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一五事变 |
July 15 Incident |
7월 15일 이전 왕자오밍 |
1. 개요
7.15 사건(七一五事变)은 1927년 7월 15일, 중국 국민당의 우한 정부가 중국 공산당과의 제1차 국공합작을 공식적으로 결렬시키고 공산당 세력을 탄압한 사건이다. 중국공산당에서는 7.15 반혁명 쿠데타라고 부른다.2. 배경
2.1. 4.12 상하이 쿠데타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우한은 국공합작의 고립된 섬이 되었다. 이때,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한 우한 국민정부 역시 점차 공개적으로 반공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우한 지역에서는 노동자와 농민 운동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국공 양당의 주요 갈등으로 떠올랐다. 상황은 점점 위급해졌으나,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소련 중앙당, 소련 고문단 등은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이들은 왕징웨이 등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양보 정책을 시행했으나, 이는 오히려 반공세력의 기세를 키웠다.2.2. 마일사변
5월 17일, 우한 국민정부가 관할하던 4개 군의 지휘관들은 우창(武昌)에서 반공 비밀회의를 열었다. 의창에 주둔하던 국민혁명군 14독립사단장 하두인(夏斗寅 샤둬인)이 우한을 공격했다. 21일, 국민당 제35군 군장 허젠(何鍵)이 속한 쉬커샹(許克祥) 부대가 창사에서 반란을 일으켜 후난의 혁명 단체를 폐쇄하고 노동자와 농민 무장을 해제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했다.3. 전개
중국공산당이 위기에 처한 이때, 국제공산주의는 5월에 제8차 집행위원회를 열고 중국 문제에 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장제스를 폭로하고 국민당 우파를 고립시키며 국민당 기구를 개조하고 군대를 조직하고 업무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6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국제공산주의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국제공산주의에서 파견되어 국민정부 고문을 맡았던 바오로팅(鮑羅廷)은 이 지시를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럽다"고 여겨 "잠정 보류"했다. 천두슈(陳獨秀)는 국제공산주의의 지시를 중앙에 전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왕징웨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의 신뢰를 표명하고 지시문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왕징웨이는 이를 구실로 삼아 본격적으로 반공 활동을 계획하기 시작했다.6월 5일, 천두슈는 바오로팅을 국민정부 최고 고문직에서 해임했다. 6월 6일, 주페이더(朱培德)는 왕징웨이의 지시에 따라 장시에서 공산당을 축출했다. 6월 10일, 왕징웨이, 쑨커(孫科), 탕성즈(唐生智), 펑위샹(馮玉祥) 등은 정저우(鄭州)에서 회의를 열어 펑위샹이 북쪽을 수비하고 북벌군 탕성즈 부대를 후방으로 돌려 샹, 어 두 성의 노동자와 농민 운동을 탄압하도록 결정했다.
7월 초, 코민테른은 천두슈의 우경 타협을 강하게 비판하며 그의 중공 중앙직을 해임하고 중앙을 개편했다. 7월 13일, 새롭게 구성된 중공 중앙은 선언문을 발표하며 우한 국민당 중앙과 국민정부가 “최근 공공연히 쿠데타를 준비하며 중국 민중의 대다수 이익과 쑨원의 근본주의 및 정책을 반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7월 14일, 우한 국민당 중앙 정치위원회 주석단은 비밀 회의를 소집해 왕징웨이가 제안한 ‘분공’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에 쑹칭링은 우한 국민정부에서 탈퇴해 왕징웨이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1927년 7월 15일, 왕징웨이 등이 장악한 우한 국민당 중앙은 '분공' 회의를 소집한다. 왕징웨이는 회의에서 '분공' 보고서를 발표하며 코민테른과 공산당을 비판하며 “국민당을 파괴하려는 음모”라고 주장했고 최종적으로 공산당과 결별하기로 결의했다. 며칠 뒤, 대규모 체포와 학살이 시작되었고, “천 명을 억울하게 죽여도 한 명도 놓치지 않겠다”라며 우한 지역에서 수많은 공산당원과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며 제1차 국공합작이 완전히 붕괴되게 된다.
장제스에 이어, 표면적으로는 ‘연소용공(소련과 협력하고 공산당을 포용)’을 지지하던 왕징웨이마저 반공의 칼을 빼들며 영한합류로 이어지게 되고 이는 난창 봉기를 촉발하게 된다.
4. 결과
중국 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 보고서에 따르면, 1927년 3월부터 1928년 상반기까지 공산당원과 혁명 군중 약 31만 명이 살해되었고, 그중 공산당원은 2만 6천여 명에 달했다. 공산당의 내부 사상은 혼란스러웠고, 일부 당원와 불안정한 이탈자들이 당의 대열을 떠나면서 당원 수는 급격히 1만 명대로 줄어들었다. 동시에 노동자와 농민 운동은 침체되었고, 상당수 중간 인사들이 공산당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국공결렬이 발생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서고 공산당은 난창 봉기를 일으켰다. 공산당은 8.7 긴급회의를 열어 추수폭동을 발생시키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