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ee8aa><colcolor=#000> 히밀코 Himilco | Chimilkâ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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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미상 | |
사망 | 기원전 212년 |
시칠리아 아그리젠토 | |
국적 | 카르타고 |
가족 | 미상 |
지위 | 카르타고 시칠리아 원정군 지휘관 |
참전 전쟁 | 제2차 포에니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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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카르트 하다쉬트(카르타고)의 장군. 시라쿠사를 구원하고자 시칠리아 섬에 파견된 카르타고군 사령관으로, 우유부단한 행보로 일관하다가 시라쿠사의 패망을 막지 못했다.2. 행적
기원전 214년, 시라쿠사는 로마와 동맹을 끊고 카르타고와 손잡기로 결의했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시라쿠라로부터 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자 히밀코에게 병력을 맡겼고, 그는 기원전 213년경 군대를 이끌고 헤라클레아 미노아에 상륙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당시 그가 이끌고 온 카르타고군은 25,000명의 보병, 3,000명의 기병, 12마리의 코끼리였다고 한다. 그는 아그리젠토의 항복을 받아낸 뒤 시라쿠사로 진군해, 도시에서 약 12km 떨어진 아나포 강 근처에 숙영지를 세웠다. 한편 카르타고 해군 사령관 보밀카르도 55척의 카르타고 함대를 이끌고 시라쿠사 항구 앞에 도착했다.당시 시라쿠사를 포위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군대는 초기엔 2~3만 가량이었지만, 시라쿠사 공방전에서 아르키메데스가 개발한 신무기로 인해 막심한 손실을 입었다. 만약 그와 보밀카르가 시라쿠사 수비대와 함께 로마군을 협공한다면 충분히 승산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적의 진영을 살펴본 뒤 쉽게 뚫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끝내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마르켈루스와 합류하러 오는 로마군을 공격하려 했지만, 로마군이 해안 도로로 진군하는 동안 내륙 산간 길에서 헤매는 바람에 놓쳐버렸다.
추가 병력이 마르켈루스와 합류하자, 그는 병력을 철수시킨 뒤 로마에 복종하는 이웃 도시들을 공략하기로 했다. 카르타고군이 무르간티아의 항복을 받아내어 많은 양의 곡식과 모든 종류의 보급품을 확보하자, 여러 도시가 뒤따라 로마 수비대를 추방하거나 제압하여 카르타고군에 귀순했다. 에나 시에 주둔하고 있던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휘하 로마 수비대는 시민들이 자신들을 카르타고군에게 넘겨주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 야밤에 시민들을 습격하여 학살을 자행한 뒤 마르켈루스와 합류했다. 시칠리아인들은 이 학살에 분노하여 카르타고 편에 대거 가담했지만, 정작 히밀코는 여전히 싸우길 주저하며 아그리겐툼으로 돌아갔다.
기원전 212년 시라쿠사 시가 끝내 공략당하고 수비대가 오르티야와 아카디나 등 내부 성채에서 농성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급히 시라쿠사를 구하러 출정했지만 마르켈루스의 역공으로 격파되었고, 뒤이은 전염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카르타고군과 함께 있던 히포크라테스 역시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에피키데스는 8개월간 내부 성채에서 항전하다가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시라쿠사를 버리고 카르타고로 망명했다. 결국 수비대가 최종적으로 항복하면서, 시라쿠사는 2년간의 공성전 끝에 로마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히밀코를 대신하여 시칠리아 방면 카르타고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한노 역시 한니발 바르카가 파견한 유능한 장군 무티네스를 시기해 온갖 훼방을 놓다가 로마군에게 투항하게 만드는 등 무능한 행보로 일관하다가, 기원전 210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최종적으로 축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