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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00:46:11

혼인보 산사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本因坊算砂
( 1559년 ~ 1623년 5월 16일)

전국시대 에도 시대 바둑 기사.

혼인보의 시조이자 작코지의 2대 지주, 작코지의 개조 니치렌의 조카, 카노우 쇼스케(加納與助)의 아들.

교토 출생으로 법명은 닛카이(日海).

2. 생애

부가쿠(舞楽)를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불문에 들어가 작코지에서 승려 생활을 하면서도 취미로 바둑을 시작했지만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다 노부나가가 명성을 듣고 초대해 5점에 접바둑을 두었지만 이기지 못하자 산사를 두고 명인이라 칭하면서 바둑계에서 명인이라는 칭호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노부나가가 카시오리 켄을 불러 산사와 대국시켰고 대국에서 3패가 발생하자 노부나가는 3패를 대국에서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처리하는지 묻자 산사는 무승부라고 했으며, 이것이 3패가 발생할 때 양 대국자가 그 패를 포기하지 않으면 무승부라는 것의 시작이라고 전해진다.

노부나가가 진기한 것을 구경했다며 기뻐했고 산사는 켄과 함께 더 후하게 대접받았으며, 산사가 집에 돌아간지 얼마 안되어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3패는 불길한 일이 생길 징조라고 여겼다. 명인 이야기나 3패에 관한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창작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켄과 대국한 기보는 남아있으나 3패는 나오지 않았다.

노부나가에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고 1588년에 산사는 바둑대회에서 우승해 쌀 20석, 가솔 10인을 하사받아 히데요시의 바둑 스승이 되었고 5점으로 대국했다. 히데요시 사후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았으며, 이에야스의 바둑 스승이 되어 5점으로 대국했다. 1603년에 이에야스와 함께 에도로 이주했다.

작코지의 지주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혼인보를 씨명으로 했지만, 처를 두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종파의 계율에 따라 제자 중 기량이 뛰어난 사람을 양자로 삼아 혼인보의 이름을 물려주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산사는 고도코로에 임명되어 바둑계를 총괄하는 업무를 담당했으며, 1623년에도 사망했고 그의 기보는 20여 개가 전해지고 있다.

3.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