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ăng Chủ tịch Hồ Chí Minh(陵主席胡志明)
1. 개요
베트남의 국부이자 혁명가 호찌민의 영묘. 내부에는 엠버밍 처리된 호찌민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현재는 하노이와 베트남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들 중 하나.2. 상세
호찌민 주석릉이 위치한 바딘 광장은 호찌민이 1945년 9월 2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역사적인 장소다. 1969년 호찌민이 사망한 이후, 베트남 공산당은 그를 위해 거대한 영묘를 헌정하기로 결의하고[1] 1973년 9월 2일 주석릉 기공식을 치렀다. 약 2년 간의 공사 끝에 1975년 8월 28일 영묘가 완공되었으며 그 이래 엠버밍 방부처리된 호찌민의 시신을 고이 안치하게 된다.주석릉 자체는 소련의 레닌 영묘를 본뜨고 베트남식 건축 양식을 섞어서 만들었다. 외관은 회색 화강암으로 지었고 내부는 윤이 나는 회색, 검은색, 붉은색 화강암으로 꾸몄다. 정면 위쪽 상인방에는 'Chủ tịch Hồ-Chí-Minh', 즉 '호찌민 주석'이 새겨졌다. 주석릉 양쪽을 보면 두 개의 거대한 배너에 큼직하게 글자들이 박혀 있는데, 둘다 'Nước Cộng Hòa Xã Hội Chủ Nghĩa Việt Nam Muôn Năm' 즉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라는 뜻이다.
주석릉의 높이는 21.6m, 너비는 41.2m다. 양편에 7단의 계단식 단상이 세워져 있어서 바딘 광장에서 치러지는 열병식이나 행사 등을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영묘를 둘러싼 화단에는 베트남 전역에서 수집해온 거의 250여 개에 달하는 꽃과 식물들이 촘촘히 심겨 있다.
묘소 내부는 흰색 정복을 차려입은 베트남 군사경찰이 경호를 서고 있다. 잡담은 당연히 금지며 모자도 벗게하는 등 외국인 관광인에게도 비교적 높은 격식을 요구한다. 구경오러 온 사람들을 줄을 세워 끊임없이 약간 빠른 속도로 움직이게 시키기 때문에 멈춰서서 느긋하게 관람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묘소 내부를 한 번 휙 둘러보고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봤자 2~3분 이내.[2] 내부 촬영은 원칙적으로는 금지지만 플래시를 끈 매너모드 상태의 스마트폰과 소형 카메라 정도는 반입이 가능하다.[3]
엠버밍 처리된 호찌민의 시신. 일반인들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는 없고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만 참배가 가능하다.
관람 시간이 되면 군사경찰들이 줄 선 사람들을 이끌어 영묘 내부로 들어가게 한다. 붉은 문을 통과하면 양 갈래 길이 나오는데, 이 중 왼쪽 통로로 들어간 후 계단을 올라 몇 번 방향을 틀면 호찌민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영안실이 나온다. 내부는 시신 보존 처리를 위해 은근히 추운 편. 유리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시신은 공산당기에 덮인 채 약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으며, 그 주위를 6명의 군사경찰들이 호위하고 있다. 호찌민의 시신을 대강 둘러본 뒤 뒷사람에 떠밀려서 나오면 들어간 입구로 다시 나올 수 있다.[4] 그 이후부터는 광장을 둘러보거나 영묘 뒷편의 호찌민 관저, 베트남 주석궁, 한기둥 사원 등을 자유롭게 관람하면 된다.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시키고,
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한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 호찌민의 유언 중 일부. 이 중 나무를 심는 부분의 유언만 이루어졌다. 영묘 방문객은 나무 한 그루씩 심는 것을 지키고 있다고.
- 호찌민의 유언 중 일부. 이 중 나무를 심는 부분의 유언만 이루어졌다. 영묘 방문객은 나무 한 그루씩 심는 것을 지키고 있다고.
여담으로 호찌민은 이런 거대한 규모의 영묘 건설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신을 화장해서 베트남 영토 곳곳에 뿌리고 영묘와는 정반대의, 소박한 규모의 가묘를 만들어 그 옆자리에는 나무 한 두 그루 정도만 심고 인민들이 그 나무 그늘 밑에서 쉬어가며 자신을 기억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트남 공산당은 다른나라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국부인 호치민을 레닌처럼 보존하기를 바래서 이런 엠버밍 및 보존처리를 했다. 사실 레닌, 호치민 뿐만 아니라 다른 엠버밍 처리된 공산국가 지도자들도 본인이 자청한 경우는 거의 없다.
[1]
사실 호찌민은 이런 거대한 무덤을 짓기를 원치 않았다. 오히려 재를 태워 북부, 중부, 남부에 나누어 뿌리고 가묘 옆에 나무 한 두 그루 정도를 심어 사람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게 만들라고 유언을 남겼다. 현재의 으리으리한 주석릉과는 완전 정반대의 의도였던 셈.
[2]
호찌민이 워낙 존경받는 위인이라 베트남인들도 자주 호찌민을 참배하러 온다. 때문에 묘소에 들어가기 전 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은 몇 십분까지도 기다릴 수도 있으니 유의할 것.
[3]
대형 카메라와 캠코더는 입장하기 이전에 무료로 맡아준다.
[4]
같은 입구지만 들어갈 때는 왼쪽 통로, 나올 때는 오른쪽 통로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