 덮었다. 따뜻한 느낌. 멋진 저녁식사...
이를테면 소금기를 머금은 진한 육즙으로 가득 찬 고기와 같은 맛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소녀의 어휘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입에서 침을 흘리며 그녀가 내뱉은 감상은... “맛있어” 뿐이었다.
“잘됐네!” 신난 듯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팬즈가 말했다.
“마시쪙!” 유리 조각을 삼키며 아유가 말했다.
“맛있어, 라... 정확히 어떻게 맛있니?”
아유의 등 뒤에서 드렘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응... 스테이크 같아!”
그렇게 말하며 아유는 앞으로 힘차게 걸어나갔다. ‘박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스테이크는 어떤 맛이니?”
“에휴, 드렘아…”
길 잃은 아이를 대하는 듯한 억양으로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넌 아는 게 없구나!”
“스테이크가 무슨 맛인지 모를 뿐인걸.”
드렘은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정말 어떤 맛인데?”
“고기 맛이지!” 아유가 그렇게 말하고선, 무언가 특이한 걸 발견했는지 공기 중에 떠다니던 유리 조각 하나를 움켜쥐었다.
“그럼... 짠 맛인가?” 드렘이 물었다.
“짜고 맛있는 맛!”
맛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 아유는 방금 전에 움켜쥔 유리 조각을 입으로 털어넣었다. 웃음으로 가득 찬 새로운 삶과 성취와 축하의 기억이다.
아유의 언어로는 “행복한 기억”이다.
“그래! 짠거 다음엔 단 걸 먹어야지!” 팬즈가 소리쳤다.
“봐, 팬즈가 드렘 너보다 똑똑하네!” 코로 웃음 소리를 내며 아유가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어.” 드렘이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다고...”
새로 찾은 유리 조각을 쪽쪽 빨며, 드렘의 말을 흘려듣듯 아유는 “응 그래”라고 대답한 후 콧노래를 부르면서 팔을 흔들었다. 유리 조각에선 설탕과 같은 맛과 감촉이 느껴졌다.
그들의 앞으로는 백색의 세계가, 등 뒤로는 폐허로 가득 찬 대지가 펼쳐져 있다. 그 두 풍경은 같은 공간이다.
그리고 온 세상에는, 유리 조각이 흩뿌려져있다.
온 세상에서, 맛있는 음식이 소녀를 기다리고 있다.
아유가 어금니로 기억을 깨물어 부쉈다. 그 기억에 담긴 역사가 사라졌다.
먹을 것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 눈을 떴을 때부터 끊임없이 배고픈 소녀가 있다.
====# 11-2 #====
아유도 박쥐들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드렘은 아유의 머리 위에 앉아있었다.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탓에 날개가 아유의 얼굴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팬즈가 소리쳤다.
“어... 하얀색이네! 하얀색 유리 조각이 잔뜩 보여, 아유!”
“단 거야?” 얼굴을 두드리는 날개 사이로 아유의 말이 새어 나왔다.
“오른쪽으로 가! 오! 른! 쪽!” 계속해서 아유의 코와 입을 두드리며, 드렘이 대답했다.
“그래, 오른쪽이야!” 팬즈가 동의했다.
“또 단 거야?” 아유가 불평했다.
“단 거...”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드렘은 아직도 날개로 아유의 이마를 부드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 있잖아... 좀... 그 뭐야... 다양하게 먹고 싶은데... 너희도 알잖아... 난 다양하게 먹는 게 좋다구…”
“그렇게는 안 돼.” 팬즈가 말했다.
“뭐가 안 되는데?” 아유가 물었다.
드렘이 드디어 아유의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아유...” 드렘이 아유의 얼굴 앞에서 날갯짓하며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배고프잖아?”
“항상 배고프지.”
아유가 대답했다. 그리고 부탁하듯 눈을 한 번 굴리고선 말했다.
“그래도 좀... 드렘...”
“배가 고프면 배부르게 잔뜩 먹어야겠지!”
드렘이 날개를 퍼덕이며 소리쳤다. 눈앞에 박쥐의 날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힘이 쭉 빠진 아유는 눈을 굴렸다.
“세상에 유리가 이렇게 많으니까... 그럼 좀 더... 있잖아...”
아유는 드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저 멀리 자리 잡은 두 가지 다른 양식으로 지어진 두 집과, 그 사이에 난 길 위로 떠다니는 유리의 무리로 시선을 옮겼다.
한눈에 행복과 고통의 기억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드렘과 한 번 눈을 마주치고는 길을 향해 걸어갔다.
“으으응?” 등 뒤에서 날아온 박쥐의 질문에, 올라간 말꼬리만이 귀에 들어온 아유는 적당히 대답했다.
“그래, 맞아! 그러니까...!” 드렘이 소리쳤다.
아랑곳 않고 아유는 계속 걸어가 이상한 유리 조각의 무리가 떠다니는 길에 다다랐다.
유리 조각에는 옛 시절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유는 한 쌍의 유리 조각을 집어들었다.
한 손에는 빛, 다른 손에는 대립, 아유는 두 조각을 동시에 입으로 가져가 깨물었다.
두 맛의 조합은 황홀했다.
“이런… 또 시작됐군.” 마침내 아유가 전혀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드렘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게 아니잖아!” 팬즈가 말했다.
“우리가 계속 말했잖아, 네가 먹어야 하는 건 여기 있는 유리가 아니라… 저 쪽에 아주 난리가 났다니깐... 하아...”
팬즈는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뭐... 행복해보이긴 하네...”
“음.”
드렘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그래. 행복해보이긴 하지.”
아유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 의미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이 두 유리 조각을 동시에 먹으면 훨씬 맛있어진다는 사실이다.
상반되는 기억이 같이 있는 경우는 드물기에, 아유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유리 조각의 무리는 보물더미다. 미소가 멈추질 않았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한순간. 박쥐들이 다시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음에는 말을 들어야지.
유리를 깨물어 먹을 때처럼, 아유는 때때로 박쥐들이 말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옳다"라고 느껴졌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은 기분이 좋다. 기분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삶의 목적이었다.
아유의 모든 행동은 기분 좋은 일을 위함이었다.
존재의 의미 치고는 아주 단순했지만, 여기서 더 복잡해져야 할 필요가 있긴 할까?
박쥐들의 말을 듣는 것이 만족으로 이어진다면, 아유가 조용히 있는 것이 때때로 만족을 안겨 준다면...
그렇다면 소녀는 잠시나마 귀를 열고 입을 닫아줄 것이다.
====# 11-3 #====
이윽고 그들의 시야에서 달달한 유리 조각의 무리는 사라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랗고 어두우며, 아주 맛있을 것 같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유와 박쥐들은 검은 유리로 가득 찬 구덩이의 모서리에 서서 밑을 바라보았다. 요동치는 검은 유리의 무리에 아주 조그마한 빛줄기라도 닿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유리 조각들이 서로를 긁어대며 내는 소리는 통곡과도 같았다. 끝과 상실의 기억들이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아유는 그 모습을 호기심에 찬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세상을 채우는 듯했다.
“아유.” 드렘이 눈짓으로 구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뛰어들어봐.”
“엉.” 아유는 대답하고서는 바로 뛰어내렸다.
아유가 팔을 쭉 뻗자 추락하는 속도가 즉시 느려졌다. 아유의 주변을 마구잡이로 쏘다니는 유리 조각들.
아유가 손을 뻗자 기억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아유는 그곳에서 조각을 몇 개 불러냈다.
그리고 그대로 그 조각들을 입으로 털어 넣었다.
“잘했어, 아유!”
“좋았어! 아유!”
아유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표정을 찡그렸다.
이 허기는 진실로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유리 조각과 파편과 가루. 그 모든 것이 목으로 넘기는 순간 무(無)가 되어 사라져버리는 느낌.
그렇기에 아유는 맛을 중요시한다. 우리 조각을 일부러 깨물어 부수는 이유도 오로지 맛을 느끼기 위함이다.
자신의 배 속에는 위장이 아니라, 계속해서 먹이를 주어야 하는 공허가 들어있는 게 아닐까 하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 고통을 느끼기 위해. 그리고 물론, 맛을 느끼기 위해. 아유는 유리 조각을 깨물어 먹는다.
그럴 때만은, 아주 천천히, 빛이 돌아오기에.
그녀를 채우던 호기심과 함께 여태껏 느껴지던 기묘한 감각도 사라졌다. 머지않아 검은 유리의 소용돌이는 사라지고, 혀로 입술을 닦는 아유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아유가 밝게 미소지었다.
“엄청 맛있었어!” 소녀가 외쳤다.
“그래!” 팬즈가 동의했다.
“맛있어 보이더라.” 드렘도 따라서 긍정했다.
아유는 박쥐들이 싫지 않았다. 박쥐들은 아유가 웃으며 지내길 바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박쥐들은 아유의 배가 항상 비어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유는 땅에 발을 디딘 후 즐겁게 뛰쳐나가며 박쥐들과 색과 하늘과 음식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이 그들의 세상이다. 이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저게 뭐지?” 드렘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음..? 뭐가?” 팬즈가 드렘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며 덧붙였다.
아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리 조각 하나가 홀로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비추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먹어 봐, 아유.” 팬즈가 말했다.
“어서.” 드렘이 말했다.
아유는 힘차고 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쥐들과 함께 소녀가 날아올랐다. 얼굴에 번진 미소와 함께 소녀는 그 기묘한 조각을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잖아.” 조각으로 다가가며 아유가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배가 채워질지.”
아유와 박쥐들은 검은 유리로 가득 찬 구덩이의 모서리에 서서 밑을 바라보았다. 요동치는 검은 유리의 무리에 아주 조그마한 빛줄기라도 닿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유리 조각들이 서로를 긁어대며 내는 소리는 통곡과도 같았다. 끝과 상실의 기억들이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아유는 그 모습을 호기심에 찬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세상을 채우는 듯했다.
“아유.” 드렘이 눈짓으로 구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뛰어들어봐.”
“엉.” 아유는 대답하고서는 바로 뛰어내렸다.
아유가 팔을 쭉 뻗자 추락하는 속도가 즉시 느려졌다. 아유의 주변을 마구잡이로 쏘다니는 유리 조각들.
아유가 손을 뻗자 기억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아유는 그곳에서 조각을 몇 개 불러냈다.
그리고 그대로 그 조각들을 입으로 털어 넣었다.
“잘했어, 아유!”
“좋았어! 아유!”
아유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표정을 찡그렸다.
이 허기는 진실로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유리 조각과 파편과 가루. 그 모든 것이 목으로 넘기는 순간 무(無)가 되어 사라져버리는 느낌.
그렇기에 아유는 맛을 중요시한다. 우리 조각을 일부러 깨물어 부수는 이유도 오로지 맛을 느끼기 위함이다.
자신의 배 속에는 위장이 아니라, 계속해서 먹이를 주어야 하는 공허가 들어있는 게 아닐까 하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 고통을 느끼기 위해. 그리고 물론, 맛을 느끼기 위해. 아유는 유리 조각을 깨물어 먹는다.
그럴 때만은, 아주 천천히, 빛이 돌아오기에.
그녀를 채우던 호기심과 함께 여태껏 느껴지던 기묘한 감각도 사라졌다. 머지않아 검은 유리의 소용돌이는 사라지고, 혀로 입술을 닦는 아유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아유가 밝게 미소지었다.
“엄청 맛있었어!” 소녀가 외쳤다.
“그래!” 팬즈가 동의했다.
“맛있어 보이더라.” 드렘도 따라서 긍정했다.
아유는 박쥐들이 싫지 않았다. 박쥐들은 아유가 웃으며 지내길 바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박쥐들은 아유의 배가 항상 비어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유는 땅에 발을 디딘 후 즐겁게 뛰쳐나가며 박쥐들과 색과 하늘과 음식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이 그들의 세상이다. 이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저게 뭐지?” 드렘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음..? 뭐가?” 팬즈가 드렘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며 덧붙였다.
아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리 조각 하나가 홀로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비추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먹어 봐, 아유.” 팬즈가 말했다.
“어서.” 드렘이 말했다.
아유는 힘차고 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쥐들과 함께 소녀가 날아올랐다. 얼굴에 번진 미소와 함께 소녀는 그 기묘한 조각을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잖아.” 조각으로 다가가며 아유가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배가 채워질지.”
====# 11-4 #====
뱉을 말도 없고
머리에 든 것도 없고
배에 들어찬 것도 없이
새하얀 세계에서 깨어난 소녀의 이름은 아유였다.
옛날 옛적부터 시작된 이야기.
하늘이 비틀리기 전에, 하늘이 부서지기 전에,
하늘이 눈부신 빛으로 뒤덮이기 전에, 낮이 밤을 만나기 전에…
한 소녀가 무너져내리는 탑과 미궁으로부터 떨어진 후에…
아유는 안에 든 것 없이 깨어났다.
아유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펴보았다. 빛의 세계. 유리와 기억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아유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배가, 배가 비어있었으니까.
입을 열어봐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뱉을 말도 없고, 머리에 든 것도 없었으니…
아유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잠시 걷다가 아유는 또다시 털썩, 하고 쓰려졌다. 일어나려고, 다시 일어나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그대로 땅 위를 기었다.
어쩌면 며칠, 어쩌면 몇 주가 지났을 때쯤, 흙투성이가 된 아유는 쓰러진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팔을 움직여 배를 움켜잡아보려 했지만 손까지 덮는 긴 소매 때문에 무엇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뱉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 기어 오는 도중 단 하나의 유리조각도 아유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빛이 내리쬤지만, 조금도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진 황량한 대지와 무너져내린 도시를 바라보았다.
안에서부터 자신을 좀먹는 듯한 공허감…
아유는 울었다. 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아르케아는 잘못된 마음이 서툴게 만들어낸, 잘못되고 서툰 세계.
그런 곳에서 아유는 태어났다.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한다 한들…
무엇을 원하는 지도 모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유는 고통을 곱씹으며 소매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달랠 수 없는 아픔과 굶주림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이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반쪽자리 ‘마음’에 후회의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와 함께 두 쌍의 날개가 날아올랐다.
유리의 심장을 지닌 그들이 향하는 곳은 명확했다.
두 개의 조각, 두 개의 심장.
날갯짓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도 전에 아유는 그들을 느낄 수 있었다.
등을 감싸안는 날개의 감촉, 마치 담요처럼 따뜻한 그 감촉…
…
그렇게 아유는 평생의 친구와 만났다.
====# 11-5 #====머리에 든 것도 없고
배에 들어찬 것도 없이
새하얀 세계에서 깨어난 소녀의 이름은 아유였다.
옛날 옛적부터 시작된 이야기.
하늘이 비틀리기 전에, 하늘이 부서지기 전에,
하늘이 눈부신 빛으로 뒤덮이기 전에, 낮이 밤을 만나기 전에…
한 소녀가 무너져내리는 탑과 미궁으로부터 떨어진 후에…
아유는 안에 든 것 없이 깨어났다.
아유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펴보았다. 빛의 세계. 유리와 기억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아유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배가, 배가 비어있었으니까.
입을 열어봐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뱉을 말도 없고, 머리에 든 것도 없었으니…
아유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잠시 걷다가 아유는 또다시 털썩, 하고 쓰려졌다. 일어나려고, 다시 일어나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그대로 땅 위를 기었다.
어쩌면 며칠, 어쩌면 몇 주가 지났을 때쯤, 흙투성이가 된 아유는 쓰러진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팔을 움직여 배를 움켜잡아보려 했지만 손까지 덮는 긴 소매 때문에 무엇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뱉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 기어 오는 도중 단 하나의 유리조각도 아유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빛이 내리쬤지만, 조금도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진 황량한 대지와 무너져내린 도시를 바라보았다.
안에서부터 자신을 좀먹는 듯한 공허감…
아유는 울었다. 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아르케아는 잘못된 마음이 서툴게 만들어낸, 잘못되고 서툰 세계.
그런 곳에서 아유는 태어났다.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한다 한들…
무엇을 원하는 지도 모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유는 고통을 곱씹으며 소매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달랠 수 없는 아픔과 굶주림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이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반쪽자리 ‘마음’에 후회의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와 함께 두 쌍의 날개가 날아올랐다.
유리의 심장을 지닌 그들이 향하는 곳은 명확했다.
두 개의 조각, 두 개의 심장.
날갯짓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도 전에 아유는 그들을 느낄 수 있었다.
등을 감싸안는 날개의 감촉, 마치 담요처럼 따뜻한 그 감촉…
…
그렇게 아유는 평생의 친구와 만났다.
“잘한다, 아유!”
“그렇지, 천천히. 아주 잘하고 있어.”
아유가 비틀거리는 다리로 두 박쥐를 향해 걸어갔다. 쓰러져있던 아유를 찾아낸 두 마리의 조그마한 박쥐들.
아유가 걷는 연습을 하다 쓰러질 때마다 잽싸게 날아와서 다시 일으켜주었다.
박쥐들은 소녀의 곁을 지키며, 길을 앞장섰고…
곧, 아유는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아유야! 이거 좀 먹어봐라!”
“이것도!”
박쥐들이 공중에 떠다니던 유리 조각을 가져왔다.
아유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 그 유리 조각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 혀로 굴리고, 이로 씹었다.
이 사이로 느겨지는 평평하고 단단한 감촉. 딱 원하던 느낌이다.
날카롭고 삐죽삐죽한 모서리 때문에 혀가 간지럽다.
씹고 삼키고, 또 씹고 삼키고, 또 씹고 삼키고…
행복한 맛, 든든한 맛… 기억을 삼킬 때마다 새로운 것을 알아갔다.
뺨을 적시던 눈물이 말랐다.
아유는 웃었다. 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소리높여 웃었다. 그리고 입을 벌려 말했다.
“팬즈야, 드렘아! 이거 마시쪙!”
“아유야…?!” 깜짝 놀라 굳은 채로 드렘이 말했다.
“아유야! 너… 지금, 너…? 말을?!” 팬즈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유는 두 박쥐를 향해 폴짝 뛰어 다가갔다.
두 팔을 크게 벌려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주황색과 초록색인 박쥐와, 검은색과 하얀색, 그리고 초록색과 주황색인 박쥐를 꼬옥 껴안았다.
그에 보답하듯 박쥐들은 날개로 소녀를 감쌌다.
아유는 그렇게 유리조각으로 이루어진 구름과 파도의 바다를 먹어치웠다.
이 새하얀 세계에 흔들림이 생겨날 때마다 아유와 박쥐들이 달려가 유리 조각을 먹어치웠다.
한 장소에 유리 조각이 너무 많이 모여 ‘오류’를 만들어내기 전에…
아유가 먹어치웠다.
그리고 만약 결국 ‘오류’가, 이상현상Anomaly이 어디선가 생겨난다면…
그것도 먹어치울 것이다.
친구 박쥐들의 인도를 따라…
먹고, 또 먹고, 또 먹었다.
…
아르케아에는 의미도, 목적도, 상식도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가 있을까?
슬픔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이 바보 같은 세계에서 이 셋은 행복을 찾아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
아유, 팬즈, 드렘은 서로를 떠나 각자의 길을 걸으며…
그 질문의 답을, 빛의 종말과 함께 운명의 끝에서 찾아내게 되리라.
====# 11-6 #====“그렇지, 천천히. 아주 잘하고 있어.”
아유가 비틀거리는 다리로 두 박쥐를 향해 걸어갔다. 쓰러져있던 아유를 찾아낸 두 마리의 조그마한 박쥐들.
아유가 걷는 연습을 하다 쓰러질 때마다 잽싸게 날아와서 다시 일으켜주었다.
박쥐들은 소녀의 곁을 지키며, 길을 앞장섰고…
곧, 아유는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아유야! 이거 좀 먹어봐라!”
“이것도!”
박쥐들이 공중에 떠다니던 유리 조각을 가져왔다.
아유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 그 유리 조각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 혀로 굴리고, 이로 씹었다.
이 사이로 느겨지는 평평하고 단단한 감촉. 딱 원하던 느낌이다.
날카롭고 삐죽삐죽한 모서리 때문에 혀가 간지럽다.
씹고 삼키고, 또 씹고 삼키고, 또 씹고 삼키고…
행복한 맛, 든든한 맛… 기억을 삼킬 때마다 새로운 것을 알아갔다.
뺨을 적시던 눈물이 말랐다.
아유는 웃었다. 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소리높여 웃었다. 그리고 입을 벌려 말했다.
“팬즈야, 드렘아! 이거 마시쪙!”
“아유야…?!” 깜짝 놀라 굳은 채로 드렘이 말했다.
“아유야! 너… 지금, 너…? 말을?!” 팬즈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유는 두 박쥐를 향해 폴짝 뛰어 다가갔다.
두 팔을 크게 벌려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주황색과 초록색인 박쥐와, 검은색과 하얀색, 그리고 초록색과 주황색인 박쥐를 꼬옥 껴안았다.
그에 보답하듯 박쥐들은 날개로 소녀를 감쌌다.
아유는 그렇게 유리조각으로 이루어진 구름과 파도의 바다를 먹어치웠다.
이 새하얀 세계에 흔들림이 생겨날 때마다 아유와 박쥐들이 달려가 유리 조각을 먹어치웠다.
한 장소에 유리 조각이 너무 많이 모여 ‘오류’를 만들어내기 전에…
아유가 먹어치웠다.
그리고 만약 결국 ‘오류’가, 이상현상Anomaly이 어디선가 생겨난다면…
그것도 먹어치울 것이다.
친구 박쥐들의 인도를 따라…
먹고, 또 먹고, 또 먹었다.
…
아르케아에는 의미도, 목적도, 상식도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가 있을까?
슬픔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이 바보 같은 세계에서 이 셋은 행복을 찾아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
아유, 팬즈, 드렘은 서로를 떠나 각자의 길을 걸으며…
그 질문의 답을, 빛의 종말과 함께 운명의 끝에서 찾아내게 되리라.
그것도 오래전의 일이다.
지금 아유는…
눈을 감은 채 무채색의 꿈속으로 빠져들어,
점점 더 낮고,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기억, 가장 처음 마주한 기억.
혼자 있으니 떠오르는 기억들.
눈물이 아유의 눈에 차올랐다.
무(無)를 향해 가라앉으며, 외로움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다시 겪게 된 아유의 어깨 위로 따뜻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유가 고개를 돌리자 자신과 함께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조그마한 빛이 아주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따뜻한 감촉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아유는 더이상 혼자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너는 누구니?” 아유가 물었다. “괜찮아?”
답변이 들려왔다.
자길 걱정해 주는 아유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아주 조용하고, 익숙한 목소리.
빛과 삶과 죽음의 목소리.
아이의 목소리이자 어머니의 목소리.
언젠가 분명 들은 적 있는 대지의 목소리.
아르케아에 깊이 다가간 아주 소수의 이들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
아유는 그 목소리에 대답했다.
“응? 왜 아파?”
목소리가 말했다: 꿈을 꾸고 있지 않았니?
“응.” 아유가 가볍게 대답했다. “내 꿈이 보여?”
조용한 목소리가 긍정하며 꿈에서 깨운 것을 사과했다.
“있지, 있지. 깨어났더니 친구들이 안 보여. 어디 갔는지 알아?”
…목소리는 침묵했다.
“하으어음… 그…” 아유가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 빛 쾅! 하고 터지는 거… 봤어?”
터졌지. 봤어.
“쾅! 터지고… 그 다음에 콰카카캉콰오오! 푸슈우우욱~! 파아아앙!!!!
하는거 봤어?!”
무슨 말이니 아유야?
“빛 말이야!” 아유가 신이 난 듯 말했다. “사라졌잖아!”
목소리가 물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기억하니?
“쓰러졌어…” 아유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냥 발이 헛디뎌서 넘어진 것뿐이잖아. 그치?”
아니다. 헛디뎌서 쓰러진 것이 아니다.
“엥, 그렇구나. 으음… 그 다음엔… 팬즈랑 드렘이랑 같이 일어서니까…”
아유가 팔짱을 끼고 다시 생각했다.
“머리가 아팠어!”
그 순간,
공기가 흔들렸다.
“팬즈랑 드렘이 계속 나보고 유리를 먹으라고 했거든! 못됐지?!”
그 순간,
공기가 잠잠해졌다.
“으응, 배가 고팠던 건 맞는데…”
목소리가 나오는 것으로 짐작되는 방향을 보며 아유가 말했다.
“속이 안 좋았거든. 좀 많이… 헤헷…”
그래?
“너무 안 좋아서 눈물이 나오더라니까! 하하핫!”
그렇다 아유는 울었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 기억도 안나!”
아유가 머리 위로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뒤집어져 있으니 물구나무를 선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있지, 있지. 나 여기 얼마나 있었어?”
비록 날짜라는 게 여기서는 생소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아유는 이곳에 삼일을 있었다.
아유가 왜 여기서는 날짜가 생소…?한 어쩌고냐 물으니, 목소리는 신경 쓰지 말라 대답했다.
“흐으음…” 아유가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곧 목소리가 물었다. 아유야,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 뭐니?
“물고기!” 아유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박쥐가 아니라?
“박쥐는 팬즈랑 드렘이잖아! 바보들이잖아!”
팬즈랑 드렘이 싫어?
“아니, 너무 좋아!”
그렇구나. 잘됐네.
아유야, 제일 좋아하는 색은 뭐니?
“초록색!”
왜 초록색이니?
“내가 초록색이잖아! 그리고… 많잖아!”
어디에?
“음식에!” 아유가 말했다. “좋은 음식은 초록색이거나 빨간색이니까!”
무슨 말이니?
“아이고…”
아유의 입꼬리가 내려가며 그 사이로 애석함이 섞인 말이 새어 나왔다.
“너도 팬즈랑 드렘만큼 바보구나…”
미안해.
“잘 들어!” 아유가 가르치듯 말했다.
“초록색은 나무랑 꽃이고 걔넨 달달해! 빨간색은 피랑 불이고 걔넨 고소해! 그 둘을 같이 먹으면… 짠!” 아유가 미소를 지으며 제스처를 취했다. “엄청 맛있지요!”
공기가 조금 시원해졌다.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많이 컸구나. 행복한 삶을 살았어.
그리고, 비록 목소리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유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목소리 본인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괜찮아?” 아유가 물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너는 행운이 없었어.
“행운이 뭔데?”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은 행운 또는 ‘안행운’, 둘 중 하나인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
또다시 따뜻함이 아유를 감쌌다. 하지만 이번엔 아유의 눈에 그렁그렁 한 눈물을 고이게 하는 종류의 따뜻함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미간이 구겨졌다.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그 의미를 알았을 텐데.
더 즐겁고, 더 많이 먹었을 텐데
더 따뜻함을 느끼고, 더욱 멀리 나아갔을 텐데.
영원히 대지를 걸으며 영원히 미소를 머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너는 그런 아이니까.
너는 원본 없이 만들어졌으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너는 영원히 바뀌지 않았을 거야.
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착하고 멋진 아이야.
“고마워!”
너는 착하고 멋진 아이야. 목소리가 반복해서 말했다.
정말로, 고마워.
“…?”
…
목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따뜻한 침묵 속에서, 무채색의 꿈속에서…
아유는 목소리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렇게…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 11-7 #====지금 아유는…
눈을 감은 채 무채색의 꿈속으로 빠져들어,
점점 더 낮고,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기억, 가장 처음 마주한 기억.
혼자 있으니 떠오르는 기억들.
눈물이 아유의 눈에 차올랐다.
무(無)를 향해 가라앉으며, 외로움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다시 겪게 된 아유의 어깨 위로 따뜻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유가 고개를 돌리자 자신과 함께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조그마한 빛이 아주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따뜻한 감촉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아유는 더이상 혼자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너는 누구니?” 아유가 물었다. “괜찮아?”
답변이 들려왔다.
자길 걱정해 주는 아유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아주 조용하고, 익숙한 목소리.
빛과 삶과 죽음의 목소리.
아이의 목소리이자 어머니의 목소리.
언젠가 분명 들은 적 있는 대지의 목소리.
아르케아에 깊이 다가간 아주 소수의 이들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
아유는 그 목소리에 대답했다.
“응? 왜 아파?”
목소리가 말했다: 꿈을 꾸고 있지 않았니?
“응.” 아유가 가볍게 대답했다. “내 꿈이 보여?”
조용한 목소리가 긍정하며 꿈에서 깨운 것을 사과했다.
“있지, 있지. 깨어났더니 친구들이 안 보여. 어디 갔는지 알아?”
…목소리는 침묵했다.
“하으어음… 그…” 아유가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 빛 쾅! 하고 터지는 거… 봤어?”
터졌지. 봤어.
“쾅! 터지고… 그 다음에 콰카카캉콰오오! 푸슈우우욱~! 파아아앙!!!!
하는거 봤어?!”
무슨 말이니 아유야?
“빛 말이야!” 아유가 신이 난 듯 말했다. “사라졌잖아!”
목소리가 물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기억하니?
“쓰러졌어…” 아유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냥 발이 헛디뎌서 넘어진 것뿐이잖아. 그치?”
아니다. 헛디뎌서 쓰러진 것이 아니다.
“엥, 그렇구나. 으음… 그 다음엔… 팬즈랑 드렘이랑 같이 일어서니까…”
아유가 팔짱을 끼고 다시 생각했다.
“머리가 아팠어!”
그 순간,
공기가 흔들렸다.
“팬즈랑 드렘이 계속 나보고 유리를 먹으라고 했거든! 못됐지?!”
그 순간,
공기가 잠잠해졌다.
“으응, 배가 고팠던 건 맞는데…”
목소리가 나오는 것으로 짐작되는 방향을 보며 아유가 말했다.
“속이 안 좋았거든. 좀 많이… 헤헷…”
그래?
“너무 안 좋아서 눈물이 나오더라니까! 하하핫!”
그렇다 아유는 울었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 기억도 안나!”
아유가 머리 위로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뒤집어져 있으니 물구나무를 선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있지, 있지. 나 여기 얼마나 있었어?”
비록 날짜라는 게 여기서는 생소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아유는 이곳에 삼일을 있었다.
아유가 왜 여기서는 날짜가 생소…?한 어쩌고냐 물으니, 목소리는 신경 쓰지 말라 대답했다.
“흐으음…” 아유가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곧 목소리가 물었다. 아유야,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 뭐니?
“물고기!” 아유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박쥐가 아니라?
“박쥐는 팬즈랑 드렘이잖아! 바보들이잖아!”
팬즈랑 드렘이 싫어?
“아니, 너무 좋아!”
그렇구나. 잘됐네.
아유야, 제일 좋아하는 색은 뭐니?
“초록색!”
왜 초록색이니?
“내가 초록색이잖아! 그리고… 많잖아!”
어디에?
“음식에!” 아유가 말했다. “좋은 음식은 초록색이거나 빨간색이니까!”
무슨 말이니?
“아이고…”
아유의 입꼬리가 내려가며 그 사이로 애석함이 섞인 말이 새어 나왔다.
“너도 팬즈랑 드렘만큼 바보구나…”
미안해.
“잘 들어!” 아유가 가르치듯 말했다.
“초록색은 나무랑 꽃이고 걔넨 달달해! 빨간색은 피랑 불이고 걔넨 고소해! 그 둘을 같이 먹으면… 짠!” 아유가 미소를 지으며 제스처를 취했다. “엄청 맛있지요!”
공기가 조금 시원해졌다.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많이 컸구나. 행복한 삶을 살았어.
그리고, 비록 목소리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유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목소리 본인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괜찮아?” 아유가 물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너는 행운이 없었어.
“행운이 뭔데?”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은 행운 또는 ‘안행운’, 둘 중 하나인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
또다시 따뜻함이 아유를 감쌌다. 하지만 이번엔 아유의 눈에 그렁그렁 한 눈물을 고이게 하는 종류의 따뜻함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미간이 구겨졌다.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그 의미를 알았을 텐데.
더 즐겁고, 더 많이 먹었을 텐데
더 따뜻함을 느끼고, 더욱 멀리 나아갔을 텐데.
영원히 대지를 걸으며 영원히 미소를 머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너는 그런 아이니까.
너는 원본 없이 만들어졌으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너는 영원히 바뀌지 않았을 거야.
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착하고 멋진 아이야.
“고마워!”
너는 착하고 멋진 아이야. 목소리가 반복해서 말했다.
정말로, 고마워.
“…?”
…
목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따뜻한 침묵 속에서, 무채색의 꿈속에서…
아유는 목소리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렇게…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한 번, 아르케아의 세계에 눈이 내렸다.
그리고 지금, 회색빛 대지 위로 또다시 한번 눈이 내리고 있다.
여기에서는 부드럽게 내리는 함박눈이, 멀리서는 매서운 눈의 폭풍이.
고요한 세계, 아르케아를 눈이 뒤덮은 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이 세계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새하얀 눈밭이 무너져가는 대지 위에 펼쳐져 있었다.
“하아악…”
옅은 숨에 눈꽃이 날렸다.
“하아아윽… 끄흑…”
몸이 덜덜 떨렸다. 추워서가 아니라, 뱃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퍼지는 고통 때문에.
그 위로 한 쌍의 날개가 그 몸을 밀고, 밀고, 흔들었다. 밀고, 또다시 밀고, 껴안았다. 박쥐 팬즈가 속삭였다.
“아, 아유야… 제발 일어나. 제발…”
그 둘을 드렘이 지켜보고 있었다.
지켜야 할 존재, 아유의 숨이 점점 옅어져가다. 마침내 끊겼다.
“아유야?!” 팬즈가 소리쳤다. “아유야, 안돼. 제발!” 애원하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아유의 미간에 번져있던 주름이 풀렸다. 드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박쥐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미간의 주름이 풀린 것은 편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드렘, 아유가 숨을… 심장이… 설마, 아니지? 아니잖아! 이럴 순 없어!”
“…”
그대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무언가 목적을 위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가?
드렘은 아유의 곁에 있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태어난 목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드렘은 생기가 빠져나간 아유를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입술이 옅은 미소를 지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걸 용납하기엔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드렘이 날갯짓하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드렘?! 어디 가는… 잠깐만! 드렘아! 가지 마!”
“팬즈!” 드렘이 소리쳐 대답했다. “먹을 걸 찾아오자! ‘맞는’ 음식을!”
“저, 저 눈폭풍 너머로…?! 저길 어떻게 가!”
“난 갈 거야!” 드렘이 소리쳤다. 이에 팬즈도 맞받아 소리쳤다.
“…그럼 나도 갈게!”
두 박쥐가 낮과 밤의 경계를 향해 재빨리 날갯짓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아유의 기척이 점점 더 옅어졌다.
너무 멀리 떨어지면, 너무 시간을 끌면… 아유를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절대로 답이 아니었다.
박쥐들은 꼭 붙어서 서로의 몸을 녹이며, 이 세상의 부서진 조각을 찾아 헤맸다…
사랑하는 이에게 먹이기 위해. 이 망가진 세계가 그녀에게 준 사명을 다시금 일깨우기 위해.
아르케아가 만들어낸 감시자, 아유는 이상 현상을 먹어치우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니, 박쥐들은 이상 현상을 찾아낼 것이다.
무서운 눈보라를 뚫는 한이 있더라도, 이상현상의 기척을 좇아갈 것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이 그들의 날개에 내리쳤다
마치 채찍처럼 격렬하게 두 조그마한 박쥐를 마구 후려치며 날려보냈다.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그럼에도 나아갔다.
눈가에 차갑게 서리는 눈물을 느끼며…
아유의 배에 들어찬 병을 고치기 위해서 세계의 ‘뒤틀림’을 향해 지지 않고 나아갔다.
하지만…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한다 한들…
이룰 힘이 없다면 무의미할 뿐이다.
곧, 팬즈가 땅으로 떨어졌다. 곧, 쓰러진 팬즈를 끌고 가던 드렘도 힘이 다해 추락했다.
곧, 눈이 그들의 몸을 덮었다. 곧,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은 훌쩍이는 소리가 되었다.
곧, 상냥한 소녀가 그들을 발견하고 팔로 껴안아 들어 올렸다.
[ruby(그 소녀, ruby=Sunset Radiance)]는 낮을 향해 몸을 돌려,
팬즈와 드렘을 팔과 가슴으로 품고 따뜻한 곳으로 걸어갔다.
====# 11-8 #====그리고 지금, 회색빛 대지 위로 또다시 한번 눈이 내리고 있다.
여기에서는 부드럽게 내리는 함박눈이, 멀리서는 매서운 눈의 폭풍이.
고요한 세계, 아르케아를 눈이 뒤덮은 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이 세계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새하얀 눈밭이 무너져가는 대지 위에 펼쳐져 있었다.
“하아악…”
옅은 숨에 눈꽃이 날렸다.
“하아아윽… 끄흑…”
몸이 덜덜 떨렸다. 추워서가 아니라, 뱃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퍼지는 고통 때문에.
그 위로 한 쌍의 날개가 그 몸을 밀고, 밀고, 흔들었다. 밀고, 또다시 밀고, 껴안았다. 박쥐 팬즈가 속삭였다.
“아, 아유야… 제발 일어나. 제발…”
그 둘을 드렘이 지켜보고 있었다.
지켜야 할 존재, 아유의 숨이 점점 옅어져가다. 마침내 끊겼다.
“아유야?!” 팬즈가 소리쳤다. “아유야, 안돼. 제발!” 애원하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아유의 미간에 번져있던 주름이 풀렸다. 드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박쥐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미간의 주름이 풀린 것은 편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드렘, 아유가 숨을… 심장이… 설마, 아니지? 아니잖아! 이럴 순 없어!”
“…”
그대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무언가 목적을 위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가?
드렘은 아유의 곁에 있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태어난 목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드렘은 생기가 빠져나간 아유를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입술이 옅은 미소를 지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걸 용납하기엔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드렘이 날갯짓하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드렘?! 어디 가는… 잠깐만! 드렘아! 가지 마!”
“팬즈!” 드렘이 소리쳐 대답했다. “먹을 걸 찾아오자! ‘맞는’ 음식을!”
“저, 저 눈폭풍 너머로…?! 저길 어떻게 가!”
“난 갈 거야!” 드렘이 소리쳤다. 이에 팬즈도 맞받아 소리쳤다.
“…그럼 나도 갈게!”
두 박쥐가 낮과 밤의 경계를 향해 재빨리 날갯짓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아유의 기척이 점점 더 옅어졌다.
너무 멀리 떨어지면, 너무 시간을 끌면… 아유를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절대로 답이 아니었다.
박쥐들은 꼭 붙어서 서로의 몸을 녹이며, 이 세상의 부서진 조각을 찾아 헤맸다…
사랑하는 이에게 먹이기 위해. 이 망가진 세계가 그녀에게 준 사명을 다시금 일깨우기 위해.
아르케아가 만들어낸 감시자, 아유는 이상 현상을 먹어치우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니, 박쥐들은 이상 현상을 찾아낼 것이다.
무서운 눈보라를 뚫는 한이 있더라도, 이상현상의 기척을 좇아갈 것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이 그들의 날개에 내리쳤다
마치 채찍처럼 격렬하게 두 조그마한 박쥐를 마구 후려치며 날려보냈다.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그럼에도 나아갔다.
눈가에 차갑게 서리는 눈물을 느끼며…
아유의 배에 들어찬 병을 고치기 위해서 세계의 ‘뒤틀림’을 향해 지지 않고 나아갔다.
하지만…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한다 한들…
이룰 힘이 없다면 무의미할 뿐이다.
곧, 팬즈가 땅으로 떨어졌다. 곧, 쓰러진 팬즈를 끌고 가던 드렘도 힘이 다해 추락했다.
곧, 눈이 그들의 몸을 덮었다. 곧,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은 훌쩍이는 소리가 되었다.
곧, 상냥한 소녀가 그들을 발견하고 팔로 껴안아 들어 올렸다.
[ruby(그 소녀, ruby=Sunset Radiance)]는 낮을 향해 몸을 돌려,
팬즈와 드렘을 팔과 가슴으로 품고 따뜻한 곳으로 걸어갔다.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심연.
오로지 소중한 이들만이 존재할 수 있는 장소, 그곳에서 아유는 눈물을 닦았다.
아유는 알고 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걸.
이제는 조용해진 목소리.
목소리는 자신처럼 눈물을 흘릴 수조차 없으니 ‘안행운’이겠지.
하지만, 최소한 이것만큼은…
이것만큼은 묻고 싶었다.
“너는 왜 슬픈 거야?”
목소리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있지…” 아유가 물었다. “넌 뭘 할 때가 행복해?”
“나는 말이야, 맛있는 거 먹을 때가 행복해!”
알고 있다.
“그리고, 팬즈랑 드렘이랑 놀 때…”
알고 있다.
“난 ‘친구 만들기’가 좋거든!”
알고 있다…
어둠 속의 목소리는…
사람이 좋았다. 사람들이 미소 지을 때가 좋았다.
자신이 싫었다. 자신이 한 일이 싫었다. 서툴게 만든 것들과 실수로 점철된 과거가 싫었다.
비극은 혐오했다.
하지만, 행복한 결말은…
행복한 결말이 있다면, 참 좋겠지.
“아이고, 저런, 저런. 괜찮을 거야.” 아유가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로! 왜냐하면…!”
목소리가 아유의 지혜 한 조각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괜히 똑똑한 척하며 아유가 말했다.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면, 분명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들도 잔뜩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예를 들면 산책이나, 먹는 거나… 친구! 그런거! 알지? 응? 그게 인생이랑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거야! 계속해서 나아가면 분명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그러…니까…”
아유의 목이 매였다. 애써 차오르는 울음을 눌러 담았다.
그리고, 아주 밝게 웃으며 목소리를 향해 말했다.
“아직 친구를 못 찾았으면, 내가 네 첫 번째 친구가 될게!”
아유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아유가 모르는 사람이, 그녀를 위해 살을 에는 눈보라를 뚫고 나아갔다. 그 여정의 결과가 아유의 곁으로 다가왔다.
뱃속이 요동쳤다. 꿈속의 공간이 마구 뒤틀리기 시작했다. 비록 약해져 우리 안에 갇힌 신세일지라도, 세계의 ‘오류’는 여전히 강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
모든 법칙에 위배되기에, ‘결함’의 현현이기에, 이상현상은 결코 이어질 수 없는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었다.
마치 구름과 바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과 같았다.
사실, 비록 기묘하고 강력한 존재이긴 하나, 이상 현상은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소원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금처럼 새겨진 창조자의 유약함, 오류였다.
그들은 창조자가 남긴 간절한 소원보다는 창조자의 마음, 그 본질 자체에 더 가까웠다. 그렇기에 특별하진 않지만,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존재였다.
이 결함들은 운명조차 어찌할 수 없다. 희망이나 운명의 실로도 달랠 수가 없는 고통이다.
그렇기에 다른 이상 현상들과 같이 한때 압도적인 힘을 뽐냈던 이 이상 현상은 누군가 찾고 싶어 했기에 발견된 것이 아니다.
대부분 그렇듯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개연성도 없이.
이 낡고 상처받은 고통의 껍질은…
기적 따위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 있었기에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오류’는 아유의 어금니 사이에서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입 속에 들어온 유리 조각을 느낀 아유는 미소를 지었다.
힘껏 깨물어 유리 조각을 깨트리자, 그와 함께 어둠도 깨지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터져 나오듯 공간을 물들이며, 그림자를 햇살로 바꾸는 새하얀 빛,
깨진 파편을 통해 검은 공간으로 흘러들어오는 대지의 빛이 반짝이는 유리 가루와 함께 아유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마치… 한숨이 들린 것만 같았다.
불만이나 실망에서 온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행복하고 상냥한 숨소리가.
아유를 감싼 압도적인 빛은 멈추지 않았다.
목구멍을 지나가고 나서야 빛은 사그라들었다.
눈부신 빛이 사라지자 다시 앞이 보였다. 아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건넸다.
네 말이 맞아, 아유야.
고마워.
아르케아의 빛이 아유의 배를 채우자, 새로운 색이 꿈을 물들였다.
아유가 눈을 뜨자 울고 있는 날갯짓하는 팬즈와 드렘이 보였다.
몸이 허약해진 것이 느껴졌다. 두 박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매달렸다.
아유는 미소를 머금고 눈물을 흘리며 두 박쥐를 껴안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햇빛 사이로 내리는 눈.
행복한 세 친구는, 서로의 따뜻함을 느꼈다.
아유가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상 현상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기적? 아니면 우정의 힘이었을까?
…모두 정답이다.
꿈속에서 빛에 감싸였을 때, 아유는 친구들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된 여정을 헤쳐 나갔는지, 그 모든 기억을 볼 수 있었다.
…나도 친구들을 지켜줘야지. 아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팬즈와 드렘은 물론, 새로 만든 친구도.
셋은 한 번 더 얼싸안은 뒤, 힘들었던 여정과 친절한 소녀. 그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유는 웃었다. 웃고 또 웃고, 소리 높여 웃었다.
끝없는 허기가 사라졌다.
항상 그랬듯 아유와 박쥐들은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는 저 너머로, 나아갔다.
5. 비타
5.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2-1 | Unseeing-1 | Snow White 클리어 | ||
12-2 | Unseeing-2 | Sakura Fubuki 클리어 | ||
12-3 | Unseeing-3 | NEO WINGS 클리어 | ||
12-4 | Unseeing-4 |
선행 조건
HYPER VISION 보유 SUPERNOVA 클리어 |
||
12-5 | Unseeing-5 | 12-4 스토리 열람 | ||
12-6 | Unseeing-6 | HYPER VISION 클리어 |
5.2. Unseeing Eyes
====# 12-1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눈으로 보는 것인가? 피부로 느끼는 것인가? 귀로 듣는 것인가?
오감으로 감지한 것은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맞아.
본인의 오감, 또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감지한 것을 "안다"고 해.
아이에게는 특히나 잘 들어맞는 정의지.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해. 만난 적 없는 사람... 그럼에도 낯이 익은 사람.
그녀의 기억을 모두 모아 시간 순서대로 세워본 적이 있거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해.
머나먼 우주 저 너머에 흔하디흔한 행성이 존재했어.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행성이었지.
그 행성의 어떤 아이들은 10살이 되는 해부터 타고났을 지도 모르는 능력을 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만약 발현된다면, 그 능력은 17세가 되는 해까지 지니고 있을 수 있었지. 생각과 소망대로 현실을 주무를 수 있는 능력.
평범한 세계 속 비범한 능력이었어.
아이들은 신이라기보다는 기묘한 설계자에 가까웠어. 그 굉장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행성을 지킬 수 있었지.
그 특별한 소년 소녀의 무리 사이에, 우리의 주인공이 있어.
그 나라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 그 행성의 이름... 역시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단 하나 기억나는 것,
그녀의 이름은... "비타"였어.
어느 날, 비타는 방에서 깨어난 후 어둑어둑해진 창문 너머로 밤 하늘을 보았어. 비타의 친구들도 하나둘씩 깨어났어.
서로에게 “좋은 아침”이라 인사했지만, 깨어난 시간은 저녁이었지. 지난 2년 동안 매일 저녁이 이와 같았어.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고, 즐겨듣는 라디오 드라마를 이야기하고, 읽고 있는 책과 만화를 이야기하고, 미래의 꿈을 이야기했지.
비타와 친구들은 군복을 챙겨 입고 지휘실로 향하며 수다스럽게 대화했어.
이 우주는 전쟁 중이었어.
아이들의 머리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노리고 다른 나라가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곤 했거든. 보통은 자기들끼리 말솜씨를 이용하는 어른들도 있었어.
이 폭력과 부패의 시대 속에서 가능한 한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외인부대와 외교관들도 있었지. 그리고…
신경망-정신 통로-격자 네트워크(Nerve/Mind Pathway/Grid Measure)라는 것도 있었어.
소규모 운용 시 적을 견제하는 데에서 그치지만, 대규모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고, 다른 행성의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는 존재…
상세한 설명은 줄일게.
중앙 정보 통신실에 입장한 비타는 그 장엄함에 익숙한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어. 이 거대한 공간에서 휘몰아치는 생각과 욕망의 소용돌이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걸어나갔어.
그녀와 친구들에겐 해야 할 역할이 있었거든. 자신들의 지정석에 다가갈수록 자연스레 수다는 줄어들었어. 그런 하찮은 잡담 대신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는 소리만이 서로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지.
그들이 사는 이 아름다운 행성을 위하여. 우주의 그 어느 행성보다 풍요로운 번영과 평화를 위하여.
비타는 NMPGM(Nerve-Mind Pathway-Grid Measure)에 접속했어.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를 지우고,
자신 몫의 통로를 가다듬었어.
그 무엇도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온 집중을 다했어.
알 수 없는 신호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 12-2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눈으로 보는 것인가? 피부로 느끼는 것인가? 귀로 듣는 것인가?
오감으로 감지한 것은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맞아.
본인의 오감, 또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감지한 것을 "안다"고 해.
아이에게는 특히나 잘 들어맞는 정의지.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해. 만난 적 없는 사람... 그럼에도 낯이 익은 사람.
그녀의 기억을 모두 모아 시간 순서대로 세워본 적이 있거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해.
머나먼 우주 저 너머에 흔하디흔한 행성이 존재했어.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행성이었지.
그 행성의 어떤 아이들은 10살이 되는 해부터 타고났을 지도 모르는 능력을 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만약 발현된다면, 그 능력은 17세가 되는 해까지 지니고 있을 수 있었지. 생각과 소망대로 현실을 주무를 수 있는 능력.
평범한 세계 속 비범한 능력이었어.
아이들은 신이라기보다는 기묘한 설계자에 가까웠어. 그 굉장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행성을 지킬 수 있었지.
그 특별한 소년 소녀의 무리 사이에, 우리의 주인공이 있어.
그 나라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 그 행성의 이름... 역시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단 하나 기억나는 것,
그녀의 이름은... "비타"였어.
어느 날, 비타는 방에서 깨어난 후 어둑어둑해진 창문 너머로 밤 하늘을 보았어. 비타의 친구들도 하나둘씩 깨어났어.
서로에게 “좋은 아침”이라 인사했지만, 깨어난 시간은 저녁이었지. 지난 2년 동안 매일 저녁이 이와 같았어.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고, 즐겨듣는 라디오 드라마를 이야기하고, 읽고 있는 책과 만화를 이야기하고, 미래의 꿈을 이야기했지.
비타와 친구들은 군복을 챙겨 입고 지휘실로 향하며 수다스럽게 대화했어.
이 우주는 전쟁 중이었어.
아이들의 머리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노리고 다른 나라가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곤 했거든. 보통은 자기들끼리 말솜씨를 이용하는 어른들도 있었어.
이 폭력과 부패의 시대 속에서 가능한 한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외인부대와 외교관들도 있었지. 그리고…
신경망-정신 통로-격자 네트워크(Nerve/Mind Pathway/Grid Measure)라는 것도 있었어.
소규모 운용 시 적을 견제하는 데에서 그치지만, 대규모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고, 다른 행성의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는 존재…
상세한 설명은 줄일게.
중앙 정보 통신실에 입장한 비타는 그 장엄함에 익숙한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어. 이 거대한 공간에서 휘몰아치는 생각과 욕망의 소용돌이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걸어나갔어.
그녀와 친구들에겐 해야 할 역할이 있었거든. 자신들의 지정석에 다가갈수록 자연스레 수다는 줄어들었어. 그런 하찮은 잡담 대신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는 소리만이 서로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지.
그들이 사는 이 아름다운 행성을 위하여. 우주의 그 어느 행성보다 풍요로운 번영과 평화를 위하여.
비타는 NMPGM(Nerve-Mind Pathway-Grid Measure)에 접속했어.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를 지우고,
자신 몫의 통로를 가다듬었어.
그 무엇도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온 집중을 다했어.
알 수 없는 신호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전날 밤의 일이야.
비타와 친구들은 이번 주의 브리핑을 받고 있었지.
혼돈에 휘말려가는 다른 행성, 타국의 영공권에서 탈취당한 함선, 그리고 이번 주에 계획된 위문 공연까지.
아이들은 보통 죽음과 관련된 소식은 무시하고 위문 공연이나 자기 공적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어.
비타가 있는 곳으로부터 네 번째로 먼 행성 옆에 자리한 체제는 그나마 우호적이었어. 자급자족하는 사회였지.
비타의 행성은 그 행성과 간단한 합의를 보았어. 그들도 NMPGM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대신, 격동하는 대기에 감싸인 그 위험천만한 행성의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었지.
비타의 나라는 너그러웠어.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그런 관계를 잘 이용했지. 사적인 목적을 위해 네트워크를 뚫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비타는 아는 게 많지 않았어.
하지만 적어도 원하는 게 있다면 그냥 요구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비타는 브리핑에서 들은 “혼돈에 휘말린 다른 행성”에 대해 묻곤 했어.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혼돈에 빠지게 되었는지 궁금했거든. 쉽게 잊힐 만한 원한 때문에 그런 끔찍한 다툼을 시작하다니, 비타는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
비타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어.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는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이 말을 잘 기억해둬.
비타가 알 수 없는 신호를 발견한 그날…
자신의 담당 통로를 강화하던 비타에게 목소리가 들려왔어. "서쪽. 도움이 필요하다. 좌표는..."
비타는 움찔한 뒤 주변에 앉아있는 다른 아이들을 바라봤어. 하지만 이 목소리는 다른 아이들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어.
비타는 들은 좌표를 컴퓨터에 입력하며 마음을 단단히 한 후 생각을 내보냈어:
"관등성명을 대십시오. 공병부대입니까, 통신부대입니까? 행성 외부에서 뭘 하는 겁니까?"
질문의 답은 없고 침묵만 돌아왔어. 긴장한 채 비타는 계속해 송신의 출처를 생각하며 작업을 진행했어.
곧, 마침내 대답이 돌아왔어.
"들립니까? 잠깐. 이거 진짜 되는 건가?"
"잘 들립니다. ‘말하는 법’은 알고 있는 모양인데, 능력자가 아닌가요?"
비타는 잠시 말을 멈추었어. 능력자가 아닌 사람…?
마음에 조그마한 불안감이 드리웠지.
비타는 말을 이어나갔어.
"신호를 지휘관들에게 연결하겠…"
"잠깐! 당신 NMPGM의 설계자지?! 그 중립국의...!"
"당연하지 않습니까." 비타가 대답했어. 조금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어. "지금 지휘관에게 신고하도록 하겠..."
"신고하겠다고? 그럴 줄 알았어! 당신네들 같은 오만한 작자들한테 뭘 기대하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왜 나한테 다 떠넘긴 거냐고…."
비타는 무심코 의자의 팔받침대를 꽉 쥐었어.
"저는 오만하지 않습니다." 비타가 대답했어.
"어떤 방식으로 네트워크에 들어온 건지는 몰라도 곧 들통날 겁니다. 우리나라의 네트워크와 국민들을 상대로 이런 장난을 치면 큰 대가를 치를 겁니다. 저희의 중립을 끝내려 하는 즉시 저희가 먼저 당신들을 끝내버릴 테니까... 아, 알겠어요?"
"중립을 끝내는 게 당신들이라면?" 목소리가 물었어.
비타의 대답은 날카로운 "뭐라고요?"였지.
"당신들이 중립을 먼저 끝낸다면 어떻게 되는데?"
"벌어진 적 없는 일이고, 벌어질 리 없는 일이죠."
"페토르의 이야기를 들은 적 없는 모양이군."
대답을 하려던 찰나에 비타는 진정 페토르에 대해 들은 적 없음을 깨달았어.
"일단 통신은 종료할게. 하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올 거야. 그 넓디넓은 네트워크를 활용해 '페토르'를 검색해 봐.
거기는 검열 같은 거 안 하잖아? 좋은 나라니까. 또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통신은 종료됐어.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비타는 두근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다시 자신의 작업으로 돌아갔어.
페토르에 대해 들은 적은 없으나 해가 다시 뜨는 대로 조사해 볼 예정이었지.
비타와 친구들은 이번 주의 브리핑을 받고 있었지.
혼돈에 휘말려가는 다른 행성, 타국의 영공권에서 탈취당한 함선, 그리고 이번 주에 계획된 위문 공연까지.
아이들은 보통 죽음과 관련된 소식은 무시하고 위문 공연이나 자기 공적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어.
비타가 있는 곳으로부터 네 번째로 먼 행성 옆에 자리한 체제는 그나마 우호적이었어. 자급자족하는 사회였지.
비타의 행성은 그 행성과 간단한 합의를 보았어. 그들도 NMPGM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대신, 격동하는 대기에 감싸인 그 위험천만한 행성의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었지.
비타의 나라는 너그러웠어.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그런 관계를 잘 이용했지. 사적인 목적을 위해 네트워크를 뚫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비타는 아는 게 많지 않았어.
하지만 적어도 원하는 게 있다면 그냥 요구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비타는 브리핑에서 들은 “혼돈에 휘말린 다른 행성”에 대해 묻곤 했어.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혼돈에 빠지게 되었는지 궁금했거든. 쉽게 잊힐 만한 원한 때문에 그런 끔찍한 다툼을 시작하다니, 비타는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
비타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어.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는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이 말을 잘 기억해둬.
비타가 알 수 없는 신호를 발견한 그날…
자신의 담당 통로를 강화하던 비타에게 목소리가 들려왔어. "서쪽. 도움이 필요하다. 좌표는..."
비타는 움찔한 뒤 주변에 앉아있는 다른 아이들을 바라봤어. 하지만 이 목소리는 다른 아이들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어.
비타는 들은 좌표를 컴퓨터에 입력하며 마음을 단단히 한 후 생각을 내보냈어:
"관등성명을 대십시오. 공병부대입니까, 통신부대입니까? 행성 외부에서 뭘 하는 겁니까?"
질문의 답은 없고 침묵만 돌아왔어. 긴장한 채 비타는 계속해 송신의 출처를 생각하며 작업을 진행했어.
곧, 마침내 대답이 돌아왔어.
"들립니까? 잠깐. 이거 진짜 되는 건가?"
"잘 들립니다. ‘말하는 법’은 알고 있는 모양인데, 능력자가 아닌가요?"
비타는 잠시 말을 멈추었어. 능력자가 아닌 사람…?
마음에 조그마한 불안감이 드리웠지.
비타는 말을 이어나갔어.
"신호를 지휘관들에게 연결하겠…"
"잠깐! 당신 NMPGM의 설계자지?! 그 중립국의...!"
"당연하지 않습니까." 비타가 대답했어. 조금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어. "지금 지휘관에게 신고하도록 하겠..."
"신고하겠다고? 그럴 줄 알았어! 당신네들 같은 오만한 작자들한테 뭘 기대하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왜 나한테 다 떠넘긴 거냐고…."
비타는 무심코 의자의 팔받침대를 꽉 쥐었어.
"저는 오만하지 않습니다." 비타가 대답했어.
"어떤 방식으로 네트워크에 들어온 건지는 몰라도 곧 들통날 겁니다. 우리나라의 네트워크와 국민들을 상대로 이런 장난을 치면 큰 대가를 치를 겁니다. 저희의 중립을 끝내려 하는 즉시 저희가 먼저 당신들을 끝내버릴 테니까... 아, 알겠어요?"
"중립을 끝내는 게 당신들이라면?" 목소리가 물었어.
비타의 대답은 날카로운 "뭐라고요?"였지.
"당신들이 중립을 먼저 끝낸다면 어떻게 되는데?"
"벌어진 적 없는 일이고, 벌어질 리 없는 일이죠."
"페토르의 이야기를 들은 적 없는 모양이군."
대답을 하려던 찰나에 비타는 진정 페토르에 대해 들은 적 없음을 깨달았어.
"일단 통신은 종료할게. 하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올 거야. 그 넓디넓은 네트워크를 활용해 '페토르'를 검색해 봐.
거기는 검열 같은 거 안 하잖아? 좋은 나라니까. 또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통신은 종료됐어.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비타는 두근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다시 자신의 작업으로 돌아갔어.
페토르에 대해 들은 적은 없으나 해가 다시 뜨는 대로 조사해 볼 예정이었지.
====# 12-3 #====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란...
..."진실"과 "지식"이 항상 같지는 않다는 것이야.
비타가 신호를 받은 건 느긋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이 오기 하루 전이었어. 주말 동안 그녀는 기지 도서관에서 암호화 신호로 내부망을 뒤지는 데 모든 여가 시간을 썼어.
그 암호화 신호는 비타와 친구들이 함께 금지된 게임, 이미지와 비디오를 몰래 찾는 데 사용하던 것이었지. 진지한 용도로는 이용한 적이 전혀 없었어.
하지만 페토르의 이야기를 찾고 나자, 고작 장난감으로 여겼던 이 암호화 신호를 감사히 여기게 되었어.
이토록 위험하고 심각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
이쯤에서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난 내가 어디 출신인지 몰라. 아르케아와 공허를 떠도는 타인의 경험들을 "기억" 하고 있을 뿐이지.
그럼에도, 나는 아주 쉽게 깨달아버리고 말았어.
어떤 세상이든 절망을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비타가 태어나기 20년 전, NMPGM의 확장 중에 페토르라는 아주 작은 행성이 발견된 후 내버려졌어.
그보다 400년 전에, 대기가 사라져버린 모 행성에서 도망쳐 나온 엑소더스급 함선이 그 작은 행성을 발견했어.
그 함선은 행성에 착륙한 후, 행성의 이름을… “페토르”라고 지었지. 비공식적으로 말이야.
페토르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다른 행성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어. 게다가 페토르는 황량한 우주 속에서 불규칙적인 궤도를 돌았기에, 잊혔다기보다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비타의 행성이 페토르를 발견했을 때엔, 정착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NMPGM의 힘으로 행성의 절반을 날려버렸어.
마치… 광산을 다이너마이트로 개통하는 것과 같았지. 행성의 반이 증발했고 정착민의 3분의 2가 사라졌어.
페토르인들은 비타의 행성과 대화를 시도했어. 하지만 비타의 행성엔 그 간청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었어.
정부의 비밀 조직이 페토르인들의 청원을 모두 묵살시켰다는 음모론이 다른 행성들 사이에 돌았지. 페토르인들은 한 제국 행성과 동맹을 맺었어. 자신들에게 항복하는 행성을 관용적으로 대하기로 유명한 제국이었지.
이 사건은 비타의 기억에 남아있어. 우주 끝자락 머나먼 곳에서 자신의 행성과 제국이 소규모 교전을 벌였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거든. 비타가 들은 바로는 제국의 선제 공격이었어.
하지만, 다른 행성들의 자료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어.
“...그들은 미등록 정착민들이 제국과 동맹을 맺자, 자신들의 ‘실수’를 지우기 위해 NMPGM을 이용해 우주의 한 구획을 통째로 무너뜨려 남은 페토르인을 모두 몰살하고, 수많은 제국민들을 살해했다.”
수많은 출처의 자료들이 이 이야기를 뒷받침했어.
비타가 이를 진실로 받아들인 건, 자기 행성의 내부망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있는 두 페이지짜리 기록을 보았을 때였어.
비타의 행성이 지키는 중립이란 단순한 가면이라는 것. 진실은 그렇게 시작했어. ‘평화’를 이룬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행성이 페토르와 같은 운명을 맞았어.
심지어 대부분은 ‘실수’가 아니었고, 어떤 이들은 페토르 사건 또한 ‘실수’가 아니라 믿었지.
당연히 비타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당연히 비타는 일이 시작됨과 동시에 직장으로 돌아갔어.
당연히 비타는 알 수 없는 신호와 다시 통신을 연결했어.
"우리는 페토르인의 마지막 후손들이야." 목소리가 말했어.
“우리는 벗어나고 싶을 뿐이야.”
결국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린 동맹으로부터.
이 은하에 휘몰아치는 혼돈으로부터,
그리고, 비타의 행성과 그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정신 통로를 관리하는 건 아이들이라고 들었는데, 나… 아니, 우리는…" 목소리가 말을 더듬었어.
"아이라면 이해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어. 높은 곳에 있는 어른들은 생각조차 해주지 않을 것을…"
"원하는 게 뭐죠?" 비타가 물었어.
"탈출구를 원해. NMPGM 안에서도 여기, 이 구역은… 아주 조용하고 먼 곳이라 들었어. 함선은 충분히 있으니 다른 행성에 정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아니면…” 이에 목소리가 대답했어.
제국의 동맹... 아니... 노예가 되어있던 사이에 페토르인들은 제국이 NMPGM을 유지시키는 이들의 정신 속을 염탐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
페토르인들은 그 기술을 훔쳐, 절박한 심정으로 비타에게 이를 알렸어. 의무상 비타는 이 정보를 보고해야만 했지.
그러나 페토르인과 제국의 동맹은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없었어. 신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단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고 말하는 피난민들일 뿐이었어.
비타는 이 요청을 쉽게 들어줄 수 있었어. 현대의 우주선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초광속 점프도 가능했으니까.
아주 짧은 시간만 길을 만들어 그 사이로 재빨리 페토르인들을 점프시키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그래...
비타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어.
그런데… 알고 있어? 이 하나의 진실을.
비타의 행성은 정말로 NMPGM을 이용해 우주의 한 구획을 통째로 무너뜨려 마지막 페토르인들을 죽였어.
단. 한 명도. 남김 없이.
정신 통로 바깥으로 뻗은 “시야”로 비타는 우주선이 기다리고 있는 걸 확실히 보았어.
하지만, 비타의 능력으로 그 우주선들이 어떤 배들인지 알 수 있었을까? 그 진정한 형태를? 그 크기를?
아니, 알지 못했어.
무슨 수로 알았겠어?
비타는 “페토르인”들을 위해 길을 열었어.
…길을 통해 제국의 함대가 쏟아져들어왔어.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우주선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 이야기했던가?
또 하나의 “진실”을 알려줄게.
현대의 우주선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초광속 점프도 가능했어.
NMPGM을 타고 들어온 전함들은 신속하게 행성에 포격을 쏟아부었고, 비타의 행성은 이를 막을 수단이 없었어.
제국은 능력자 기지에 대한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어. 그 기지들부터 먼저 파괴되었거든.
행성의 표면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어. 반응할 시간도 없이, 몇 시간 안에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어.
물론, 모두가 노력은 했지.
맞서 싸우려고, 다른 행성에 신호를 보내려고, 최대한 많은 전함을 격추하려고…
하지만, 그들에게 내려앉은 것은 절망 뿐이었어.
두려움…
자기 증오…
포격의 업화 속에 공포와 지옥이 현현했어.
첫 수부터 패배가 정해져버린 판이었어.
하늘에서부터 대포가 비타의 기지를 향했고…
비타와, 그녀의 상관들과, 친구들의 목숨을 빼앗아갔어.
그 후 소녀는 백색의 세상에서 눈물을 가득 머금고 깨어났어.
그러나 왜 눈물이 나는지 알지 못하였고, 가슴이 아픈 이유도 알 수 없었지.
비타는 죽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우리처럼.
비타는 자기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비타가 눈물을 닦고 일어났을 때 슬픔 외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죄책감일까? 아니면 책임감일까?
그 어느 쪽도 아닐 거야.
그런 감정을 느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타는 이제… 아무것도 “알지” 못해.
그리고… 비타의 이야기를 끝맺으며, 그녀가 일어나 유리의 세계를 마주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질문이 하나 있어.
...
애초에 비타는, 하나라도 아는 게 있었던 걸까?
====# 12-4 #====..."진실"과 "지식"이 항상 같지는 않다는 것이야.
비타가 신호를 받은 건 느긋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이 오기 하루 전이었어. 주말 동안 그녀는 기지 도서관에서 암호화 신호로 내부망을 뒤지는 데 모든 여가 시간을 썼어.
그 암호화 신호는 비타와 친구들이 함께 금지된 게임, 이미지와 비디오를 몰래 찾는 데 사용하던 것이었지. 진지한 용도로는 이용한 적이 전혀 없었어.
하지만 페토르의 이야기를 찾고 나자, 고작 장난감으로 여겼던 이 암호화 신호를 감사히 여기게 되었어.
이토록 위험하고 심각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
이쯤에서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난 내가 어디 출신인지 몰라. 아르케아와 공허를 떠도는 타인의 경험들을 "기억" 하고 있을 뿐이지.
그럼에도, 나는 아주 쉽게 깨달아버리고 말았어.
어떤 세상이든 절망을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비타가 태어나기 20년 전, NMPGM의 확장 중에 페토르라는 아주 작은 행성이 발견된 후 내버려졌어.
그보다 400년 전에, 대기가 사라져버린 모 행성에서 도망쳐 나온 엑소더스급 함선이 그 작은 행성을 발견했어.
그 함선은 행성에 착륙한 후, 행성의 이름을… “페토르”라고 지었지. 비공식적으로 말이야.
페토르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다른 행성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어. 게다가 페토르는 황량한 우주 속에서 불규칙적인 궤도를 돌았기에, 잊혔다기보다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비타의 행성이 페토르를 발견했을 때엔, 정착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NMPGM의 힘으로 행성의 절반을 날려버렸어.
마치… 광산을 다이너마이트로 개통하는 것과 같았지. 행성의 반이 증발했고 정착민의 3분의 2가 사라졌어.
페토르인들은 비타의 행성과 대화를 시도했어. 하지만 비타의 행성엔 그 간청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었어.
정부의 비밀 조직이 페토르인들의 청원을 모두 묵살시켰다는 음모론이 다른 행성들 사이에 돌았지. 페토르인들은 한 제국 행성과 동맹을 맺었어. 자신들에게 항복하는 행성을 관용적으로 대하기로 유명한 제국이었지.
이 사건은 비타의 기억에 남아있어. 우주 끝자락 머나먼 곳에서 자신의 행성과 제국이 소규모 교전을 벌였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거든. 비타가 들은 바로는 제국의 선제 공격이었어.
하지만, 다른 행성들의 자료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어.
“...그들은 미등록 정착민들이 제국과 동맹을 맺자, 자신들의 ‘실수’를 지우기 위해 NMPGM을 이용해 우주의 한 구획을 통째로 무너뜨려 남은 페토르인을 모두 몰살하고, 수많은 제국민들을 살해했다.”
수많은 출처의 자료들이 이 이야기를 뒷받침했어.
비타가 이를 진실로 받아들인 건, 자기 행성의 내부망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있는 두 페이지짜리 기록을 보았을 때였어.
비타의 행성이 지키는 중립이란 단순한 가면이라는 것. 진실은 그렇게 시작했어. ‘평화’를 이룬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행성이 페토르와 같은 운명을 맞았어.
심지어 대부분은 ‘실수’가 아니었고, 어떤 이들은 페토르 사건 또한 ‘실수’가 아니라 믿었지.
당연히 비타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당연히 비타는 일이 시작됨과 동시에 직장으로 돌아갔어.
당연히 비타는 알 수 없는 신호와 다시 통신을 연결했어.
"우리는 페토르인의 마지막 후손들이야." 목소리가 말했어.
“우리는 벗어나고 싶을 뿐이야.”
결국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린 동맹으로부터.
이 은하에 휘몰아치는 혼돈으로부터,
그리고, 비타의 행성과 그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정신 통로를 관리하는 건 아이들이라고 들었는데, 나… 아니, 우리는…" 목소리가 말을 더듬었어.
"아이라면 이해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어. 높은 곳에 있는 어른들은 생각조차 해주지 않을 것을…"
"원하는 게 뭐죠?" 비타가 물었어.
"탈출구를 원해. NMPGM 안에서도 여기, 이 구역은… 아주 조용하고 먼 곳이라 들었어. 함선은 충분히 있으니 다른 행성에 정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아니면…” 이에 목소리가 대답했어.
제국의 동맹... 아니... 노예가 되어있던 사이에 페토르인들은 제국이 NMPGM을 유지시키는 이들의 정신 속을 염탐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
페토르인들은 그 기술을 훔쳐, 절박한 심정으로 비타에게 이를 알렸어. 의무상 비타는 이 정보를 보고해야만 했지.
그러나 페토르인과 제국의 동맹은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없었어. 신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단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고 말하는 피난민들일 뿐이었어.
비타는 이 요청을 쉽게 들어줄 수 있었어. 현대의 우주선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초광속 점프도 가능했으니까.
아주 짧은 시간만 길을 만들어 그 사이로 재빨리 페토르인들을 점프시키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그래...
비타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어.
그런데… 알고 있어? 이 하나의 진실을.
비타의 행성은 정말로 NMPGM을 이용해 우주의 한 구획을 통째로 무너뜨려 마지막 페토르인들을 죽였어.
단. 한 명도. 남김 없이.
정신 통로 바깥으로 뻗은 “시야”로 비타는 우주선이 기다리고 있는 걸 확실히 보았어.
하지만, 비타의 능력으로 그 우주선들이 어떤 배들인지 알 수 있었을까? 그 진정한 형태를? 그 크기를?
아니, 알지 못했어.
무슨 수로 알았겠어?
비타는 “페토르인”들을 위해 길을 열었어.
…길을 통해 제국의 함대가 쏟아져들어왔어.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우주선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 이야기했던가?
또 하나의 “진실”을 알려줄게.
현대의 우주선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초광속 점프도 가능했어.
NMPGM을 타고 들어온 전함들은 신속하게 행성에 포격을 쏟아부었고, 비타의 행성은 이를 막을 수단이 없었어.
제국은 능력자 기지에 대한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어. 그 기지들부터 먼저 파괴되었거든.
행성의 표면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어. 반응할 시간도 없이, 몇 시간 안에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어.
물론, 모두가 노력은 했지.
맞서 싸우려고, 다른 행성에 신호를 보내려고, 최대한 많은 전함을 격추하려고…
하지만, 그들에게 내려앉은 것은 절망 뿐이었어.
두려움…
자기 증오…
포격의 업화 속에 공포와 지옥이 현현했어.
첫 수부터 패배가 정해져버린 판이었어.
하늘에서부터 대포가 비타의 기지를 향했고…
비타와, 그녀의 상관들과, 친구들의 목숨을 빼앗아갔어.
그 후 소녀는 백색의 세상에서 눈물을 가득 머금고 깨어났어.
그러나 왜 눈물이 나는지 알지 못하였고, 가슴이 아픈 이유도 알 수 없었지.
비타는 죽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우리처럼.
비타는 자기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비타가 눈물을 닦고 일어났을 때 슬픔 외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죄책감일까? 아니면 책임감일까?
그 어느 쪽도 아닐 거야.
그런 감정을 느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타는 이제… 아무것도 “알지” 못해.
그리고… 비타의 이야기를 끝맺으며, 그녀가 일어나 유리의 세계를 마주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질문이 하나 있어.
...
애초에 비타는, 하나라도 아는 게 있었던 걸까?
흐릿하게, 어렴풋하게. 남은 것은 오로지 인상뿐.
기적일까, 아니면 축복일까.
쏟아져내리는 지옥의 업화와 같은 풍경의 흔적마저도 곧 잊히고 말았다.
숨 막히는 열기, 녹아내리는 뼈, 불길에 휩싸여 추락하는 우주선, 무너지는 요새, 타오르는 화염,
사방을 메우는 비명소리… 끔찍한 공포, 모든 것이 잊혔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행복한 기억과 함께.
한 기억의 편린…
비타가 작은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있었다. 종이책은 화면이 달린 기기의 편리함에 밀려 이제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비타는 종이를 만지는 촉감, 그리고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을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 마음에 들어 했다.
모두가 같은 군복을 입고 있어도, 자신만은 특별한 듯한 느낌을 들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많은 것에 자부심을 지닌 비타였으나 종이책을 읽을 때면 특히나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저녁이 가까워지는 휴게실에서 비타가 안락의자에 앉아 작은 종이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으니 친구가 다가와 등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어디서 맨날 그런걸 갖고 오냐?"
비타는 기지를 나가 조금 걸어가면 늙은 여인이 낡은 물건을 파는 가게가 있다고 설명했다.
언젠가 외출 허가를 받아 그 가게에 친구를 데리고 가겠다 약속했다.
2개월도 지나지 않아 비타의 끔찍한 실수로 말미암아 기지의 인원은 모두 몰살당했다.
이 모든 것이, 잊혔다.
눈가에 물이 맺힌 채로 비타가 깨어났다. 그리고 비타로부터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나왔다.
백색의 세계를 덮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물게도 아주 어린 소녀가, 아르케아로 찾아왔다.
비타는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기억 속에 남은 꿈의 흔적까지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깨어나라, 비타야. 빛의 세계의 어둠 아래에서 깨어나라.
너 또한 수많은 소녀들과 함께 축복을 안고 있으니.
이 어린 소녀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 유리와 폐허의 세계를 덮은 그림자를 바라보는 눈빛 하나하나, 그 모든 것을 따라가보자.
만물의 끝을 향해, 소녀를 따라가보자.
소녀는 여행하고, 보고, 사랑하고, 배우리라.
…
모든 이야기에는 결말이 있는 법이니까.
====# 12-5 #====기적일까, 아니면 축복일까.
쏟아져내리는 지옥의 업화와 같은 풍경의 흔적마저도 곧 잊히고 말았다.
숨 막히는 열기, 녹아내리는 뼈, 불길에 휩싸여 추락하는 우주선, 무너지는 요새, 타오르는 화염,
사방을 메우는 비명소리… 끔찍한 공포, 모든 것이 잊혔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행복한 기억과 함께.
한 기억의 편린…
비타가 작은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있었다. 종이책은 화면이 달린 기기의 편리함에 밀려 이제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비타는 종이를 만지는 촉감, 그리고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을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 마음에 들어 했다.
모두가 같은 군복을 입고 있어도, 자신만은 특별한 듯한 느낌을 들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많은 것에 자부심을 지닌 비타였으나 종이책을 읽을 때면 특히나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저녁이 가까워지는 휴게실에서 비타가 안락의자에 앉아 작은 종이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으니 친구가 다가와 등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어디서 맨날 그런걸 갖고 오냐?"
비타는 기지를 나가 조금 걸어가면 늙은 여인이 낡은 물건을 파는 가게가 있다고 설명했다.
언젠가 외출 허가를 받아 그 가게에 친구를 데리고 가겠다 약속했다.
2개월도 지나지 않아 비타의 끔찍한 실수로 말미암아 기지의 인원은 모두 몰살당했다.
이 모든 것이, 잊혔다.
눈가에 물이 맺힌 채로 비타가 깨어났다. 그리고 비타로부터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나왔다.
백색의 세계를 덮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물게도 아주 어린 소녀가, 아르케아로 찾아왔다.
비타는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기억 속에 남은 꿈의 흔적까지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깨어나라, 비타야. 빛의 세계의 어둠 아래에서 깨어나라.
너 또한 수많은 소녀들과 함께 축복을 안고 있으니.
이 어린 소녀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 유리와 폐허의 세계를 덮은 그림자를 바라보는 눈빛 하나하나, 그 모든 것을 따라가보자.
만물의 끝을 향해, 소녀를 따라가보자.
소녀는 여행하고, 보고, 사랑하고, 배우리라.
…
모든 이야기에는 결말이 있는 법이니까.
아르케아의 대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리를 넘어 뻗쳐있다.
원반 모양의 대지 위를 들판과 산맥과 메마른 바다가 수놓고 있다.
이 원반은 지금도 점점 그 크기를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두 별이 떨어지며 하늘을 반쪽으로 갈라 대지의 절반에는 더 이상 햇볕이 내리쬐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햇빛을 머금었던 구름이 대지의 절반에서 사라졌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세계의 끝자락에는 그림자로 가득 찬 공허가 있으며, 그 공허는 형용할 수 없는 종말로 이어지는 통로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혀 모르는 비타는 아르케아의 밤하늘 아래에서 한 기둥에 손을 얹은 채 별들을 바라보았다.
아르케아에는 바람이 분다. 하지만 비와 눈이 내리지 않고, 물도 한 방울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따금씩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올 뿐이다. 산들바람이 비타의 머릿결 사이를 스쳤다.
그녀의 눈은 계속해서 별을 담았다.
"별들이… 보랏빛이네."
마침내 연 입 사이로 말이 새어나왔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아르케아의 별은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별은… 하얀색인데… 지상에선 별의 색을… 볼 수 없으니까. 우주에서만…"
비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말했다:
"저건… 정말로 '우주'인가?"
여기는 유리 조각이 공중에 떠다니는 동화와 같은 세계이니, 물을 가치가 있는 질문이었다.
비타는 비록 자신의 이름 외에 모든 기억을 잊어버렸으나, '지식'만큼은 지니고 있었다.
보통 세계가 지니고 있어야 할 구성 요소와 이 세계 '아르케아'에 대한 지식을.
그리고 아르케아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부족했다.
그리고, 비타는 자신에게도 너무나 많은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손을 들어 심장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물었다.
"사람들은 어디로 간거지…?"
아르케아를 방문한 이들을 절대 혼자 두지 않는 유리 조각들. 그 안에는 다른 세계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비타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기억'이었다. 그를 통해 비타는 어떤 세계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아르케아에도 언젠가 사람이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타는 자신의 옆에 우뚝 선 기둥을 바라보았다.
비타가 서있는 곳은 밤의 장막으로 뒤덮인 폐허. 새하얗게 금이 가 텅 빈 건물들의 모습은 마치 수십 마리 용이 누워 백골이 되어버린 무덤과 같았다.
비타 외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뜻하는 증거였다.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마음 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감각이 있었다.
비타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서로 공유했던, 연결되어있다는 그 감각.
이건 모든 인간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각인 걸까?
비타가 알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비타는 창백한 돌기둥으로부터 걸음을 떼 폐허를 지나쳤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 세계엔 비타밖에 없는 것이 명확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비타는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졸립지도 않았다.
하지만 비타는 납득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듣길 바라며 크게 목소리를 울렸다.
====# 12-6 #====원반 모양의 대지 위를 들판과 산맥과 메마른 바다가 수놓고 있다.
이 원반은 지금도 점점 그 크기를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두 별이 떨어지며 하늘을 반쪽으로 갈라 대지의 절반에는 더 이상 햇볕이 내리쬐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햇빛을 머금었던 구름이 대지의 절반에서 사라졌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세계의 끝자락에는 그림자로 가득 찬 공허가 있으며, 그 공허는 형용할 수 없는 종말로 이어지는 통로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혀 모르는 비타는 아르케아의 밤하늘 아래에서 한 기둥에 손을 얹은 채 별들을 바라보았다.
아르케아에는 바람이 분다. 하지만 비와 눈이 내리지 않고, 물도 한 방울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따금씩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올 뿐이다. 산들바람이 비타의 머릿결 사이를 스쳤다.
그녀의 눈은 계속해서 별을 담았다.
"별들이… 보랏빛이네."
마침내 연 입 사이로 말이 새어나왔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아르케아의 별은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별은… 하얀색인데… 지상에선 별의 색을… 볼 수 없으니까. 우주에서만…"
비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말했다:
"저건… 정말로 '우주'인가?"
여기는 유리 조각이 공중에 떠다니는 동화와 같은 세계이니, 물을 가치가 있는 질문이었다.
비타는 비록 자신의 이름 외에 모든 기억을 잊어버렸으나, '지식'만큼은 지니고 있었다.
보통 세계가 지니고 있어야 할 구성 요소와 이 세계 '아르케아'에 대한 지식을.
그리고 아르케아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부족했다.
그리고, 비타는 자신에게도 너무나 많은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손을 들어 심장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물었다.
"사람들은 어디로 간거지…?"
아르케아를 방문한 이들을 절대 혼자 두지 않는 유리 조각들. 그 안에는 다른 세계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비타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기억'이었다. 그를 통해 비타는 어떤 세계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아르케아에도 언젠가 사람이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타는 자신의 옆에 우뚝 선 기둥을 바라보았다.
비타가 서있는 곳은 밤의 장막으로 뒤덮인 폐허. 새하얗게 금이 가 텅 빈 건물들의 모습은 마치 수십 마리 용이 누워 백골이 되어버린 무덤과 같았다.
비타 외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뜻하는 증거였다.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마음 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감각이 있었다.
비타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서로 공유했던, 연결되어있다는 그 감각.
이건 모든 인간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각인 걸까?
비타가 알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비타는 창백한 돌기둥으로부터 걸음을 떼 폐허를 지나쳤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 세계엔 비타밖에 없는 것이 명확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비타는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졸립지도 않았다.
하지만 비타는 납득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듣길 바라며 크게 목소리를 울렸다.
먼지로 뒤덮인 계곡과 다리와 아무것도 없는 들판을 가로질렀다. 자신을 따라오는 아르케아가 발하는 조그마한 빛으로 칠흑 같은 밤을 비추며, 조심스럽게 폐허 사이로 발을 옮겼다.
아르케아 안에 담긴 기억과 풍경은 그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부산물에 불과했다.
어딘지도 모를 풍경의 환상보다는 바로 지금 서있는 현실이 더 중요했다.
비타는 바람을 느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바다, 또는 거대한 호수, 또는 대양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물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며, 달이 있다는 뜻이고, 어쩌면 태양도 있을지 모른다.
아니, 춥지는 않으니… 태양은 분명히 있다.
이 가설들이 얼마나 정확한지, 비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비타는 안락한 가설들에 몸을 맡기고, 스스로를 위로하듯 작게 속삭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곧 그 결의는 보답받게 된다.
운명이 아르케아를 지배하던 때였으나 이는 운명이 아니었다. 정동이 아르케아에 만연하던 때였으나 비타의 염원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어떨 때엔, 오로지 시도하는 것만으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법이다. 비타가 언덕의 꼭대기에 오르자 그곳에 보인 것은 바다가 아닌, 태양이었다.
"오… 우와… 저게…"
놀라움과 순수한 경이로 눈을 반짝이며 비타가 속삭였다. 하늘을 수놓으며 춤추는 유리조각,
진정한 빛의 세계.
눈부신 구름이 덮은 하늘 아래로 낮과 밤이 만나 뒤섞이는 경계가 아름답게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일부러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면의 '소녀'를 거부하던 비타였으나, 눈앞에 보인 풍경에 결국 체면 따위 집어던지고 등 뒤로 펼쳐진 밤의 풍경을 한 번 돌아본 뒤 신이 난 얼굴로 언덕을 뛰어내려갔다.
"이게… 이게 대체 뭐지?! 너무… 신기하다!"
조용한 세계에 비타의 흥분한 목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으나 그 누구도 듣는 사람은 없었다.
비타는 낮과 밤의 경계를 눈앞에 두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과 일광이 부딪히며 자아내는 은빛 커튼을 바라보았다.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신이 나서는 가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경계를 좀 더 잘 관찰하기 위해 주변의 바위나 폐허 위에 올라갔다.
비타가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행복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비타를 채운 경이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경계 그 자체와, '밤'쪽에서 바라보는 '낮'의 기이한 풍경을 모두 관찰하고나자 비타는 아르케아의 밝은 쪽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찾아냈다.
대성당과 투기장, 호숫가 별장과 줄이 늘어선 기둥들…
경이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비타는 새로운 풍경과 발견, 그리고 모험과 탐험을 즐겼다.
하지만, 마음을 가득 채우던 경이감이 일단 사라지기 시작할 때면…
처음엔 조금씩, 하지만 이윽고 격렬히, 행복감이 썰물처럼 밀려날 때면…
…불안이 비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낮과 밤, 폐허, 드넓은 공터. 비타의 머릿속은 너무나 많은 생각들로 복잡해졌다.
너무나도 무거운 염려와 생각을 안은 채 비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여기 나밖에 없는 거야…? 아니지…?"
가슴속에 똬리를 튼 불안은 곧 공포심으로 바뀌어, 비타는 또다시 누군가를 부르듯 소리를 크게 질렀다.
하지만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아르케아의 대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리를 넘어 뻗쳐있다.
그 구석구석까지 목소리가 닿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세계에서 깨어나서 평생 다른 사람과 만나기는커녕, 자신 외에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조용한 골목길과 텅 빈 동굴을 향해 비타가 "저기요!". "누구 있어요?" 하고 소리칠 때마다 되돌아오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그 불안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윽고 마치 망치로 얻어맞은 듯 충격적인 감각이 비타를 엄습했다. 비타는 이 세계의 너무나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운명을 알게 되었다.
평생을 혼자서 살아가야 한다는 운명을.
그리고 이 소녀조차, 이 조그마한 아이조차…
…시간은 무심하다는 공포스러운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방랑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때, 마음에 품었던 희망이 찌꺼기만 남아버렸을 때쯤, 어린 소녀 비타는 보는 사람 따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모습을 숨기려는 듯 흔해빠진 폐허의 구석으로 기어가 울고 있었다.
꺼윽거리며 울었다. 고통에 신음했다. "아니야." "싫어, 싫어."라 중얼거리며 무릎을 껴안고 울었다.
소매의 심장 모양 잎새가 눈물로 넘쳐흘렀다.
딸꾹질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과 끔찍한 진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자신의 울음소리에 묻혀, 비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 여자가 빛을 등지고 걸어나왔다.
마지막으로 내디딘 걸음의 또각, 하는 소리가 마침내 비타의 귀에 닿았다.
비타는 두려움이 번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강렬한 역광 탓에 여자의 모습은 칠흑으로 감싸여 있었다. 얼굴 오른쪽, 눈처럼 보이는 부분이 빛을 반사해 그림자를 뚫고 반짝였다.
안경인 걸까? 비타가 고개를 더 높이 들어 올리자 그곳에는 왼눈을 깜빡이는 얼굴이 있었다.
숨이 목구멍에 턱 하고 걸렸다.
사람, 애타게 찾던 사람이다. 하지만 놀란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오른 눈에 꽃이 피어있기 때문이었다.
6. 이리스
6.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3-1 | Dark-1 | Crimson Throne 클리어 | ||
13-2 | Dark-2 | Lucifer 클리어 | ||
13-3 | Dark-3 | Anökumene 클리어 | ||
13-4 | Dark-4 | Crimson Throne 클리어 |
6.2. Dark Ambition
====# 13-1 #====그림자가 스며들어, 그 끈적한 추악함으로 모든 존재를 더럽힌다.
잠시 나타난 빛조차, 그림자에 삼켜지고 만다.
이곳은 부서진 마음이 빚어낸 광야.
어두운 적막 한가운데에서 소녀가 눈을 떴다.
암흑 사이로 진한 붉은색이 반짝였다.
그 공허 속에서 이리스는 깨어났다.
자신에게 달라붙는 “무(無)”를 떼어내며,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마치 타르처럼 “무”가 이리스에게 엉겨 붙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끈적한 덩어리들을 떼어냈다.
머리카락, 몸, 옷에서 “무”를 털어낸 후, “땅”에 두 발을 딛고 일어섰다.
방금까지는 없었던 “땅”, 빛의 발판이 발밑에 나타났다. 그녀는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어깨에 두른 코트가 몸을 감쌌다.
이리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몰랐다.
일어서서 미간을 찡그리며 주변에 만연한 공허를 바라보았다.
한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어떤 장소의 이름, “아르케아”... 그리고 이곳은 아르케아가 아님을 깨달았다.
“아르케아”는 낙원이다… 자신이 태어나지 않은 낙원.
혼돈 속으로 이리스는 발을 내디뎠다.
그 발밑으로 길이 나타났다.
세상이 뒤틀리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걷는 길이 구부러지는 와중에도 이리스의 마음은 평온했다.
자신의 운명이 이 세계에 있다면…
그렇다면, 이곳은 이리스의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나타난 빛조차, 그림자에 삼켜지고 만다.
이곳은 부서진 마음이 빚어낸 광야.
어두운 적막 한가운데에서 소녀가 눈을 떴다.
암흑 사이로 진한 붉은색이 반짝였다.
그 공허 속에서 이리스는 깨어났다.
자신에게 달라붙는 “무(無)”를 떼어내며,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마치 타르처럼 “무”가 이리스에게 엉겨 붙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끈적한 덩어리들을 떼어냈다.
머리카락, 몸, 옷에서 “무”를 털어낸 후, “땅”에 두 발을 딛고 일어섰다.
방금까지는 없었던 “땅”, 빛의 발판이 발밑에 나타났다. 그녀는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어깨에 두른 코트가 몸을 감쌌다.
이리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몰랐다.
일어서서 미간을 찡그리며 주변에 만연한 공허를 바라보았다.
한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어떤 장소의 이름, “아르케아”... 그리고 이곳은 아르케아가 아님을 깨달았다.
“아르케아”는 낙원이다… 자신이 태어나지 않은 낙원.
혼돈 속으로 이리스는 발을 내디뎠다.
그 발밑으로 길이 나타났다.
세상이 뒤틀리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걷는 길이 구부러지는 와중에도 이리스의 마음은 평온했다.
자신의 운명이 이 세계에 있다면…
그렇다면, 이곳은 이리스의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13-2 #====
낙원으로 향하는 길은 분명히 있다. 빛으로 밝게 비추어진 길은 아니지만,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리스에겐 낙원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없었다.
“아르케아”가 있는 곳으로 이리스는 향했다. 하지만 이는 낙원을 향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여정 도중에 그녀는 그 세계의 과거를 보게 되었다.
“아르케아”는 어리석은 소녀들이 모이는 세계이다. 빛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순진한 소녀, 또 다른 하나는 비상한 용기를 지녔으나 가시밭길을 걷는 소녀…
물론, 이 둘 이외에도, 목적 없이 방랑하며, 텅 빈 미소를 지은 채, 춤추는 유리조각을 바라보는 소녀는 수없이 더 있었다.
미소를 지을 거면, 선명하게, 사악하게 지어야 하는 것을.
이리스는 새하얀 세상의 창문을 통해 그 소녀들을 알아가며, 그들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모든 것이 말이 되는 아르케아의 세계에서조차 그들은 방랑하고 있다. 공허에 오면 얼마 못 가 꺾이고 말겠지.
이리스는 아주 긴 시간을 공허에서 보내며, 공허와 “아르케아”에 연결됨을 느꼈다.
자신은 특별했다. 다른 소녀들과는 달랐다.
저들은 각성했을 때 빛이 맞이하러 와주었으니까.
“마치 이 애처럼…”
소녀는 빛나는 창문 옆을 느리게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전에 본 적이 있는 단안경의 소녀였다.
“오늘은 뭘 할 거니? 또 혼잣말?”
창문이 이리스를 따라왔다. 할 일도 없어 따분하던 이리스는 계속해서 창문을 바라보기로 했다.
단안경을 쓴 소녀는 이리스와 비슷한 시간에 각성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혼자서 떠벌대는 것뿐이었다.
“...”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
소녀가 손을 들자, 유리가 조그마한 “생물”로 변했다.
잠시 말없이 멈추어있던 이리스는, 창문이 떠나가고 나서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음… 방금 저거…”
잠시 숨을 고른다.
“왜 저걸 해볼 생각을 안 했지?”
동료를 만들 생각은 없다.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이리스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공허의 일부가 조금 부서지는 데에 그쳤다.
“그렇지…”
이리스가 작게 속삭이고선 웃음을 뱉었다.
“이 모든 게 전부 내 거잖아.”
이 세계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준다.
공허에서라면 무언가 다를 거라 생각하다니 어리석었다.
자신의 발밑에서 길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자신의 의지만으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길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지평선을 보고 잡으려 손을 뻗듯이,
산을 보고 오르려 발을 내딛듯이,
불을 지르면 마음속에서 불길이 솟듯이…
한순간, 악의로 가득 찬 염원이 이리스의 마음에 피어올랐다.
“힘”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오로지 그 의문 하나만을 위하여, 그녀는 다짐했다.
어둠에서 태어난 자신이, 끝없는 태양의 땅에 밤을 가져다주겠노라고.
“아르케아”가 있는 곳으로 이리스는 향했다. 하지만 이는 낙원을 향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여정 도중에 그녀는 그 세계의 과거를 보게 되었다.
“아르케아”는 어리석은 소녀들이 모이는 세계이다. 빛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순진한 소녀, 또 다른 하나는 비상한 용기를 지녔으나 가시밭길을 걷는 소녀…
물론, 이 둘 이외에도, 목적 없이 방랑하며, 텅 빈 미소를 지은 채, 춤추는 유리조각을 바라보는 소녀는 수없이 더 있었다.
미소를 지을 거면, 선명하게, 사악하게 지어야 하는 것을.
이리스는 새하얀 세상의 창문을 통해 그 소녀들을 알아가며, 그들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모든 것이 말이 되는 아르케아의 세계에서조차 그들은 방랑하고 있다. 공허에 오면 얼마 못 가 꺾이고 말겠지.
이리스는 아주 긴 시간을 공허에서 보내며, 공허와 “아르케아”에 연결됨을 느꼈다.
자신은 특별했다. 다른 소녀들과는 달랐다.
저들은 각성했을 때 빛이 맞이하러 와주었으니까.
“마치 이 애처럼…”
소녀는 빛나는 창문 옆을 느리게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전에 본 적이 있는 단안경의 소녀였다.
“오늘은 뭘 할 거니? 또 혼잣말?”
창문이 이리스를 따라왔다. 할 일도 없어 따분하던 이리스는 계속해서 창문을 바라보기로 했다.
단안경을 쓴 소녀는 이리스와 비슷한 시간에 각성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혼자서 떠벌대는 것뿐이었다.
“...”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
소녀가 손을 들자, 유리가 조그마한 “생물”로 변했다.
잠시 말없이 멈추어있던 이리스는, 창문이 떠나가고 나서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음… 방금 저거…”
잠시 숨을 고른다.
“왜 저걸 해볼 생각을 안 했지?”
동료를 만들 생각은 없다.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이리스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공허의 일부가 조금 부서지는 데에 그쳤다.
“그렇지…”
이리스가 작게 속삭이고선 웃음을 뱉었다.
“이 모든 게 전부 내 거잖아.”
이 세계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준다.
공허에서라면 무언가 다를 거라 생각하다니 어리석었다.
자신의 발밑에서 길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자신의 의지만으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길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지평선을 보고 잡으려 손을 뻗듯이,
산을 보고 오르려 발을 내딛듯이,
불을 지르면 마음속에서 불길이 솟듯이…
한순간, 악의로 가득 찬 염원이 이리스의 마음에 피어올랐다.
“힘”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오로지 그 의문 하나만을 위하여, 그녀는 다짐했다.
어둠에서 태어난 자신이, 끝없는 태양의 땅에 밤을 가져다주겠노라고.
====# 13-3 #====
물론, 이렇게 규모가 큰일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리스는 우선은 현재 자신이 가진 능력을 갈고닦기로 하고, 아주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이리스는, 유리 조각 무리 옆에 섰다.
“...이얍!”
손을 앞으로 뻗자, 멀리 떨어진 창문이 “닫혔다”.
하얀 관문이 안쪽으로부터 무너져내려 빛을 잃고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좋았어…”
이리스가 중얼거렸다.
이 혼돈스러운 공허에조차, 규칙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곳은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력이 없기에 방향이란 개념은 일시적이다.
생각으로부터 구조물이 만들어진다. 무의식에 잠깐 스쳐간 생각일지라도 사람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끝이 있다. 그 모서리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관문, “창문”을 통해 아르케아가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절박한 것처럼.
이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꿈틀댔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보고, 집중했다.
“...”
손을 펴자, 손바닥 위로 유리 조각이 떠올랐다.
“흠…”
저 새하얀 세계에 “닿는” 것과 손에서 유리 조각이 생겨나는 것에 뭔가 관련이 있는 걸까?
이리스는 궁금했다. 매번 이러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저 세계에 닿을 때마다 “느껴졌다”. 마치 축복과 같은 따뜻함이 팔을 타고 흐르는 감각.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그 느낌. 그럴 때면, 손바닥에 기억의 조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다. 아무 일 없이 그 감각이 사라지는 때도 있었다.
지금 나타난 조각은 어떤 반려동물의 기억이었다. 이리스는 고개를 돌려 그 유리 조각이 떠나가도록 두었다.
그녀에겐 공허를 조종할 힘이 있었지만, 단안경을 쓴 소녀가 아르케아를 다루는 힘만큼 자유자재는 아니었다.
이리스는 이를 깨물었다.
이리스는 이 힘에 대해 생각하던 것이 있었고, 결국 그게 옳았다. 그녀의 힘은 자신의 의지로 공허를 마음껏 다루는 힘이라기보다는, 마치 폭풍을 움직이는 힘과 같았다.
이미 스스로 존재하는 폭풍.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그 폭풍을 살짝 밀거나, 흡수하거나, 다른 곳으로 향하게 만드는 힘.
이리스는 사람을 해칠 정도로 강력한 돌풍이나 거대한 태풍의 기억을 몇 개 본 적이 있었기에, 이 비유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이 공허는 태풍의 눈과 같았다. 이 장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장대한 힘이 있음을 그녀는 항상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힘의 촉매였다.
이리스는 창문을 닫는 방법을 깨쳤다. 공기 중에 떨림이 느껴질 때, 공허의 일부를 “부술” 수 있었다. 부수고 나면, 이리스는 “어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스스로 창문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 기회는 놓쳤지만, 그 기회를 잡기만 한다면 가능했다. 그렇게 확신했다.
이리스는 아르케아까지 걸어가기보다 강제로 지름길을 뚫고 싶었다.
공허가 소용돌이쳤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리스는 주변의 어둠을 둘러보았다.
모든 게 멈추었다가, 갑작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어둠의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걸까?
이리스가 손을 들어 허공을 붙잡자 마치 천 조각처럼 손에 쥐어졌다.
그 공기를 옆으로 확 젖히자, 그 미소 지은 얼굴에 새하얀 빛이 비치자 동공이 수축했다.
창문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공허를 찢으면, 새하얀 세계가 나타난다. 그 세계 전부가.
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빛이 밝았다. 갑작스레 공기가 빠져나갔다. 공허가 뒤척이며 신음을 냈다.
여기에 바로 새하얀 세계가 있다. 지나갈 수 없는 창문을 통해 보기만 할 수 있었던 그 세계가.
결코, 지나갈 수 없었던 창문.
그것도 오늘까지다.
“자…!”
이리스가 공허를 불렀다. 어둠이 마치 혈관 같은 형상으로 그녀의 팔을 기어가다 뒤틀려, 손안의 폭풍이 되었다.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소녀는 팔을 들어, 손에 든 어둠을 빛의 세계에 부딪쳤다.
그렇게, 창문이 깨지며 빛과 그림자가 유리 조각처럼 흐트러지고, 이리스는 세계의 경계를 지났다.
이리스는 우선은 현재 자신이 가진 능력을 갈고닦기로 하고, 아주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이리스는, 유리 조각 무리 옆에 섰다.
“...이얍!”
손을 앞으로 뻗자, 멀리 떨어진 창문이 “닫혔다”.
하얀 관문이 안쪽으로부터 무너져내려 빛을 잃고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좋았어…”
이리스가 중얼거렸다.
이 혼돈스러운 공허에조차, 규칙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곳은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력이 없기에 방향이란 개념은 일시적이다.
생각으로부터 구조물이 만들어진다. 무의식에 잠깐 스쳐간 생각일지라도 사람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끝이 있다. 그 모서리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관문, “창문”을 통해 아르케아가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절박한 것처럼.
이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꿈틀댔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보고, 집중했다.
“...”
손을 펴자, 손바닥 위로 유리 조각이 떠올랐다.
“흠…”
저 새하얀 세계에 “닿는” 것과 손에서 유리 조각이 생겨나는 것에 뭔가 관련이 있는 걸까?
이리스는 궁금했다. 매번 이러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저 세계에 닿을 때마다 “느껴졌다”. 마치 축복과 같은 따뜻함이 팔을 타고 흐르는 감각.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그 느낌. 그럴 때면, 손바닥에 기억의 조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다. 아무 일 없이 그 감각이 사라지는 때도 있었다.
지금 나타난 조각은 어떤 반려동물의 기억이었다. 이리스는 고개를 돌려 그 유리 조각이 떠나가도록 두었다.
그녀에겐 공허를 조종할 힘이 있었지만, 단안경을 쓴 소녀가 아르케아를 다루는 힘만큼 자유자재는 아니었다.
이리스는 이를 깨물었다.
이리스는 이 힘에 대해 생각하던 것이 있었고, 결국 그게 옳았다. 그녀의 힘은 자신의 의지로 공허를 마음껏 다루는 힘이라기보다는, 마치 폭풍을 움직이는 힘과 같았다.
이미 스스로 존재하는 폭풍.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그 폭풍을 살짝 밀거나, 흡수하거나, 다른 곳으로 향하게 만드는 힘.
이리스는 사람을 해칠 정도로 강력한 돌풍이나 거대한 태풍의 기억을 몇 개 본 적이 있었기에, 이 비유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이 공허는 태풍의 눈과 같았다. 이 장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장대한 힘이 있음을 그녀는 항상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힘의 촉매였다.
이리스는 창문을 닫는 방법을 깨쳤다. 공기 중에 떨림이 느껴질 때, 공허의 일부를 “부술” 수 있었다. 부수고 나면, 이리스는 “어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스스로 창문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 기회는 놓쳤지만, 그 기회를 잡기만 한다면 가능했다. 그렇게 확신했다.
이리스는 아르케아까지 걸어가기보다 강제로 지름길을 뚫고 싶었다.
공허가 소용돌이쳤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리스는 주변의 어둠을 둘러보았다.
모든 게 멈추었다가, 갑작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어둠의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걸까?
이리스가 손을 들어 허공을 붙잡자 마치 천 조각처럼 손에 쥐어졌다.
그 공기를 옆으로 확 젖히자, 그 미소 지은 얼굴에 새하얀 빛이 비치자 동공이 수축했다.
창문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공허를 찢으면, 새하얀 세계가 나타난다. 그 세계 전부가.
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빛이 밝았다. 갑작스레 공기가 빠져나갔다. 공허가 뒤척이며 신음을 냈다.
여기에 바로 새하얀 세계가 있다. 지나갈 수 없는 창문을 통해 보기만 할 수 있었던 그 세계가.
결코, 지나갈 수 없었던 창문.
그것도 오늘까지다.
“자…!”
이리스가 공허를 불렀다. 어둠이 마치 혈관 같은 형상으로 그녀의 팔을 기어가다 뒤틀려, 손안의 폭풍이 되었다.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소녀는 팔을 들어, 손에 든 어둠을 빛의 세계에 부딪쳤다.
그렇게, 창문이 깨지며 빛과 그림자가 유리 조각처럼 흐트러지고, 이리스는 세계의 경계를 지났다.
====# 13-4 #====
“소원”은 정직하고 아름다운 단어이다. 희망의 빛과, 결국 다가올 승리를 말하는 단어. 그러나…
어둠에서 태어난 소녀의 마음은 무엇이 지배하는가? 정직함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다. 그렇다면 질투인가? 절망인가?
아니다. 그녀의 “소원”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죄는 긍지였다.
낙하하는 이리스를 공허와 빛이 동시에 붙잡아 감쌌다. 수많은 공간의 조각들이 그녀와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지면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창문이 닫힌다. 그림자가 이리스를 감싸며 절박하게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그녀는 어둠이 주변을 맴돌도록, 자신에게 흡수되도록 하였다.
낙하하는 이리스의 모습은 마치 땅으로 떨어지는 폭풍우와 같았다.
그녀는 어둠의 별똥별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밝았으며, 마음도 충만했다. 어둠이 그녀를 떠나기 전에 붙잡아, 자신을 어둠으로 물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소녀는 자신의 옆에서 함께 떨어지며 미소 짓고 있는 붉은 혜성을 보지 못했다. 설령 보았다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황홀했기 때문이다.
그림자로 싸인 이리스는 지면으로 낙하하며 마음껏 웃었다. 실로 황홀했다.
공허의 힘으로 충만해 움찔대는 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그 힘이 손으로부터 채찍처럼 솟아 나왔지만 구름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힘은 구름을 잡고 싶었다. 이리스는, 구름을 잡고 싶었다. 그녀는 그 기분을 곱씹은 뒤, 다시 어둠을 방출시켰다.
수많은 그림자가 촉수처럼 하늘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렇게, 구름을 잡았다.
곧, 하늘마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이리스는 손을 꽉 쥐고, 현란하게 팔을 옆으로 젖혔다. 밑에서는 그림자가 이리스를 안전하게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붉고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떨어진 날, 밤도 내려앉았다.
빛이 물러서고 구름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새로운 하늘이 새어 나와 순식간에 세상의 반을 그림자로 뒤덮었다.
흑요석 같은 공허의 방울이 떨어지고, 붉은빛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렇게, 밤은 낮을 만났다.
어둠에서 태어난 소녀의 마음은 무엇이 지배하는가? 정직함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다. 그렇다면 질투인가? 절망인가?
아니다. 그녀의 “소원”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죄는 긍지였다.
낙하하는 이리스를 공허와 빛이 동시에 붙잡아 감쌌다. 수많은 공간의 조각들이 그녀와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지면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창문이 닫힌다. 그림자가 이리스를 감싸며 절박하게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그녀는 어둠이 주변을 맴돌도록, 자신에게 흡수되도록 하였다.
낙하하는 이리스의 모습은 마치 땅으로 떨어지는 폭풍우와 같았다.
그녀는 어둠의 별똥별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밝았으며, 마음도 충만했다. 어둠이 그녀를 떠나기 전에 붙잡아, 자신을 어둠으로 물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소녀는 자신의 옆에서 함께 떨어지며 미소 짓고 있는 붉은 혜성을 보지 못했다. 설령 보았다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황홀했기 때문이다.
그림자로 싸인 이리스는 지면으로 낙하하며 마음껏 웃었다. 실로 황홀했다.
공허의 힘으로 충만해 움찔대는 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그 힘이 손으로부터 채찍처럼 솟아 나왔지만 구름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힘은 구름을 잡고 싶었다. 이리스는, 구름을 잡고 싶었다. 그녀는 그 기분을 곱씹은 뒤, 다시 어둠을 방출시켰다.
수많은 그림자가 촉수처럼 하늘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렇게, 구름을 잡았다.
곧, 하늘마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이리스는 손을 꽉 쥐고, 현란하게 팔을 옆으로 젖혔다. 밑에서는 그림자가 이리스를 안전하게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붉고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떨어진 날, 밤도 내려앉았다.
빛이 물러서고 구름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새로운 하늘이 새어 나와 순식간에 세상의 반을 그림자로 뒤덮었다.
흑요석 같은 공허의 방울이 떨어지고, 붉은빛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렇게, 밤은 낮을 만났다.
7. 나미
7.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4-1 | Astral-1 | To the Milky Way 클리어 | ||
14-2 | Astral-2 | Clotho and the stargazer 클리어 | ||
14-3 | Astral-3 | Altair (feat. *spiLa*) 클리어 | ||
14-4 | Astral-4 | To the Milky Way 클리어 |
7.2. Astral Sea
====# 14-1 #====현실처럼 생생한 꿈은 좀처럼 드물다.
하지만 그조차 꿈일 뿐이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드넓은 초원에 흩뿌리듯 펼쳐진 꽃밭, 흐르는 강과 장엄한 동굴과 거대한 계곡, 겨울의 냉기에 얼어붙어 반짝이는 얼음 기둥이 되어버린 폭포.
현실 세계는 기적과 같은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진짜 기적이 아니다. 꿈에서나 나올 법한 장관이지만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홀려버릴 정도로 아름답지만 현실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이 세계의 법칙에 따라 형성된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게다가 소녀는 세계의 법칙을 이미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이 떠올랐다. 식물의 생육, 물의 순환, 온도의 변화와 그에 따른 현상…
하지만 이 세계는 기적인 것이 분명했다. 틀림없이 꿈이다. 소녀가 학교에서 배웠던 그 어떤 수업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유리 조각에 대해 알려주지는 않았으니까.
소녀는 절벽 끝에 서서, 이 새하얀 세계의 크기를 실감했다.
고요하고 창백한 땅을 건물들이 수놓고 있었다. 어떤 건물은 똑바로 서 있었고, 어떤 건물은 기울어져 있었다. 저것들은 버려진 걸까, 아니면 보존된 걸까?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소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단어를 들은 기억은 없었다.
유리 조각이 하늘을 가르며 사람과 장소를 비추었다. 마치 영화와 같은 광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저 조각들의 이름도 “아르케아”였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소녀는 분명 자기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생생한 꿈은 좀처럼 드물다.
“...”
소녀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곧, 무언가 깨달은 듯 소녀의 몸이 움찔했다. 어떤 단어가 소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거다!” 소녀가 소리쳤다. “자각몽!”
곧 깨달음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소녀는 방방 뛰기 시작했다.
“호, 혹시 나…”
두 손을 입 앞에 가져다대며 소녀는 작게 속삭였다.
“나… 날 수 있나?!”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절벽의 끝으로 발을 한 걸음 내디뎠다가…
갑작스레, 멈추었다.
뒷걸음을 치며 소녀는 머리를 마구 흔들고선 끙끙댔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아니, 아니아니아니, 되겠냐? 바보야!”
소녀가 소리쳤다. 마음속에서 공포와 행복한 고양감이 뒤섞였다. 걸음을 내디뎠던 순간, 절벽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마음을 움켜잡았다.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으으!” 소녀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신음했다. “한 번도 꾼 적 없는 자각몽을 왜 이제 와서?”
현실처럼 느껴지는 꿈, 자각몽. 꿈을 꾸는 도중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꿈속 세계에 한해 엄청난 힘을 얻게 된다. 하늘을 날거나, 새나 나비가 되거나,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사고는 현실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에 마법을 부리지도, 새나 나비로 변신하지도 못했다.
소녀의 이름은 나미.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나미는 비교적 완만한 길을 찾아, 절벽에서 내려갔다.
하지만 그조차 꿈일 뿐이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드넓은 초원에 흩뿌리듯 펼쳐진 꽃밭, 흐르는 강과 장엄한 동굴과 거대한 계곡, 겨울의 냉기에 얼어붙어 반짝이는 얼음 기둥이 되어버린 폭포.
현실 세계는 기적과 같은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진짜 기적이 아니다. 꿈에서나 나올 법한 장관이지만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홀려버릴 정도로 아름답지만 현실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이 세계의 법칙에 따라 형성된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게다가 소녀는 세계의 법칙을 이미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이 떠올랐다. 식물의 생육, 물의 순환, 온도의 변화와 그에 따른 현상…
하지만 이 세계는 기적인 것이 분명했다. 틀림없이 꿈이다. 소녀가 학교에서 배웠던 그 어떤 수업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유리 조각에 대해 알려주지는 않았으니까.
소녀는 절벽 끝에 서서, 이 새하얀 세계의 크기를 실감했다.
고요하고 창백한 땅을 건물들이 수놓고 있었다. 어떤 건물은 똑바로 서 있었고, 어떤 건물은 기울어져 있었다. 저것들은 버려진 걸까, 아니면 보존된 걸까?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소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단어를 들은 기억은 없었다.
유리 조각이 하늘을 가르며 사람과 장소를 비추었다. 마치 영화와 같은 광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저 조각들의 이름도 “아르케아”였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소녀는 분명 자기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생생한 꿈은 좀처럼 드물다.
“...”
소녀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곧, 무언가 깨달은 듯 소녀의 몸이 움찔했다. 어떤 단어가 소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거다!” 소녀가 소리쳤다. “자각몽!”
곧 깨달음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소녀는 방방 뛰기 시작했다.
“호, 혹시 나…”
두 손을 입 앞에 가져다대며 소녀는 작게 속삭였다.
“나… 날 수 있나?!”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절벽의 끝으로 발을 한 걸음 내디뎠다가…
갑작스레, 멈추었다.
뒷걸음을 치며 소녀는 머리를 마구 흔들고선 끙끙댔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아니, 아니아니아니, 되겠냐? 바보야!”
소녀가 소리쳤다. 마음속에서 공포와 행복한 고양감이 뒤섞였다. 걸음을 내디뎠던 순간, 절벽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마음을 움켜잡았다.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으으!” 소녀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신음했다. “한 번도 꾼 적 없는 자각몽을 왜 이제 와서?”
현실처럼 느껴지는 꿈, 자각몽. 꿈을 꾸는 도중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꿈속 세계에 한해 엄청난 힘을 얻게 된다. 하늘을 날거나, 새나 나비가 되거나,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사고는 현실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에 마법을 부리지도, 새나 나비로 변신하지도 못했다.
소녀의 이름은 나미.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나미는 비교적 완만한 길을 찾아, 절벽에서 내려갔다.
====# 14-2 #====
자각몽 다운 일도 못하는데, 내 무의식이 어떤 곳인지 구경이나 해볼까.
절벽에서 내려오며 나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길과 같이, 나미가 걷고 있는 길은 유리로 수놓아져 있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려 하면 수줍은 듯 도망가 버리지만, 정작 다가오지 않았으면 할 때엔 가까이 와버리는 유리 조각들.
유리 조각은 각자 풍경을 머금고 있었다. 대부분 평범하고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진기한 구경거리도 적지 않았다.
로브를 쓴 사람들의 손짓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채와 연기의 향연처럼, 마법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광경이라든지.
지금 나미가 서있는 장소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색이 정반대인 계곡과 절벽의 풍경이라든지. 마치 악마와 같이 뿔이 나있는 사람들이 에너지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는 모습이라든지…
“멋있다…”
나미가 숨을 뱉으며 말했다. 유리 조각을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역시나 조각은 순순히 잡혀주지 않았다. 나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불평하고선, 다시 조심스럽게 길을 타고 절벽을 내려갔다.
이 세계는 분명 나미 본인의 무의식일 텐데, 그녀의 행동에는 그다지 동조해 주는 것 같지 않았다.
비록 이 무채색의 세계엔 처음으로 와보는 것이지만, 절벽은 한 번 타본 적이 있었다.
나미가 살던 나라는 산길이 험했다. 푸르른 산등성이와 울창한 나무숲으로 뒤덮인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
나미는 원한다면 그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미는 열심히 여행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방학이 되면 가족, 친구와 함께 숲이나 산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정도가 다였다.
나미는 자신의 옆에 놓인 새하얀 바위에 손을 얹었다.
하얗지만, 이거 석회암은 아니지? 나미는 학교에서 배운 지질학 수업 내용을 떠올리려 했지만, 애초에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었다.
돌 분류가 어떻게 되더라? 다공암, 퇴적암, 변성암…
나미에게 있어 학교의 진정한 가치는 교실 밖에 있었다.
체육 시간은 재밌다. 음악 시간은 재밌다. 돌멩이 공부는 재미없다.
그럼에도, 이 세계의 기묘한 풍경은 나미의 흥미를 사로잡았다.
“이걸 보고 어떻게 돌멩이 수업을 안 떠올려…” 그녀가 중얼거렸다.
절벽을 타고 내려오며, 나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지면 너머로 유리 조각들이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마치 벽을 뚫고 지나가듯이… 아니, 어쩌면?
“동굴인가?!”
나미는 그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재빨리 그 지면 너머로 발을 옮겼다.
세상에 동굴보다 멋진 건 없어. 나미는 그렇게 믿었다.
나미는 신이 나서는 달려나갔다. 유리 조각들이 그녀를 인도하듯이 발걸음에 맞추어 튀어 올랐다. 동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유리 조각들은 더욱 빠르게 날아올랐다.
동굴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아트리움이 나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리적으로 여기에 존재하는 게 가능한 건지 의심될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나미는 또다른 기적을 찾았다.
절벽에서 내려오며 나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길과 같이, 나미가 걷고 있는 길은 유리로 수놓아져 있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려 하면 수줍은 듯 도망가 버리지만, 정작 다가오지 않았으면 할 때엔 가까이 와버리는 유리 조각들.
유리 조각은 각자 풍경을 머금고 있었다. 대부분 평범하고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진기한 구경거리도 적지 않았다.
로브를 쓴 사람들의 손짓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채와 연기의 향연처럼, 마법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광경이라든지.
지금 나미가 서있는 장소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색이 정반대인 계곡과 절벽의 풍경이라든지. 마치 악마와 같이 뿔이 나있는 사람들이 에너지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는 모습이라든지…
“멋있다…”
나미가 숨을 뱉으며 말했다. 유리 조각을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역시나 조각은 순순히 잡혀주지 않았다. 나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불평하고선, 다시 조심스럽게 길을 타고 절벽을 내려갔다.
이 세계는 분명 나미 본인의 무의식일 텐데, 그녀의 행동에는 그다지 동조해 주는 것 같지 않았다.
비록 이 무채색의 세계엔 처음으로 와보는 것이지만, 절벽은 한 번 타본 적이 있었다.
나미가 살던 나라는 산길이 험했다. 푸르른 산등성이와 울창한 나무숲으로 뒤덮인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
나미는 원한다면 그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미는 열심히 여행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방학이 되면 가족, 친구와 함께 숲이나 산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정도가 다였다.
나미는 자신의 옆에 놓인 새하얀 바위에 손을 얹었다.
하얗지만, 이거 석회암은 아니지? 나미는 학교에서 배운 지질학 수업 내용을 떠올리려 했지만, 애초에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었다.
돌 분류가 어떻게 되더라? 다공암, 퇴적암, 변성암…
나미에게 있어 학교의 진정한 가치는 교실 밖에 있었다.
체육 시간은 재밌다. 음악 시간은 재밌다. 돌멩이 공부는 재미없다.
그럼에도, 이 세계의 기묘한 풍경은 나미의 흥미를 사로잡았다.
“이걸 보고 어떻게 돌멩이 수업을 안 떠올려…” 그녀가 중얼거렸다.
절벽을 타고 내려오며, 나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지면 너머로 유리 조각들이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마치 벽을 뚫고 지나가듯이… 아니, 어쩌면?
“동굴인가?!”
나미는 그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재빨리 그 지면 너머로 발을 옮겼다.
세상에 동굴보다 멋진 건 없어. 나미는 그렇게 믿었다.
나미는 신이 나서는 달려나갔다. 유리 조각들이 그녀를 인도하듯이 발걸음에 맞추어 튀어 올랐다. 동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유리 조각들은 더욱 빠르게 날아올랐다.
동굴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아트리움이 나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리적으로 여기에 존재하는 게 가능한 건지 의심될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나미는 또다른 기적을 찾았다.
====# 14-3 #====
생각만으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까?
인지와 현실을 동일선상에 놓는 학자들도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인지하고 있다면, 그건 자신이다.
그렇다면,
나비가 된 꿈을 꾸는 사람은 나비가 되는 걸까?
아니면 인간이 되는 꿈을 꾸는 나비에 불과한 걸까?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의 한계는 지식의 한계와 같다. 그렇다면, 개별적인 지식은 현실, 세계를 이루는 조각이다.
인간은 정신에 세계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과 감정과 기억을 물리적으로 재현하고, 그것들을 이어붙여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도 있는 걸까?
나미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공간, 기록 보관소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산 안에 존재하기엔 너무나 커다란 비밀 도서관… 아니, “도서관”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의 장엄함.
마치 예고 없이 열린 천국의 문 너머로 건너온 것만 같았다. 반짝이는 유리 조각의 무리가 나미의 앞을 가로질러 산 중심의 공동으로 향하는 길을 이루었다.
이곳은 영원히 “생각”이 모이고, 분류되는 장소였다.
나미의 등 뒤로 새로운 생각들이 쏟아져들어왔다. 머리 위로는 유리가 발하는 빛이 쏟아져내려와 모든 공간을 비추었다.
나미는 걸음을 내딛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바닥은 유리가 아니라 새하얀 자갈돌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산속 공간은 인공물과 자연물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모양이었다.
그 순간 나미는 이곳이 존재할 수 없는 장소이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눈부신 도서관은 나미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자갈돌 길을 따라 나선 계단과 책장과 기둥을 지나칠 때마다 아르케아 조각들이 날아와 그녀의 곁에서 동행하듯 따라왔다.
조각들이 발하는 빛이 나미의 피부를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그녀는 벽 앞에서 멈추어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우와.”
숨이 섞인 목소리로, 나미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나… 여기 너무 좋은데 어떡하지…”
미려하게 일렁이는 유리 조각 무리에서 한 조각이 빠져나와 나미의 두 손 사이로 날아왔다.
물과 파도로 가득찬 세계의 모습이 그 조각 안에 비추었다.
나미는 침을 삼켰다.
저 장소로 가고싶었다.
그리고 이 꿈같지만 꿈이 아닌 세계는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줄 것이다.
소녀의 소원이 유리 조각과 공명했다.
그녀가 이 세계를 받아들이자…
아르케아의 세계도, 그녀를 받아들였다.
인지와 현실을 동일선상에 놓는 학자들도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인지하고 있다면, 그건 자신이다.
그렇다면,
나비가 된 꿈을 꾸는 사람은 나비가 되는 걸까?
아니면 인간이 되는 꿈을 꾸는 나비에 불과한 걸까?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의 한계는 지식의 한계와 같다. 그렇다면, 개별적인 지식은 현실, 세계를 이루는 조각이다.
인간은 정신에 세계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과 감정과 기억을 물리적으로 재현하고, 그것들을 이어붙여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도 있는 걸까?
나미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공간, 기록 보관소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산 안에 존재하기엔 너무나 커다란 비밀 도서관… 아니, “도서관”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의 장엄함.
마치 예고 없이 열린 천국의 문 너머로 건너온 것만 같았다. 반짝이는 유리 조각의 무리가 나미의 앞을 가로질러 산 중심의 공동으로 향하는 길을 이루었다.
이곳은 영원히 “생각”이 모이고, 분류되는 장소였다.
나미의 등 뒤로 새로운 생각들이 쏟아져들어왔다. 머리 위로는 유리가 발하는 빛이 쏟아져내려와 모든 공간을 비추었다.
나미는 걸음을 내딛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바닥은 유리가 아니라 새하얀 자갈돌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산속 공간은 인공물과 자연물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모양이었다.
그 순간 나미는 이곳이 존재할 수 없는 장소이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눈부신 도서관은 나미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자갈돌 길을 따라 나선 계단과 책장과 기둥을 지나칠 때마다 아르케아 조각들이 날아와 그녀의 곁에서 동행하듯 따라왔다.
조각들이 발하는 빛이 나미의 피부를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그녀는 벽 앞에서 멈추어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우와.”
숨이 섞인 목소리로, 나미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나… 여기 너무 좋은데 어떡하지…”
미려하게 일렁이는 유리 조각 무리에서 한 조각이 빠져나와 나미의 두 손 사이로 날아왔다.
물과 파도로 가득찬 세계의 모습이 그 조각 안에 비추었다.
나미는 침을 삼켰다.
저 장소로 가고싶었다.
그리고 이 꿈같지만 꿈이 아닌 세계는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줄 것이다.
소녀의 소원이 유리 조각과 공명했다.
그녀가 이 세계를 받아들이자…
아르케아의 세계도, 그녀를 받아들였다.
====# 14-4 #====
꿈속의 꿈인가? 아니야, 이건…
나미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오렌지색 물결이 그녀의 주변을 감쌌다. 황혼의 빛, 일몰의 빛이었다.
나미는 뒤로 누워 파도에 몸을 맡겼다. 곧 그녀의 전신이 물에 잠겼다. 놀랍게도, 물 안에서도 나미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나미의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이는 상식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생각들은 나미 본인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경험이자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멋진 삶을 사는 누군가의…
시원한 수면 밑으로 흐르는 따뜻한 바닷물.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 나미는 행복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긴 대체 어딜까?”
나미가 말을 하자 수중임에도 또렷하게 목소리가 울렸다.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혼자 온 것이 아님을 기억해 냈다.
나미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수십 마리의 알록달록한 물고기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헤엄치고 있었다.
왼쪽으로부터 “그녀”가 알고 있는 어린아이가 이쪽으로 헤엄쳐오고 있었다. 아이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그 손을 잡았다.
마치 집처럼 편안한 기분이었다.
두 소녀는 수면을 향해, 태양을 향해 고개를 올려들었다.
빛줄기가 파도에 부서져 물의 우주를 수놓는 아름다운 빛의 조각이 되었다. 두 소녀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물고기들의 색, 무지개색으로 갈라지는 햇빛, 몸을 감싸는 온기…
이 천국과도 같은 장소는…
기억이었다.
그리우면서도, 어딘가 기묘한… 그런 종류의 깨달음.
하지만 나미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손을 더욱 꼭 붙잡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검은 장막이 드리운 하늘에 박힌 별들이 수면에 일렁일 때까지…
하늘에 박힌 별들이 수면에 일렁일 때까지…
거부하기 힘든 안락함이었다.
그렇다. 이건 기억이다. 그 세계는 기억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기억이 끝나면,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삶과 기억이 그 장소에서 나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미의 얼굴에 태양보다도 밝은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깃털보다도 가벼웠다.
이것이 기쁨이자 천국이다.
나미는, 아르케아의 세계에 사로잡혔다.
나미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오렌지색 물결이 그녀의 주변을 감쌌다. 황혼의 빛, 일몰의 빛이었다.
나미는 뒤로 누워 파도에 몸을 맡겼다. 곧 그녀의 전신이 물에 잠겼다. 놀랍게도, 물 안에서도 나미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나미의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이는 상식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생각들은 나미 본인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경험이자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멋진 삶을 사는 누군가의…
시원한 수면 밑으로 흐르는 따뜻한 바닷물.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 나미는 행복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긴 대체 어딜까?”
나미가 말을 하자 수중임에도 또렷하게 목소리가 울렸다.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혼자 온 것이 아님을 기억해 냈다.
나미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수십 마리의 알록달록한 물고기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헤엄치고 있었다.
왼쪽으로부터 “그녀”가 알고 있는 어린아이가 이쪽으로 헤엄쳐오고 있었다. 아이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그 손을 잡았다.
마치 집처럼 편안한 기분이었다.
두 소녀는 수면을 향해, 태양을 향해 고개를 올려들었다.
빛줄기가 파도에 부서져 물의 우주를 수놓는 아름다운 빛의 조각이 되었다. 두 소녀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물고기들의 색, 무지개색으로 갈라지는 햇빛, 몸을 감싸는 온기…
이 천국과도 같은 장소는…
기억이었다.
그리우면서도, 어딘가 기묘한… 그런 종류의 깨달음.
하지만 나미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손을 더욱 꼭 붙잡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검은 장막이 드리운 하늘에 박힌 별들이 수면에 일렁일 때까지…
하늘에 박힌 별들이 수면에 일렁일 때까지…
거부하기 힘든 안락함이었다.
그렇다. 이건 기억이다. 그 세계는 기억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기억이 끝나면,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삶과 기억이 그 장소에서 나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미의 얼굴에 태양보다도 밝은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깃털보다도 가벼웠다.
이것이 기쁨이자 천국이다.
나미는, 아르케아의 세계에 사로잡혔다.
8. 루나 & 이로
Rotaeno와의 콜라보레이션 스토리.8.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9-1 | Rotaeno-1 | Rotaeno 팩 구매 | ||
19-2 | Rotaeno-2 | 19-1 스토리 열람 | ||
19-3 | Rotaeno-3 | MVURBD 클리어 | ||
19-4 | Rotaeno-4 | 루나 & 이로로 Waltz for Lorelei 클리어 | ||
19-5 | Rotaeno-5 | 루나 & 이로로 Dual Doom Deathmatch 클리어 | ||
19-6 | Rotaeno-6 | 루나 & 이로로 MVURBD 클리어 | ||
19-7 | Rotaeno-7 | 루나 & 이로로 Inverted World 클리어 | ||
19-8 | Rotaeno-8 | 루나 & 이로로 Vulcānus 클리어 |
8.2. Rotaeno
====# 19-1 #====그 재미난 얘기, 또 해볼까.
우리가 공허로 떨어졌을 때 말이야. 너 괜히 센 척 하려고 눈 부릅뜨고 있었잖아.
나도 조금 무서웠는데 네가 안 무서워할 리가 없으니 허세란 걸 단박에 알아챘지.
세상이 무너져내리고 칠흑같은 그림자와 기이하게 밝은 구름만이 우리의 시야를 채웠어.
마치 폭죽이 수놓은 듯 하늘이 반짝거리고 지진이 오기라도 한 것인양 발 밑이 마구 흔들렸지.
루나야, 그 상황에 네가 겁을 먹지 않았을 리가 없잖니. 뭐, 안 무서운 척 하던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공허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걷는다"는 행위조차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변질되어버렸어.
그 장소의 빛나는 구름들에는 무언가 비치고 있었지. 익숙한 아르케아의 풍경들이었어.
거기서 한 장소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어. "아쿠아"라 불리는 세계였지.
우리는 유리 조각을 향해 열쇠를 들어올리고, 그 세계로 들어갔어.
거대한 호수들 사이로 경이로운 기술력으로 지어진 도시가 솟아있었어.
거리에서는 인간형 로봇이 사람들을 돕는 모습이 보였고, 하늘은 우주선과 부유하는 섬들이 수놓고 있었어.
전에 보지 못한 놀라운 풍경이었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눈부신 햇살 사이로 돈을 얼마나 들였는지,
멋들어진 섬들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
우리 둘 다 그 곳에 뭐가 있는지, 얼마나 특별한 장소인지 알고 있었지.
넌 귀여운 몸짓으로 폴짝 튀어나가 달려나가며 호들갑 떨듯 한 섬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어.
"해 지기 전까지 내가 저 섬에 숨어들어갈 수 있다? 없다? 난 있다에 걸게!"
그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어. 오늘, 지상에 살던 한 꼬마가
"서머 페스티벌"을 보러 저 섬에 숨어들어갔다 들키게 되었거든. 분명 거기서 발상을 얻었겠지.
좋아. 어디 가 봐. 나는 웃으며 너에게 손을 흔들었어.
그래, 난 "기억"할 수 있었어. "나"는 부유섬에 사는 사람. 너는 지상 출신의 "고아".
그러고 보니 물어보지 못했네. 너도 느꼈을까?
불안하다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든지. 그런게 아니었어.
다만 확실히 알 수 있었어. 느껴졌거든...
이 세계가 함정이라는걸.
이 물로 가득한 세계의 기억을, 너와 나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거야.
====# 19-2 #====
미쳤다! 쩔어! 어떻게 이런 세계가 존재하지?
아, 그래, 맞아. 이야기 도중이었지.
공허를 가로질러 물과 최첨단 기술로 가득 찬 세계에 당도하는 경험은,
비유하자면 어두컴컴한 던전을 헤쳐나가 그 끝에 있는 보물더미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
최고야!!! 에토 언니는 어떻게 그리 침착한 줄 모르겠어!
게다가, 떠다니는 섬이라니...
여기는 "서머 페스티벌"의 기억인 모양이야. 눈부시게 밝고, 엄청 멋있고, 반짝반짝하고, 놀라운 축제!
그 곳에 가는 "기억"이 나. 기억만으론 부족해. 직접 가보고싶어!
아니, 그냥 가는 것도 아니라... 숨어들고 싶어!
무단 침입이라니. 너무 재밌을 것 같아.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그래, 그 꼬마는 잡히고 말지.
하지만 발상 자체는 너무 훌륭하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언니를 두고 가장 가까운 항구로 달려갔어.
공간을 가득 채우는 웅성웅성 북적대는 소리... 보통 부유섬 출입은 엄격하게 제한되는 편인데,
서머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으니 부유섬에 출입 가능한 사람들이 한무더기가 되어 들어가고 있었어. 그 말인즉...
내 기억이 맞다면... 보안이 평소보다 더 빡빡할 거란 뜻이지...
그래도 반드시 어딘가에 빈틈이 있을거야. 경비원이 볼 수 없는 사각지대가.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 자체는 간단하겠지.
그런데, 숨어들 생각을 한 게 나 혼자만이 아닌 모양이야.
살금살금 움직이던 중 모퉁이에서 어떤 여자애랑 부딪혔거든.
서로 쓰고 있던 모자가 뒤바뀔 정도로 강하게 머리를 쿵 하고 부딪혀서 우리 둘 다 엉덩방아를 찧었어.
그 애의 새하얀 모자를 뒤집어 쓴 채 나는 머리에 난 혹을 문지르며 일어섰어.
내 파란 모자를 머리에 얹은 그 애는 일어서며 나에게 윽박을 질렀지. "앞 좀 보고 다녀!"
그 애를 조용히 시키기도 전에, 머리에 얹혀있던 내 모자가 스르륵 미끄러져 그 애의 얼굴을 가렸어.
모자를 벗기자, 마침내 그 때 깨달았어.
이 애, 서머 페스티버에 몰래 들어가려다 잡힐 그 애구나! 곧바로 질문을 던졌지.
"배에도 몰래 올라탈 계획이었어?"
"뭐?!"
그 애는 그렇게 외치고선 잠시 말이 없었어. 그러더니 나를 살펴봤지.
서로 비슷한 나이로 보이니 안심한걸까, 그 애는 꽤 빨리 경계를 풀었어. 그리고 내게 물었지.
"너도... 서머 페스티벌에 숨어들 생각이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애도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어.
"그거 짱이다! 참, 내 이름은 이로라고 해."
"나는 루나야."
그렇게 대답하고 난 이로의 손을 잡아 일어서는 걸 도와줬어.
우리 둘은 살금살금 움직여 적당한 곳에 숨어 항구를 바라보며 빈틈을 노렸어.
"가자, 기회는 한 번 뿐이니까." 내가 말했어.
화물칸으로 보이는 공간을 향해 열린 문 주변을 한 경비원이 서성이고 있었어.
뭘 확인하는 건지 20초에 걸쳐 몇 번이고 같은 곳을 왕복했지. 10초. 10초만 있으면 충분해. 적어도 나는 말이야.
나는 이로의 손을 꽉 잡고 속삭였어.
"셋하면 간다."
"하나...둘...셋!"하는 구령과 함께 우리는 경비원의 등 뒤를 지나 배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어.
====# 19-3 #====
네가 문제없이 해낼거란 예감은 들었어.
쌍둥이의 예감같은 건 아니고, 하늘에 떠다니는 섬으로 향하는 배 위에 몰래 올라타는 거 정도야,
너한테는 식은 죽 먹기 아니겠니. 하지만, 그래도...
해가 지고 있었어. 사실 있지. 지금 좀 불안해. 기억 속에서 서로 떨어져 돌아다닌 적은 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진 적은 없잖아.
게다가... 우리 마음대로 이 기억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 외에 또 불안한 점은 있었어. 어째서인지 이 기억은...
뒤죽박죽 섞여있거든. 보통 기억에 입장하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그 기억의 아주 세세한 부분들, 그게 없었어.
여기에선 시간이 흐를 수록 현실 그 자체가 마구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어.
예를 들어... "나"는 누구지? 공무원인가? 아니면 파일럿?
이 기억을 찾은 장소가 공허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또 왜지?
흐음... 넌 좋겠다, 루나야.
바보라서 이런 생각 안 해도 되니까.
그래도 이 세계를 둘러볼 수 있는 만큼 둘러보는 건 나쁘지 않았어. 우주선의 구조는 아주 흥미로웠고,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양의 물이 그리는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어.
낮에는 햇빛에 온 도시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듯 하다가,
밤이 다가오자 도시가 스스로 내는 빛이 아주 멋진 야경을 그렸어.
마치 환상화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
아, 불안해.
현지인들에게 말을 하고 다녔어. 네 생김새를 설명하고 혹시 보지 못했냐고 말이야. 아무도 모르더라.
그리고 로봇들에게 가서 이 기억속에서 네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의 사람에 대해 물어보면,
그 사람에 대한 사실만을 늘어놓을 뿐이었어. 네가 지금 뭘 하고 있든 간에, "기억"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야.
나는 계속 거리를 방황하며 머리 위에 떠있는 섬을 바라보았어. 매 분, 매 초가 지날때마다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갔지...
그 때야. 호페를 만난 건.
조그만 꼬마와 부딪혀서 거의 넘어질 뻔 했어. 그 애는 넘어졌지.
나는 서둘러 그 애를 일으켜주었어. 그러자 자기 옷매무새를 다듬고, 내게 정중히 사과하더니, 나를 보고 놀라더라.
"부유섬에서 오신 분이세요?! 거기, 거기 혹시... 으음..."
"진정해요. 괜찮으니까."
말을 못 잇길래 우선은 진정시켰어.
그 애의 이름은 호페. 부유섬에 가야 한다고 하더라. 아니면 적어도 대신 누군가를 보내 봐야 할 것이 있대.
이유는 말래주지 않았지만, 나는 "부유섬 주민"이니 호페를 도와줄 수 있었지.
호페는 주머니에서 티켓을 한 장 꺼내더니 꼼지락대며 중얼댔어.
"저, 이게 있는데... 있긴 한데..."
부유섬으로 가는 티켓이었어. 그게 얼마나 얻기 어려운 것인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나는 전부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호페는 티켓을 자기가 쓰려고 하지 않는걸까?
추측일 뿐이지만... 몰래 부유섬에 들어가려다가 잡힐 어떤 애 떄문에 일어날 소란을 생각하니...
뭔가 감이 왔지.
"놀라지 말고 들어요." 호페의 눈을 보고 말했어.
"혹시... 서머 페스티벌에 가려고 부유섬에 몰래 들어간 친구가 있나요?"
호페가 당황하는 게 눈에 보였어. 하지만 의리가 두터운 걸까. 쉽게 인정하지 않을 낌새였지.
...그런데 난 에둘러 말하는 건 질색인 사람이거든!
"걱정하지 마세요. 부유섬에 친구가 있다면, 제가 찾아드릴게요. 인맥이 있거든요. 티켓은 안 쓰셔도 돼요."
"네...? 아뇨, 아니에요! 부유섬에 숨어들어간다니,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어요!" 호페가 허둥대며 말했어.
"의심한 적 없어요. 저는 평범한 부유섬 주민이 아니라, 친절한 공무원이거든요! 자, 공짜로 보내드릴게요. 같이 가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부드럽게 호페가 손에 든 티켓을 다시 주머니로 넣어줬어.
그리고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뻗었지. 루나 생각이 나네...
"제 이름은 렐린이에요."
나는 그렇게 말했어. 그 기억속 "나"의 이름,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었지.
"그런데 그냥 에토라고 불러요. 다들 그렇게 부르거든요."
그렇게 운을 띄운 후 나는 말을 이었어.
"호페, 잘 들어요. 저는 친구분이 어디에 계신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쌍둥이의 예감같은 건 아니고, 하늘에 떠다니는 섬으로 향하는 배 위에 몰래 올라타는 거 정도야,
너한테는 식은 죽 먹기 아니겠니. 하지만, 그래도...
해가 지고 있었어. 사실 있지. 지금 좀 불안해. 기억 속에서 서로 떨어져 돌아다닌 적은 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진 적은 없잖아.
게다가... 우리 마음대로 이 기억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 외에 또 불안한 점은 있었어. 어째서인지 이 기억은...
뒤죽박죽 섞여있거든. 보통 기억에 입장하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그 기억의 아주 세세한 부분들, 그게 없었어.
여기에선 시간이 흐를 수록 현실 그 자체가 마구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어.
예를 들어... "나"는 누구지? 공무원인가? 아니면 파일럿?
이 기억을 찾은 장소가 공허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또 왜지?
흐음... 넌 좋겠다, 루나야.
바보라서 이런 생각 안 해도 되니까.
그래도 이 세계를 둘러볼 수 있는 만큼 둘러보는 건 나쁘지 않았어. 우주선의 구조는 아주 흥미로웠고,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양의 물이 그리는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어.
낮에는 햇빛에 온 도시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듯 하다가,
밤이 다가오자 도시가 스스로 내는 빛이 아주 멋진 야경을 그렸어.
마치 환상화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
아, 불안해.
현지인들에게 말을 하고 다녔어. 네 생김새를 설명하고 혹시 보지 못했냐고 말이야. 아무도 모르더라.
그리고 로봇들에게 가서 이 기억속에서 네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의 사람에 대해 물어보면,
그 사람에 대한 사실만을 늘어놓을 뿐이었어. 네가 지금 뭘 하고 있든 간에, "기억"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야.
나는 계속 거리를 방황하며 머리 위에 떠있는 섬을 바라보았어. 매 분, 매 초가 지날때마다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갔지...
그 때야. 호페를 만난 건.
조그만 꼬마와 부딪혀서 거의 넘어질 뻔 했어. 그 애는 넘어졌지.
나는 서둘러 그 애를 일으켜주었어. 그러자 자기 옷매무새를 다듬고, 내게 정중히 사과하더니, 나를 보고 놀라더라.
"부유섬에서 오신 분이세요?! 거기, 거기 혹시... 으음..."
"진정해요. 괜찮으니까."
말을 못 잇길래 우선은 진정시켰어.
그 애의 이름은 호페. 부유섬에 가야 한다고 하더라. 아니면 적어도 대신 누군가를 보내 봐야 할 것이 있대.
이유는 말래주지 않았지만, 나는 "부유섬 주민"이니 호페를 도와줄 수 있었지.
호페는 주머니에서 티켓을 한 장 꺼내더니 꼼지락대며 중얼댔어.
"저, 이게 있는데... 있긴 한데..."
부유섬으로 가는 티켓이었어. 그게 얼마나 얻기 어려운 것인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나는 전부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호페는 티켓을 자기가 쓰려고 하지 않는걸까?
추측일 뿐이지만... 몰래 부유섬에 들어가려다가 잡힐 어떤 애 떄문에 일어날 소란을 생각하니...
뭔가 감이 왔지.
"놀라지 말고 들어요." 호페의 눈을 보고 말했어.
"혹시... 서머 페스티벌에 가려고 부유섬에 몰래 들어간 친구가 있나요?"
호페가 당황하는 게 눈에 보였어. 하지만 의리가 두터운 걸까. 쉽게 인정하지 않을 낌새였지.
...그런데 난 에둘러 말하는 건 질색인 사람이거든!
"걱정하지 마세요. 부유섬에 친구가 있다면, 제가 찾아드릴게요. 인맥이 있거든요. 티켓은 안 쓰셔도 돼요."
"네...? 아뇨, 아니에요! 부유섬에 숨어들어간다니,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어요!" 호페가 허둥대며 말했어.
"의심한 적 없어요. 저는 평범한 부유섬 주민이 아니라, 친절한 공무원이거든요! 자, 공짜로 보내드릴게요. 같이 가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부드럽게 호페가 손에 든 티켓을 다시 주머니로 넣어줬어.
그리고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뻗었지. 루나 생각이 나네...
"제 이름은 렐린이에요."
나는 그렇게 말했어. 그 기억속 "나"의 이름,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었지.
"그런데 그냥 에토라고 불러요. 다들 그렇게 부르거든요."
그렇게 운을 띄운 후 나는 말을 이었어.
"호페, 잘 들어요. 저는 친구분이 어디에 계신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 19-4 #====
우주선은 좁았고 창문도 뚫려있지 않았어.
너무 실망스러웠어. 올라가면서 창 밖 풍경도 보고 싶었는데...
물론, 나 혼자는 아니었어. 이 애도 나만큼이나 실망한 모양이야.
"뭔 우주선에 창문이 없어?!"
새 친구, 이로가 갑작스레 소리쳤어. 나는 곧바로 쉿 하고 신호를 줬지.
"쉿...!!! 여긴 화물칸이니까 그렇지."
"어, 그래?"
"몰랐어...?"
어두컴컴한 화물칸.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로를 쳐다봤어.
이로는 어깨를 한 번 들썩하더니, 이렇게 말했지:
"들어올 때 잘 안봐서 몰랐어."
참 별난 애야...
"근데 루나야, 너 옷이 이상하다."
"그래?"
"부유섬 출신이니?"
잠시 생각해봤어. "나"는 부유섬 출신이 아니었지만, 에토 언니는 그랬지.
"나"는 고아였어... 서머 페스티벌에 가게 되는데... 어떻게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났어.
아무튼, 아니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내 허리춤에 찬 열쇠검을 보더니 "그럼 검객이야?"라고 묻더라.
또 아니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이번엔 "그럼 너 혹시... 아이돌이니?!"라고 물었어.
나는... 아이돌이 뭔지 몰랐어.
하지만 그 질문을 하는 이로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만은 보였지.
"아이돌이라니... 그게 뭐야? 무슨 돌인가?"
"아이돌이 뭔지 모른ー?!?!?!!" 나는 서둘러 이로의 입을 막았어.
"조용히! 조용!" 작은 소리로 주의를 줬어. 손을 치우자 이로는 곧바로 입을 열었지.
"알았어, 속삭이면 되지...? 아이돌이 뭔지 모른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 기억의 주인은 아이돌에 대한 정보는 갖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럼... 한 번 설명해봐."
"헉! 으아!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지? 루루아랑 올란은 기본이고, 그리고, 음, 아, 왕국소녀..."
"무슨 높으신 분들인가?"
"가수들이야!"
그니까... 아이돌은 가수를 다르게 부르는 요상한 이름인건가?
으음... 그러고 보니 언젠가 아이돌이라는 말은 숭배받는 "우상"이란 뜻이라고 언니가 가르쳐준 적 있었는데...?
뭐, 이로의 모습을 보면 그것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신심이 아주 깊어보여.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지. 나도 음악 할 줄 아는데."
나 자신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어. 언니보다 훨씬 잘하지.
"정말? 너 노래도 부를 줄 알아? 아이돌 해보는 게 어때?"
"어... 별로 나한테 맞는 직업은 아닌 것 같아." 숭배받는 건 좀 그래...
"아이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보기만 해도 삶이 충만해지는데...
직접 아이돌이 되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아 그래, 루나야! 동영상을 몇 개 보여줄게.
어휴, 볼륨은 줄일테니까 화 내지 말고! 자, 봐봐... 그리고 잘 들어봐!"
어...
솔직히... 나쁘지 않네!
관현악 쪽이 더 내 취향이긴 한데...
비좁고 어두운 화물칸에 숨어서 속닥거리는 모양새긴 해도, 다른 사람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즐거웠어.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아이돌, 해볼까?
너무 실망스러웠어. 올라가면서 창 밖 풍경도 보고 싶었는데...
물론, 나 혼자는 아니었어. 이 애도 나만큼이나 실망한 모양이야.
"뭔 우주선에 창문이 없어?!"
새 친구, 이로가 갑작스레 소리쳤어. 나는 곧바로 쉿 하고 신호를 줬지.
"쉿...!!! 여긴 화물칸이니까 그렇지."
"어, 그래?"
"몰랐어...?"
어두컴컴한 화물칸.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로를 쳐다봤어.
이로는 어깨를 한 번 들썩하더니, 이렇게 말했지:
"들어올 때 잘 안봐서 몰랐어."
참 별난 애야...
"근데 루나야, 너 옷이 이상하다."
"그래?"
"부유섬 출신이니?"
잠시 생각해봤어. "나"는 부유섬 출신이 아니었지만, 에토 언니는 그랬지.
"나"는 고아였어... 서머 페스티벌에 가게 되는데... 어떻게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났어.
아무튼, 아니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내 허리춤에 찬 열쇠검을 보더니 "그럼 검객이야?"라고 묻더라.
또 아니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이번엔 "그럼 너 혹시... 아이돌이니?!"라고 물었어.
나는... 아이돌이 뭔지 몰랐어.
하지만 그 질문을 하는 이로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만은 보였지.
"아이돌이라니... 그게 뭐야? 무슨 돌인가?"
"아이돌이 뭔지 모른ー?!?!?!!" 나는 서둘러 이로의 입을 막았어.
"조용히! 조용!" 작은 소리로 주의를 줬어. 손을 치우자 이로는 곧바로 입을 열었지.
"알았어, 속삭이면 되지...? 아이돌이 뭔지 모른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 기억의 주인은 아이돌에 대한 정보는 갖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럼... 한 번 설명해봐."
"헉! 으아!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지? 루루아랑 올란은 기본이고, 그리고, 음, 아, 왕국소녀..."
"무슨 높으신 분들인가?"
"가수들이야!"
그니까... 아이돌은 가수를 다르게 부르는 요상한 이름인건가?
으음... 그러고 보니 언젠가 아이돌이라는 말은 숭배받는 "우상"이란 뜻이라고 언니가 가르쳐준 적 있었는데...?
뭐, 이로의 모습을 보면 그것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신심이 아주 깊어보여.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지. 나도 음악 할 줄 아는데."
나 자신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어. 언니보다 훨씬 잘하지.
"정말? 너 노래도 부를 줄 알아? 아이돌 해보는 게 어때?"
"어... 별로 나한테 맞는 직업은 아닌 것 같아." 숭배받는 건 좀 그래...
"아이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보기만 해도 삶이 충만해지는데...
직접 아이돌이 되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아 그래, 루나야! 동영상을 몇 개 보여줄게.
어휴, 볼륨은 줄일테니까 화 내지 말고! 자, 봐봐... 그리고 잘 들어봐!"
어...
솔직히... 나쁘지 않네!
관현악 쪽이 더 내 취향이긴 한데...
비좁고 어두운 화물칸에 숨어서 속닥거리는 모양새긴 해도, 다른 사람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즐거웠어.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아이돌, 해볼까?
====# 19-5 #====
"정말로 에토 양은 부유섬 주민이신가요...? 실례지만, 제 예상보다 훨씬... 착하셔서."
호페가 별안간 물었어.
나는 한 번 웃은 뒤 대답했지.
"실례 맞네요! 네, 저 부유섬 출신 맞아요. 친구분 찾으면 함께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제가 잘 얘기할게요."
나는 호페와 함께 섬으로 향하는 우주선을 타러 가고 있었어. 굳이 걸어가는 이유는...
이 세계, 아쿠아에서는 항상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었거든. 지금은 일거수일투족을 다투는 상황이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들켜서 난리를 피우는 일은 피하고 싶었거든.
또 다른 이유는, 사실 주된 이유는, 아직도 아쿠아의 풍경이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야.
미소가 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어. 호페는 그걸 알아차리고 궁금해졌는지 내게 또 질문을 던졌어.
"여기엔 무슨 일로 내려오셨어요? 뭔가... 할 일이 있었다든지?"
음...
"나"는 뭔가 설문조사 같은 걸 하러 내려온 것 같기도 하지만...
뭐, 너나 나나 정해진 이야기 따라가는 건 싫어하지 않니.
"관광하러 왔어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어.
"그건 의외네요. 부유섬 사람들은 자기에 동네가 너무 좋아서 지상은 거들떠도 안 보는 줄 알았어요.
안 그러면 뭐하러 그렇게 높은 곳에 살겠어요?"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니까요. 제 쌍둥이 동생조차 저랑은 한참 성격이 다른 걸요."
"우와...! 쌍둥이... 쌍둥이는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있다든가...
아니면 서로를 향해 아주 강한 공감력이 발휘된다든가... 그거 진짜예요?"
"...재밌는 걸 알고 계시네요. 음... 어느정도는 진짜라고 할 수 있어요."
"너무 신기하네요..."
흐으으음... 갑자기 호페를 살짝 놀려보고 싶어졌어...!
"사실... 제 동생 루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 지금 당장 다 알 수 있어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그렇게 말하니까, 호페가 화들짝 놀라더라. 정말 몸이 붕 뜰 정도로.
"정말요?!" 호페가 허억 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입으로 가져갔어.
"네, 푸른 하늘이 보여요. 거대한 도시와 무한히 뻗어나가는 수평선이..."
"부유섬에서 보는 풍경 아니에요?!"
"네, 맞아요...! 부유섬에 있는 루나의 모습이 보여요!" 물론 거짓말이지.
"세상에, 호페씨의 친구분과 함께 있네요!"
"정말요?! 제 친구가 무례하게 굴고 있진 않나요?!"
그 말을 듣고 풉 하고 빠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어. 거의 넘어질 뻔 했다니까.
"하하하... 아뇨, 루나가 훨씬 무례하거든요."
(미안해, 루나야. 예의 차리려다가 널 욕해버렸네.)
호페는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다행이다... 아! 동생분이 무례하다는 게 다행이란 게 아니라..."
어음, 루나야, 혹시 몰라서 다시 말하는데, 네가 무례하다는 건 거짓말이니까, 알지?
그나저나...
너는 이 기억에 입장하면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가진 정보로 판단했을 때 호페는 여기서 "엘리트"로 불리는 부류의 사람인 것 같아.
너도 그 재수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가 엘리트라고 곧잘 말하곤 하지만...
여기 아쿠아에서는 "엘리트"란 꽤 무게를 지닌 단어인 것 같아.
엘리트가 맞냐고 물어보려다가, 다른 질문으로 바꿔 물어봤어.
"질문을 자주 하시네요."
"배워야 할 게 많으니까요. 세상은... 정말로 넓은 곳이잖아요."
"알아요. 저도 굉장히 넓은 세상에 살다 왔거든요."
"음...? 아쿠아 출신이 아니셨나요?"
"아... 맞다. 그랬죠, 참. 하하하!" 실수할 뻔 했어. 얘랑 얘기하고 있으면 너무 안심이 돼서...
"세상이 넓다는 건, 이 행성만을 말한 게 아니에요."
호페가 고개를 들어 부유섬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어.
우주라... 에토와 루나, 이런 이름을 지닌 우리니까, 나도 우주에는 항상 관심이 많았어.
언젠가 하늘에서 떨어지던 붉은색 혜성과 검은색 혜성...
그 혜성들의 정체, 그리고 하늘이 갑자기 변한 이유를 알아낼 날이 올까?
"...언젠가는 우리 모두 이 세상을 이해할 날이 올지도 모르죠." 내가 말했어.
"우리요? 에토 씨랑 제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어.
"우리 모두요.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점점 가까워지는 항구를 눈에 담으며, 호페가 순수하고 멋진 미소를 내게 지어보였어.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그럼 정말 좋겠네요."
호페가 별안간 물었어.
나는 한 번 웃은 뒤 대답했지.
"실례 맞네요! 네, 저 부유섬 출신 맞아요. 친구분 찾으면 함께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제가 잘 얘기할게요."
나는 호페와 함께 섬으로 향하는 우주선을 타러 가고 있었어. 굳이 걸어가는 이유는...
이 세계, 아쿠아에서는 항상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었거든. 지금은 일거수일투족을 다투는 상황이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들켜서 난리를 피우는 일은 피하고 싶었거든.
또 다른 이유는, 사실 주된 이유는, 아직도 아쿠아의 풍경이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야.
미소가 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어. 호페는 그걸 알아차리고 궁금해졌는지 내게 또 질문을 던졌어.
"여기엔 무슨 일로 내려오셨어요? 뭔가... 할 일이 있었다든지?"
음...
"나"는 뭔가 설문조사 같은 걸 하러 내려온 것 같기도 하지만...
뭐, 너나 나나 정해진 이야기 따라가는 건 싫어하지 않니.
"관광하러 왔어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어.
"그건 의외네요. 부유섬 사람들은 자기에 동네가 너무 좋아서 지상은 거들떠도 안 보는 줄 알았어요.
안 그러면 뭐하러 그렇게 높은 곳에 살겠어요?"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니까요. 제 쌍둥이 동생조차 저랑은 한참 성격이 다른 걸요."
"우와...! 쌍둥이... 쌍둥이는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있다든가...
아니면 서로를 향해 아주 강한 공감력이 발휘된다든가... 그거 진짜예요?"
"...재밌는 걸 알고 계시네요. 음... 어느정도는 진짜라고 할 수 있어요."
"너무 신기하네요..."
흐으으음... 갑자기 호페를 살짝 놀려보고 싶어졌어...!
"사실... 제 동생 루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 지금 당장 다 알 수 있어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그렇게 말하니까, 호페가 화들짝 놀라더라. 정말 몸이 붕 뜰 정도로.
"정말요?!" 호페가 허억 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입으로 가져갔어.
"네, 푸른 하늘이 보여요. 거대한 도시와 무한히 뻗어나가는 수평선이..."
"부유섬에서 보는 풍경 아니에요?!"
"네, 맞아요...! 부유섬에 있는 루나의 모습이 보여요!" 물론 거짓말이지.
"세상에, 호페씨의 친구분과 함께 있네요!"
"정말요?! 제 친구가 무례하게 굴고 있진 않나요?!"
그 말을 듣고 풉 하고 빠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어. 거의 넘어질 뻔 했다니까.
"하하하... 아뇨, 루나가 훨씬 무례하거든요."
(미안해, 루나야. 예의 차리려다가 널 욕해버렸네.)
호페는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다행이다... 아! 동생분이 무례하다는 게 다행이란 게 아니라..."
어음, 루나야, 혹시 몰라서 다시 말하는데, 네가 무례하다는 건 거짓말이니까, 알지?
그나저나...
너는 이 기억에 입장하면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가진 정보로 판단했을 때 호페는 여기서 "엘리트"로 불리는 부류의 사람인 것 같아.
너도 그 재수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가 엘리트라고 곧잘 말하곤 하지만...
여기 아쿠아에서는 "엘리트"란 꽤 무게를 지닌 단어인 것 같아.
엘리트가 맞냐고 물어보려다가, 다른 질문으로 바꿔 물어봤어.
"질문을 자주 하시네요."
"배워야 할 게 많으니까요. 세상은... 정말로 넓은 곳이잖아요."
"알아요. 저도 굉장히 넓은 세상에 살다 왔거든요."
"음...? 아쿠아 출신이 아니셨나요?"
"아... 맞다. 그랬죠, 참. 하하하!" 실수할 뻔 했어. 얘랑 얘기하고 있으면 너무 안심이 돼서...
"세상이 넓다는 건, 이 행성만을 말한 게 아니에요."
호페가 고개를 들어 부유섬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어.
우주라... 에토와 루나, 이런 이름을 지닌 우리니까, 나도 우주에는 항상 관심이 많았어.
언젠가 하늘에서 떨어지던 붉은색 혜성과 검은색 혜성...
그 혜성들의 정체, 그리고 하늘이 갑자기 변한 이유를 알아낼 날이 올까?
"...언젠가는 우리 모두 이 세상을 이해할 날이 올지도 모르죠." 내가 말했어.
"우리요? 에토 씨랑 제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어.
"우리 모두요.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점점 가까워지는 항구를 눈에 담으며, 호페가 순수하고 멋진 미소를 내게 지어보였어.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그럼 정말 좋겠네요."
====# 19-6 #====
우리 고향에는 축제라는 게 있던가?
꽃과 춤, 하늘을 수놓는 빛... 많은 게 기억나지만, 축제가 있었는 지는 기억나지 않아. 적어도 더이상은.
"망각했다"든지, 그런 심각한 건 아니야.
그냥 기억을 못할 뿐이지. 고향에서 지낸 시간보다 아르케아에서 지낸 시간이 훨씬 기니까...
음...
그건 그렇고, 에토 언니, 서머 페스티벌은 최고였어.
팥빙수도 처음 먹어봤고, 내가 지어낸 놀이가 아닌 진짜 놀이를 한 것도 처음이었어.
아이스크림이나 수박은 처음 먹어본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너무 맛있었어.
그리고 부유섬의 끝자락에 서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바쁜 도시와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풍경은....
정말 놀라웠어...!
자기도 부유섬에는 처음 와보면서, 이로는 전문가인양 나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어.
그런데... 고맙단 말을 못했네... 고마워, 이로야.
그런데, 이로는 그다지 즐기지 못한 낌새였어... 특히 하루가 끝날 때 쯤에는 말이야.
화물칸에서 나올때는 그렇게 신이 나서는 페스티벌 회장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로의 얼굴에서 미소가 옅어졌어.
솜사탕을 밀어넣기 전까지는 입이 쭉 삐져나오기까지 했다니까!
이로에게 뭐가 마음에 안 드냐고 묻자, 자기 친구 호페가 같이 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어.
호페가 친구보다 부유섬 입장 티켓을 더 중요시한게 화가 난다고...
보아하니 둘이 싸운 모양이야. 나랑 언니는 절대 싸우는 일이 없으니, 이해는 할 수 없었어.
내려가면 여기서 겪은 일을 왕창 자랑해버리라고 조언해줬지. 그닥 좋은 조언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래도 언니, 나는 이로의 곁을 꼭 지켰어.
그런데… 해가 수평선에서 뉘엿거릴 쯤, 부유섬에서 내려갈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지 뭐야.
====# 19-7 #====
이로는 너랑 많이 닮은 모양이구나, 루나야.
바보지만, 그래서 귀여워. 그 애랑 호페가 왜 친구인지 알 것 같아.
있지... 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마자 호페는 부유섬을 향해 올라가는 시간 내내 이로에 대해 말을 멈추지 않았어.
항구에 도착할 떄 쯤 잔뜩 긴장해있었지만 내가 정말로 부유섬 주민이라는 걸 증명하니까,
안도하며 같이 데려가줘서 고맙다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어.
그리고 대화 중에 친구 이야기를 하니, "이로!" "이로는요..." "그, 이로는 있잖아요..." 라며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어.
좋은 이야기만 있었던 건 아니야. 불평 불만도 섞여있었지.
"미안해요. 불평만 늘어놓고 있어서..."라고 하길래 나는 얼마든 불평해도 괜찮다고 대답해줬지.
우리 호페, 귀여워라.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이길래 몰래 기분을 북돋아주려고 이로는 어떤 장소를 좋아하는 지 물었어.
강을 좋아한다더라. 만약 이로가 정말 부유섬에 있는 거라면, 아마도 강변에 있을 거라고.
"벌써 잊었어요? 이로는 정말로 부유섬에 루나와 함께 있다니까요." 내가 말했어.
"어... 그거 농담 아니었어요?"
"농담일리가!"
농담 맞았어. 하지만 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지.
호페는 내 말을 믿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런데, 부유섬이 가까워지자 점점 내 열쇠가 빛나기 시작했어. 네 것도 그랬니?
루나야, 너와는 정말 부유섬에서 만날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어.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또다른 이야기 속에서는...
운명을, [ruby(뒤집을, ruby=Rotaeno)] 수 있을 지도 모르지.
====# 19-8 #====
해가 넘어가고 있었어. 부유섬에는 꽤 오랫동안 갇혀있었어...
페스티벌은 끝난 지 오래였고.
이로가 울기 시작했어. 무슨 말을 해줘야 할 지 모르겠더라.
나한테서 도망가기까지 했다니까!
공원을 지나 강변까지 쫓아갔어. 거기 주저앉아서 울고 있더라.
그 옆에 앉아 등을 토닥여줬어. 절로 표정이 구겨졌어.
내가 이럴 때 언니는 어떻게 했나 몰라.
음... 맞아, 노래를 불러주곤 했지. 나는 천천히 자장가를 불렀어.
좋아할지는 몰랐지만...
울음을 조금은 그친 것도 같았어.
주홍빛 석양, 강이 흐르는 소리...
허리춤에 찬 열쇠가 부드럽게 빛나기 시작했어.
다 괜찮을 거라며 이로를 위로하면서, 나는 언니를 기다렸어.
그 날, 무언가 달랐지?
맞아. 그 날은 달랐어. 우리가 열쇠검을 들이대던 평소의 기억들과는 달랐어.
뭐가 달랐지?
알고 있어?
내가 안다는 말은 안했어. 너한테 묻는 거지.
왜 묻냐면... 그 기억 속에선 평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거든.
시시한 장난이 아닌,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이...
그래, 원본 기억은 그렇지 않았어.
분명... 기적이 일어났던 거야.
에토 언니... 언니가 데려온 호페와 내 곁에 있던 이로가 서로에게 달려가 부둥켜안자,
언니는 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고 있었지...
그 때 눈치 챘어.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구나!
대체 그게 뭔지 묻고 싶었지만,
언니가 내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선 어깨에 팔을 두르고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말하는 거 있지.
"기적은 일어나는구나."
난 언니 미간에 딱밤을 넣었어.
"감사합니다!"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호페가 말했어.
"너는 누구니?!"
이로가 언니 쪽을 보며 물었어.
이로의 눈도 그렁그렁했는데, 도대체 얘가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기쁜 건지 모르겠더라.
언니가 "정체불명의 히어로입니다."라고 대답했을 땐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었어.
"내 쌍둥이 언니, 에토 언니야." 내가 말했어.
"쌍둥이가 있었어?!" 이로가 큰 소리로 외쳤어. 목청이 어찌나 큰 지 움찔해버렸어.
"왜 말을 안해줬어?! 너 엄청 노래 잘 부르기도 하고 둘이서 아이돌 하면 되겠다! 듀오 아이돌! 쌍둥이 아이돌!"
"이로야, 실례잖니..." 호페가 귓띔했어.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어. 거울을 안 봐도 얼굴이 새빨개진 걸 알아. 왜냐면...
"너 얘한테 노래 불러줬니?!"
...언니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으니까.
마침내 다들 진정하자...
호페가 고개를 숙였어. 이로는 온 힘을 다해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지.
서로 작별인사를 나누는 내내 언니는 내 옆구리를 마구 찔렀어. 쏘아봐도 멈추질 않았지.
이제서야 생각난건데, 내기에서 이겼다고 자랑할 기회를 놓쳐버렸네...
우리는 새로운 두 친구를 뒤로 하고 길을 떠났어.
그리고, 무너져내리는 카드탑처럼, 주변의 풍경이 사라지기 시작했지.
그렇게 우리는 공허로 돌아왔어.
그 무서운 장소로 돌아오고 나서, 나는 언니에게 물었어.
"언니... 기억 내용이 그렇게 막 바뀌거나 하진 않지?"
"그런가?" 언니는 그렇게 대답했어.
"잠깐... 아직 다 해결된 게 아니잖아. 호페는 티켓이 있으면서도... 아, 그리고 이로는..."
"괜찮아. 손을 써놨으니까."
"무슨 말이야?"
"다 그런게 있어. 하하하!"
"에휴... 아무튼, 그건 기억일 뿐이었으니까, 어찌 되든 아무 상관 없는 거잖아, 그치?"
"음... 그럴까?"
"언니 진짜 싫어."
언니는 그러면서 웃었어. 그리고 또 웃고, 또 웃고... 또 웃고, 안도하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지.
걸리는게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얘기해도 되는데.
아니... 그냥, 됐다.
나한테까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 고생을 하면서 다시 합류했는데 괜히 안 좋은 이야기를 꺼내서 뭐 해, 그치?
그리고... 결국 우리가 다시 만났으니까, 모든 사정을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안심이 됐어.
언니는 갑자기 내 손을 잡더리 뒷걸음으로 총총 뛰어가며 나를 잡아당겼어.
"으악! 뭐, 뭐야...! 그만 좀 당겨!"
그리고 언니는 웃으며, 가장 찬란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지.
"가자. 돌아가자. [ruby(빛, ruby=아르케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