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홍사용 洪思容[1]|Hong Sa-y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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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6월 13일[2] |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용수골) (現 화성특례시 석우동 동탄신도시 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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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 |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 492번지 |
사망 | 1947년 1월 5일 (향년 48세) |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장남 홍규선의 집에서 사망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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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남양 홍씨(南陽 洪氏)[3] |
가족 | 아버지 홍철유, 어머니 능성 구씨,백부(양부) 홍승유, 백모(양모) 한산 이씨, 첫째 부인 원효순, 둘째 부인 황숙엽, 아들 홍규선, 홍문선, 딸 홍여선, 홍형애, 홍진선[4], 홍묘선[5] |
학력 | 휘문고등보통학교(휘문의숙)[6] (졸업) |
등단 | 1920년 문예지 《문우》에 시 「크다란 집의 찬 밤」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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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사용(洪思容, 음력 1900년 5월 17일~1947년 1월 7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 극작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다.호는 노작(露雀), 소아(笑亞), 백우(白牛)이다.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기도 수원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훗날 경기도 용인에서 성장하였으며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민족주의적 의식을 갖고 있던 낭만파 시인으로 평가된다. 극단 토월회와 산유화회에서 희곡 창작 활동도 하였다.
항일 시인으로 분류되는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등을 제외하면 일제강점기 후반에 대부분이라 할 만큼 많은 시인들이 친일 작품을 남기게 되는데, 홍사용은 이 시기에도 친일시를 창작하거나 친일 활동을 하지 않은 시인 중 한 명이다.
작품으로는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잘 알려져 있다.
1984년 5월 26일 홍사용의 고향에 있는 그의 무덤 옆에 시비가 세워졌다. 2001년에는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경기도 문학인과 화성시 문학인 인사들이 주도해 노작문학상이 만들어졌다.
2. 생애
2.1. 홍사용의 유년시절
노작 홍사용은 경기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아버지 홍철유와 어머니 능성 구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경기 용인 및 화성 일대에 많은 농토를 가진 지주였으므로 노작은 어린 시절을 남부럽지 않게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태어난 지 100일만에 무관학교 1기생에 합격한 부친을 따라 서울로 상경하였다.그가 9세 때 부친의 군대가 해산하고 백부 승유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본적지인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로 이사하였다. 그 뒤 부친이 그를 위해 만든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7세에 다시 홀로 상경,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2.2. 홍사용의 학창시절과 문학의 길
휘문의숙 재학시절 동기인 정백, 1년 후배인 박종화 등을 만나 문학수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그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고, 3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그 해 6월에 고향에 돌아온다.휘문의숙 재학시절 1년 후배인 박종화 등을 만나 문학수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그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고, 3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그 해 6월에 고향에 돌아온다. 고향에서 정백과 함께 현량개에 은신하면서 수필과 시를 쓰며 월탄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 홍사용은 재종형 홍사중을 설득해 ‘문화사’를 설립하고 문예지 《백조》와 사상지 《흑조》를 기획, 《백조》만 간행했으나 3호로 단명하고 말았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신극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3년 근대극 운동의 선구적 극단인 토월회에 가담해 문예부장직을 맡았고 직접 서양극 번역과 번안 그리고 연출도 했다. 1927년에는 박진, 이소연과 ‘산유화회’를 결성하고 1930년에는 홍해성, 최승일과 신흥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2.3. 홍사용의 꺾이지 않은 마지막 길
30세 무렵부터 5년간 홍사용은 미투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화류목 단장을 짚고 전국 곳곳을 방랑했다. 1932년 〔불교誌〕에 희곡「벙어리굿」을 발표, 1935년을 전후하여 세검정 근처에 자리 잡고 한의공부를 하여 한동안 한의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1939년 희곡 「김옥균전」을 쓰다가 일제의 검열로 붓을 꺾어버렸다. 그는 이 일로 주거 제한조치를 받기도 했다.이후 강경·전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모두 오래 가지 못했으며, 1944년에는 이화전문에 잠시 출강했다. 해방 후 근국청년단에 가입, 청년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7년 1월 5일 (음력 1946년 12월 14일) 폐환으로 별세했다.
3. 문예동인지 《백조》
3.1. 《백조》 1~3호 수록 작품
창간호(1922년 1월 간행)에는 노작(露雀, 홍사용)의 권두시 「백조(白潮)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비롯하여, 월탄(月灘, 박종화)의 시 「밀실로 도라가다」, 이상화의 시 「말세의 희탄」, 나도향의 소설 「젊은이의 시절」 등, 1922년 5월에 간행된 제2호에는 회월(懷月, 박영희)의 시 「꿈의 나라로」, 노작의 시 「봄은 가더이다」, 월탄의 시 「흑방비곡(黑房秘曲)」 등, 1923년 9월에 간행된 제3호에는 이상화의 시 「나의 침실로」, 노작의 시 「흐르는 물을 붙들고서」 「나는 왕이로소이다」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나도향의 소설 「여이발사」, 월탄의 소설 「목매이는 여자」 등의 주요 작품들이 실려 있다.이들 작품에는 3∙1운동의 실패에서 온 절망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애수와 한, 감상주의와 유미탐구의 경향이 뚜렷하다.
3.2. 근대 낭만주의 종합문예동인지
홍사중, 김덕기의 후원으로 1922년 1월 9일 순수문예동인지 《백조》의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편집은 홍사용이 맡았지만, 발행인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고자 외국인을 내세웠다. 1호는 배재학당의 교장직에 있었던 아펜젤러, 2호는 보이스 여사, 3호는 러시아에서 망명한 훼루훼로가 맡았다. 《백조》의 창간호에는 시, 소설뿐만 아니라, 수상류, 동화, 희곡 등도 함께 게재되었다. 의욕이 너무 강했던지 한 동인이 2∼3편의 작품을 한꺼번에 수록하면서 질적인 면에서 조금은 아쉬운 창간호였다. 2호는 이전 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구성이었으며, 작품을 이루는 의식, 사조, 경향 등은 창간호와 대체로 비슷했다. 1호와 2호가 모두 1922년 상반기에 출간된 것에 비해 3호는 1923년 9월에야 출간되는데, 순탄하지 못했던 출간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그런데도 《백조》의 3호가 지니는 보람은 이전 호에 비해 괄목할 만한 질적 향상을 이룬 작품을 상당수 수록한 데 있다. 대표적으로 소설 「할머니의 죽음」, 「목매이는 여자」, 「여이발사」,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의 침실로」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백조파에 대한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던 김기진의 와해 공작과 재정적 이유로 인해 《백조》는 3호를 끝으로 종간되고 만다.
3.3. 홍사용 시인의 위상
백조동인과 《백조》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노작 홍사용은 실제로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홍사용 시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문예동인지 《백조》 창간의 중심인물이었지만, 박종화, 현진건, 박영희, 이상화 등 여타 백조동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평가를 받았다. 시, 소설, 희곡, 수필에 걸쳐 이루어진 다양한 글쓰기 활동이 오히려 그를 한 가지 이미지로 선명하게 부각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대다수 낭만주의 시인이 외국 풍조에 휩쓸릴 때 민중의식이 스민 민요에 관심을 두고 민족적 서정성을 끝없이 탐구하고 형상화한 흔치 않은 시인이었다.홍사용이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가 한국의 낭만주의 문학을 이끌어온 백조동인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동인지 《백조》를 운영한 문예지 발간인이라는 데 있다. 또한 당시 문단에 횡행했던 맹목적인 서구 추수의 문학과는 달리 전통적인 맥락에서 시를 창작하고, 민족적인 이념을 시를 통해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동안, 백조동인의 시적 경향에 비추어 감상적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인물 혹은 현실을 떠난 주관적인 정열과 몽환적인 세계의 감상적인 경향으로 홍사용과 그의 문학을 평가하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최근 『정본 노작홍사용 문학전집』 발간, 《백조》와 홍사용 시인에 대한 다양한 연구 성과의 축적 등 노작 홍사용 문학이 정당하게 논의되고 섬세하게 조명되고 있어 다행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4. 토월회 활동
토월회는 1922년 2월 일본 유학생인 박승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전문 극단으로서, 신파극에 대항하여 본격적인 근대극 운동을 펼쳤다. 박승희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전문 연극인이 아니어서 합평회를 주로 하다가 대중의 의식을 계몽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분야가 연극이라고 의견을 모아 그해 조선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짐으로써 연극단체로 전환하였다. 해외 희곡을 번역해 연극으로 올리기도 하고 박승희의 창작 희곡을 공연하기도 하는 등, 활발하게 신극을 무대에 올렸다. 제2회 공연이 끝난 후 박승희를 제외한 창립회원들은 떠나게 되었고, 이후 박승희를 회장으로 하여 홍사용, 원우전, 정원택, 이백수가 각각 경리직책을 맡음으로써 명실상부 새로운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번역극을 계속 상연하고 다채로운 신극운동을 전개하며 어느정도 인기를 끌었지만 토월회의 경영난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1931년 해산하게 되었다.4.1. 토월회의 의미
토월회의 뜻은 ‘이상(理想)은 하늘(月)에 있고, 발은 땅(土)을 디딘다’ 는 회원 김기진의 제안으로 이름을 ‘토월회’라고 했다는 설이 있으며, 십일월(十一月)에 결성되었으므로 토월회라고 붙였다는 설도 있다. 평범한 가운데 현대미가 있는 회명(會名)을 짓기로 하여 처음 ‘신월회(新月會)’라 붙였으나, 현실(土)을 도외시하지 않고 이상(月)을 좇는다는 뜻으로 토월회라 고쳤다고 한다.4.2. 토월회와 홍사용
홍사용은 시, 수필, 소설 등에 관심을 보이며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연극활동, 희곡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연극인으로서도 큰 몫을 한 사람이다.1923년 극단 토월회가 창립공연을 위해 동경으로부터 귀국했을 때 그는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창립공연의 빚을 일부 갚아주면서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해 말 홍사용은 토월회의 문예부 책임자를 맡게 되었고, 1924년 1월 토월회 제3회 공연 때 「회색꿈」이라는 작품을 처음으로 번역하고 가끔 연출도 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당시의 희곡들이 관념적인 주제에 남녀 간의 애정, 가정불화 등을 다룬 것에 비해 그의 작품이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된 것은 희곡사에 선도적인 것이었다. 홍사용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아픔과 정한을 표출하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5. 홍사용 시인 작가 연보
- 1900년 1세 6월 13일 (음력 5월 17일)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용수골)에서 아버지 대한제국 육군헌병 부위였던 홍철유(洪哲裕)와 어머니 능성(稜城) 구씨(具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남, 본적지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 492번지. 생후 100여 일 후에 서울 재동으로 옮겨 유년기를 보냄, 그의 부친 홍철유와 백부 승유(升裕)는 용인 및 화성 일대에 많은 농토를 가졌던 지주였으므로 어려서 유족한 가정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음. 아호로는 노작(露雀), 소아(笑啞), 백우(白牛) 등이 있으나, 주로 노작을 많이 사용. 별명으로는 돌부처, 고고문사(枯高文士), 대리석, 고양이, 열두박사(아는 것이 많다는 뜻) 등.- 1907 8세 군대 해산으로 아버지와 함께 본적지인 석우리로 돌아와 휘문의숙에 입학할 때까지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
- 1908 9세 1881년 사망한 백부 홍승유의 양자로 들어갔다. 백모 한산(韓山) 이씨(李氏)를 양모로 모심.
- 1912 13세 두 살 위인 원효순(元孝順)과 결혼.
- 1916 17세 휘문의숙에 입학. 서울 의주로에서 하숙.
- 1918 19세 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 학우 정백(鄭栢), 월탄(月灘)과 함께 유인물 『피는 꽃』을 펴냄.
- 1919 20세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3·1운동 때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피체되었으나, 바로 풀려나와 6월에 낙향, 정백과 함께 고향에 은신하면서 합동 수필 「청산백운」과 시 「푸른 언덕 가으로」를 발표. 장남 규선(奎善) 출생.
- 1920 21세 다시 서울로 올라와 월탄, 정백 등과 함께 서광사(曙光社)에 관여하면서 동사에서 《문우》를 창간하고, 이 잡지에 「크다란 집의 찬 밤」을 발표.
- 1921 22세 재종형 사중(思仲)을 설득하여 문화사(文化社)를 설립, 문예지 《백조》와 사상지 《흑조》 창간을 준비. 시 「비 오는 밤」을 《동명》7호에 발표. 장녀 여선(女善) 출생
- 1922 23세 1월에 『백조』창간호 발행, 5월에 동지 2호 발행.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
- 1923 24세 「노래는 회색, 나는 또 울다」 첫머리에 시를 넣고 쓴 수필을 《동아일보》 1월 1일자에 발표. 5월에 극단 <토월회>에 참여하면서 1회 공연의 자금을 조달.
- 1924 25세 <土月會(토월회)>의 3회 공연 때부터 문예부장직을 맡으면서 본격적 연극 활동을 하는가 하면, 재정적인 지원도 하게 되었다. 직접 「회색의 꿈」을 연출, 창작 희곡 「산유화」를 씀.
- 1925 26세 《개벽》 61호(7월)에 소설 「봉화가 켜질 때에」를 발표. 9월 이광수(李光洙)의 「개척자」, 「재생」, 「무정」 등을 각색하여 연출.
- 1927 28세 2월 박진(朴珍), 이소연(李素然) 등과 함께 극단 <산유화회>를 조직. 7월 희곡 「향토심」과 번역 작품 「소나기」를 연출. 차녀 형애(馨愛) 출생.
- 1928 29세 5월 《별건곤》 12~3호에 평문 「조선은 메나리 나라」를 위시하여 《여시》와 《불교》지에 희곡 「할미꽃」,「흰 젖」, 수필 「귀향」 등을 발표 불교사 주최 음력 5월 8일의 경축 공연에서 희곡 「출가」공연. 희곡 「벙어리굿」을 썼으나, 초교에서 검열에 걸려 전문 삭제 당함. 「5남매」를 번안 연출.
- 1929 30세 우석 박진 집에 기거, 각혈과 방랑생활이 시작됨. 희곡 「제석」을 《불교》 56호에 발표.
- 1933 34세 《신조선》, 《월간매신》지에 시조 「한선」과 민요조시 「월병」을 발표
- 1934 35세 삼녀 진선(軫善)이 둘째 부인 황숙엽(黃淑燁)과의 사이에서 출생.
- 1935 36세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에서 한방의학을 공부하여,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
- 1936 37세 1월 「명성이 빛날 시」예천좌 공연. 9월 산문 「백조시대에 남긴 여화」를 《조광》 11호에 발표.
- 1938 39세 부인 원씨와 장남이 화성에서 서울 마포구 공덕동으로 이사.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사녀 묘선(昻善) 출생.
- 1939 40세 희곡 「김옥균전」을 썼으나,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주거까지 제한을 받게 됨. 그 후 절필. 차남 문선(文善) 출생.
- 1940 41세 강경, 전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음. 사찰순례 및 불경연구를 함.
- 1945 46세 8·15 해방과 함께 근국청년단 운동에 참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1947 48세 1월 5일(음력 1946년 12월 14일), 폐환으로 마포구 공덕동 장남 집에서 사망. 유해는 고향인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 묵실에 묻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