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BE0D><colcolor=#670000> 회안백 | 淮安伯
왕기 | 王沂 |
|
시호 | 회안백(淮安伯) |
작위 | 수사공(守司空) |
직위 | 검교사도(檢校司徒) |
본관 | 개성 왕씨 |
휘 | 기(沂) |
부모 |
부친
진한공 왕유 모친 진한공비(辰韓公妃) → 화신공비(和信公妃)로 추정 |
형제자매 | |
배우자 | 대령궁주(大寧宮主) 왕씨[1] |
생몰연도 | ? ~ 1126년( 인종 24년) 2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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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왕족.본명은 왕기(王沂), 작위는 회안백(淮安伯)이다.
2. 생애
문종의 손자로, 진한공 왕유의 아들이다. 사촌인 예종으로부터 검교상서우복야 주국(檢校尙書右僕射 柱國)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 검교사공檢校司空)으로 승진한다. 숙종의 딸인 대령공주(大寧公主)와 혼인해, 예종 4년인 1109년 12월 검교사도 수사공 회안백(檢校司徒 守司空 淮安伯)에 책봉된다. 식읍 2천호 식실봉 3백호가 더해졌으며, 찬화공신(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러나 예종 9년인 1114년 아내인 공주와는 얼마 안 가 사별하게 된다.이후 회안백 왕기는 음양술을(陰陽術) 익힌 급제(及第) 최도원(崔道元), 그리고 행실이 경박한 진사(進士) 백사윤(白思允), 승지(承旨) 권사도(權思道)와 오세영(吳世英) 등과 어울리곤 했다. 회안백 왕기가 최도원과 함께 산사에서 초재(醮齋)를 베풀었다는 소문이 조정에 들리기 시작한다. 초재는 도교 의식으로 중국에서는 국가에서 진행했으며, 고려에서도 예종 시기에 설치된 복원궁(福源宮)을 시작으로 국가 기관에서만 지내는 행사였다. 예종은 최도원 등이 다른 마음을 품었을거라 의심해 국문을 가한다. 피의자들이 끝내 승복하지 않았으나 예종 12년인 1117년 회안백 왕기을 포함한 연루자 모두는 유배형을 당한다.
하지만 유배됐던 회안백 왕기는 곧 다시 소환됐고, 인종 24년인 1126년 2월 21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