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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42:06

히라시마

1. 개요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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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平島

일본의 성씨. 무로마치 막부 쇼군 가문 아시카가의 후예로 유명하다.

2. 역사

시조는 제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동생이자 제1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데의 아버지인[1] 아시카가 요시츠나(足利義維, 1509~1573).[2] 요시츠나는 사카이 쿠보를 자칭했으나 형인 요시하루와의 항쟁 끝에 패배하여 아와로 추방당했다. 이 후 에이로쿠의 변으로 형 요시하루의 아들 요시테루가 시해된 뒤 키나이에 복귀, 아들인 요시히데가 쇼군이 되었지만 직후 요시테루의 동생 요시아키를 옹립한 제육천대마왕 오다 노부나가 상락군에 맞서 고전 끝에 요시츠나 일족은 다시 키나이에서 아와로 쫓겨가듯 돌아갔다.

무로마치 막부의 멸망 이후 요시츠나의 차남이자 요시히데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스케(足利義助, 1541~1592)는 조소카베 모토치카에 의해 영지를 온존받았으나, 모토치카가 도요토미에 항복하면서 아와의 주인이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로 바뀐 이후로 상당수의 영지를 가이에키당하고, 봉록이 100석 언저리까지 줄어들었다. 그나마 하치스카 가문이 지원을 해주어서 굶지는 않았다(...). 요시스케의 손자 아시카가 요시츠구(足利義次, 1596~1680)때부터 아시카가 성을 히라시마로 고쳤고, 에도 시대에 들어오면서 봉록은 1,200석에 살짝 못 미칠 정도로 늘어나기는 했다.

그렇게 하치스카 가문 치하의 토쿠시마 번에서 대를 이어오다가, 19세기 초인 1805년(분카 2년), 당시 히라시마 가문의 당주였던 요시모토(義根, 1747~1826)는 봉록을 늘려 달라는 처우 개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토쿠시마 번을 탈번, 낭인이 되어 교토로 이주하고, 이주 후에 아시카가 성으로 원복했다. 그리고 요시모토 사후 당주가 된 요시모토의 친조카 아시카가 요시토시(足利義俊, 1795~1876)는 메이지 유신 이후 대다수의 쿠게( 공경)와 다이묘들이 화족의 신분을 얻을 때 아시카가 쇼군가의 정통 후손임을 내세우며[3] 그 자신도 화족의 신분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재력이 없었던데다가(...)[4] 요시모토의 탈번 전력이 문제가 되어 사족의 신분조차 얻지 못한 채 기각되었고, 결국 교토의 시골로 귀농하여 평민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히라미사계 아시카가 당주였었던 아시카가 요시히로(足利義弘, ?~2021)는 전술한 아시카가 요시토시의 현손으로, 아시카가씨 종친회 특별 고문을 맡고 있었다. 이후 2021년 12월에 요시히로가 타계하면서 그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徳)가 현재 히라시마계 아시카가 당주를 맡고 있다.

[1] 요시테루, 요시아키 형제에게는 숙부. 따라서 요시히데는 요시테루, 요시카키 형제에게 사촌형제다. [2] 호소카와 하루모토, 야나기가와 카타하루, 미요시 모토나가 등에 의해 쇼군격으로 올려졌으나 공식적인 쇼군이 되지는 못했다. [3] 다른 아시카가씨의 지류인 키츠레카와씨보다 아시카가씨의 종가인 아시카가 쇼군가에 더 가까웠다. [4] 화족의 신분을 얻는 데에는 가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재력도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 당시 아무리 귀한 가문이라도 가난하면 남작 작위도 얻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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