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홍재학(洪在鶴) |
자 | 문숙(聞叔) |
본관 | 남양(南陽)[1] |
출생 | 1848년 (헌종 14) |
사망 | 1881년 (고종 18) |
1. 개요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파 유생2. 생애
위정척사파의 거두 이항로의 문인으로 김평묵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1880년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바치고 개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1881년 2월 이황의 후손 이만손을 대표로 하여 개화에 반대하는 전국의 유생들이 영남 만인소 를 올린다.
그해 5월 고종은 위정척사파들의 반발에 척사윤음을 선포하며 이들에게 동도서기론을 기반으로 서양의 물건은 받아들이겠지만 공맹정주의 나라에 사악한 서학(기독교)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천명한다.
홍재학은 고종의 윤음에 격분하여, 관동 대표로서 서울에 올라가서 상소문를 올린다. 그가 올린 척화 상소를 만언척사소라고 한다.
그의 상소문은 굉장히 장문인데 조정 정책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을 넘어서 고종이 내린 척사 윤음 표현을 말꼬리를 잡아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며, 내용상으로도 고종이 내린 서학 금지를 믿을수 없다는 투로 부정했다. 이는 아무리 조선시대 일개 촌부들이라도 상소를 올려 임금과 조정의 시책을 올리는것이 허용되고 언로를 넓히자는 취지로 상소 올리는 자를 처벌하는것은 자제했으나[2] 비판을 해도 군부(君父)에 대한 예의를 잃고 망언을 했기 때문에 잡혀서 처형당한다.
결국 1881년, 홍재학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형당하니, 이때 그의 나이 불과 33세였다.
3. 기타
참형 당하기 전, 사형장으로 가는 그의 수레를 붙잡고 통곡하는 가족들이랑 유생과 백성들에게 '내 이제 정의를 위하여 죽는데 왜들 우시오' 라고 하며 오히려 그들을 위로했다는 일화가 있다.처형후 묘비는 김평묵이 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