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인서 터 |
1. 개요
활인서( 活 人 署)는 조선의 국가 의료기관이다.2. 설명
기원은 고려 초기부터 있었던 대비원(大悲院)에서 유래했다. 대비라는 말은 불교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후 조선을 세운 후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정책을 계승해서 동ㆍ서 대비원을 두어 병자와 빈민을 구휼하게 했다. 이후 태종(조선)이 1414년에 불교적 요소를 없애기 위해 활인원으로 고쳤고, 세조는 활인서로 다시 개칭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동ㆍ서 대비원처럼 동ㆍ서 활인서를 두어 동활인서는 동소문(당시 홍화문, 후에 중종 때 혜화문) 밖에, 서활인서는 서소문(당시 소덕문, 영조 때 소의문) 밖에 두어 병자와 오갈데 없는 자들을 거두어 치료하고 옷과 음식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주 된 임무는 세종실록의 기록대로 환자와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거두어 치료하고 먹이는 의료기관 겸 복지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설치된 곳을 보면 알수 있듯이 어디까지나 한양 도성(부터 성저십리)안에 사는 병자와 오갈 데 없는 자들에게만 해당되었다. 지방에선 주로 글을 알고 자본이 있는 지역 양반들이 의술을 익혀 의술을 베풀었다.
비슷한 기관으로 혜민서가 있었는데 혜민서가 일반 서민의 치료기관이었다면 활인서는 그보다 더 못한 자들을 위한 치료 복지기관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다.
임진왜란 때 일시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기도 했으나 이후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고질적인 재정난때문에 1709년에는 혜민서와 통폐합되었다.
일각에서 1743년에 폐지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그렇지는 않고 이후에도 유지되다가 최종적으로 고종 19년인 1882년에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