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명나라 복건성 출신으로 전국시대 일본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혀[1] 시마즈 요시히로 휘하에서 의원을 지내고 쓰시마 섬을 오가면서 약 장사를 했다. 주균왕이 무역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히자 그를 구해줬으며, 1591년 9월에 곽국안, 보국사, 주균왕 등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관한 글을 명나라에 올리면서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알렸다.[2]
간양록에 따르면 일본군의 상세한 정보를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려 했다가 같은 명나라 사람의 밀고로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3]에게 발각되어 히데요시에게 끌려갔는데, 히데요시의 가신들이 그를 삶아 죽이자고 했으나 히데요시는 명나라 사람이 자신의 조국인 명나라에 적국인 우리의 사정을 보고하는 일은 당연하다며, 오히려 허의후를 고발한 자에게 같은 명나라 사람을 밀고하는 추악한 놈이라고 욕하면서 허의후의 죄는 끝까지 묻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 명나라에 히데요시의 전쟁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이 일본에 나귀를 바치고 함께 모의하여 명을 침범하려 하며 조선이 침입의 선봉이 되기로 했다"고 전달하는 바람에 명나라가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을 의심하고, 초반부 조선의 원병 요청에도 나서지 않고 "너희가 알아서 해"라며 손 놓는 단초가 된다.[4]
『선조실록』 27년(1594년) 3월 18일조에 보면 허의후는 임진왜란 기간 중 조선에 건너왔으며, 일본군이 주둔하던 거제도의 영등포왜성에서 약을 짓는 일에 종사했다고 나온다. 이때 조선인 포로 오경희(吳景禧)가 선조 26년(1593년) 7월에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일본의 강고수마(江古水麻)[5]라는 곳에 와서 허의후와 만났고 허의후는 그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후하게 대했으며, 11월에 일본의 군량 수송선을 타고 함께 쓰시마를 거쳐 일본군이 주둔하던 거제도의 영등포왜성에 온 오경희는 이듬해 2월 22일 탈출해 전라도로 돌아오는 데에 성공했다.
[1]
허의후 본인의 언급으로는 명나라 융경 4년(1570년)에 일본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2]
물론 당시 명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일본군의 동향이 심상찮다는 것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허의후의 고발은 그러한 일본의 불온한 동향이 명나라로 침공해 오려는 전쟁 목적임을 확실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3]
간양록에는 아사노 단죠(浅野弾正, 천야탄정)로 기록되어 있는데, 아사노 나가마사의 관위가 종5위하 단죠쇼히쓰(弾正少弼, 탄정소필)이었다.
[4]
『선조실록』 25년 6월 18일
[5]
가고시마를 한자로 음차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