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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02:20:02

호세 피엔디베네

호세 피엔디베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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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호세 피엔디베네
}}} ||
<colbgcolor=#000><colcolor=#fff> 우루과이의 前 축구인
파일:José Miguel Piendibene.jpg
이름 호세 피엔디베네
José Piendibene
본명 호세 미겔 피엔디베네 페라리
José Miguel Piendibene Ferrari
출생 1890년 6월 5일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사망 1969년 11월 12일
국적 우루과이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신체 181cm | 체중 75kg
직업 축구선수 ( 포워드)
축구 감독
등번호 -[1]
소속 <colbgcolor=#000><colcolor=#fff> 선수 CA 페냐롤 (1908~1928)
감독 CA 페냐롤 (1934)
CA 페냐롤 (1940~1941)
국가대표 파일: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43경기 22골[2] ( 우루과이 / 1909~1923)

1. 개요2. 생애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여담5. 수상
5.1. 클럽5.2. 국가대표5.3.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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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약 100년 전에 활동했던 우루과이의 축구선수로, 남미 축구 역사상 최초의 마에스트로라고 평가받는 선수이다.

2. 생애

피엔디베네는 몬테비데오의 포시토스 근교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처음으로 축구를 접했다.

1908년에 17세의 나이로 중앙 우루과이 철도 크리켓 클럽[3]에서 데뷔하였고 데뷔전이었던 프랑스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2골을 넣었다. 그 해 10월 29일 아르헨티나와의 A매치에서는 우루과이가 3:0으로 승리했는데 피엔디베네가 2골을 넣었고, 여기에서 그는 아르헨티나의 수비수 호르헤 브라운에게 '마스터'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리고 이튿날 아르헨티나 신문에서는 이 별명을 소개하면서 그보다 나은 별명은 없을 것이라는 헤드라인을 달았고 이 별명은 평생 그를 상징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1916년 처음으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대회에서 역사적인 첫 번째 득점자이자 2골을 넣으며 조국 우루과이의 우승을 이끌었다. 다음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는 이사벨리노 그라딘과 같이 벤치에만 앉아있었지만 팀은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920년 대회에 다시 출전한 피엔디베네는 스탯으로는 한 골에 그쳤지만 MVP에 뽑히며 우루과이의 세 번째 우승에 공헌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도 대회에 출전하여 1골을 넣었다. 국가대표는 1923년에 은퇴하였다.

1926년에는 스페인 RCD 에스파뇰과의 두 차례 친선 경기에서 노장의 위용을 뽐냈다. 양 팀은 각각 1:0 승리를 거두며 사이좋게 한 판씩 승리하였다. 두 번째 경기에서 피엔디베네가 결승골을 넣었는데 당대 최고의 골키퍼 리카르도 사모라를 상대로 전설적인 득점을 기록했다고..
파일:external/girasolweb.tripod.com/piendgol.jpg
창과 방패의 대결, 마냐(피엔디베네의 별명)가 신성한 사나이를 뚫다.

마에스트로의 선수 생활에서 아쉬운 것 두 가지는 국가대표팀에서 1년 전에 은퇴하여 1924년 올림픽에서 우승할 때 명단에 없었다는 것. 34살의 노장이기는 했지만 기량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의 활약이 있었다면 더 압도적으로 우승을 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한, 대표팀 후배 스카로네와 같이 뛴 경기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스카로네와의 국가대표팀 경력에 6년이 겹치는데도 불구하고 같이 뛴 경기가 거의 없다.

은퇴 후 잠시 페냐롤의 감독을 맡기도 했지만 선수 생활만큼의 족적은 남기지 못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공격수 중 처음으로 토탈 패키지로 이름이 알려진 선수. 정확한 패스로 공격의 물꼬를 틀었고 공격과 수비의 유연함과 조화 속에 정확한 결정력도 갖추고 있었다 한다. 게다가 상술된 신체 조건처럼 당시로서는 상당히 좋은 피지컬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로 인해 우루과이 축구의 두 번째 기술적 진화라는 평가가 나왔다. 또한 당시 거칠었던 축구계에서 신사적인 매너로도 유명했던 선수다.[4]

이사벨리노 그라딘, 안토니오 캄폴로, 존 할리, 카를로스 스카로네[5] 등 여러 동료들과 함께 우루과이를 남미 축구계의 초대 강자로 만들었다.

이웃 아르헨티나 팬들조차 그의 실력을 인정해서 1922년 그라프 잡지에서의 투표에서는 그 시대 최고의 선수로 피엔디베네를 뽑았다.
신이 내린 마스터, 공격의 지배자[6], 패스의 왕, 헤딩의 군주, 감베타[7]의 황제, 드리블의 제왕, 작은 나무토막(taquito)의 왕 만세
(Salve Divino Maestro, Señor de la Cortada, Rey del Pase, Monarca del Cabezazo, Emperador de la Gambeta, Sultán del Dribbling, Soberano del Taquito)
디에고 루세로(우루과이의 축구 기자)

4. 여담

5. 수상[8]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2] 56경기 26골이라는 기록도 있다. [3] CURCC(Central Uruguay Railway Cricket Club). 이 클럽이 해체되었다가 1915년에 재결성되면서 지금의 CA 페냐롤로 이름을 바꾸었다. [4] 당시는 옐로 카드도 없던 시절이었다. [5] 엑토르 스카로네의 형. [6] 원문은 절반의 지배자(Señor de la Cortada) [7] 축구 용어로 빠른 동작과 기술을 이용해 수비수를 벗기고 공을 지키는 선수 [8] 피엔디베네는 페냐롤 원클럽맨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