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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7-06-13 00:20:59

해원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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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혜원(眞慧院)은 1970년(경술) 원단(元旦)에 호산(虎山) 장영주가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진관리에 세운 것으로 현 진해원(眞解院)의 전신이다. 현 진해원은 유산(有山) 장영준이 2010년(경인)에 '참된 해원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충청도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에 세운 증산미륵님을 신앙하는 미륵도량이다. 장영주와 장영준은 형제지간이면서 사제지간으로 진해원은 진혜원의 도맥을 이어 받았다. 불지형체(佛之形體)에 따라 신앙의 형식은 불교와 상당부분 유사하다.
1. 도맥과 뿌리
1.1. 도맥(道脈)1.2. 호봉 장기동(1868∽1952)과 김형렬, 김자현1.3. 유일 장보만 (1900∽1964)
2. 진혜원(진해원) 역사
2.1. 호산虎山 장영주(1930~2011)
2.1.1. 신앙 동기2.1.2. 물약자효 의통법2.1.3. 미륵님 말굴레 출간
2.2. 유산有山 장영준(1946 ∼ )
2.2.1. 미륵님 신앙을 하게 된 과정2.2.2. 담양도관 제작2.2.3. 신도들의 입교
3. 주요 가르침
3.1. 미륵재생신(彌勒再生身)3.2. 신행 오대강령3.3. 실천신앙 생활신앙3.4. 서적 소개

1. 도맥과 뿌리

1.1. 도맥(道脈)

파일:진해원 도맥.jpg

1.2. 호봉 장기동(1868∽1952)과 김형렬, 김자현


진혜원 교단은 강증산 사망 60여년 후 장영주가 창교했지만 그 뿌리를 살펴보면 강일순과의 인연이 깊음을 알 수 있다. 그 뿌리는 호봉 장기동으로, 장기동은 1912년 강일순의 성령 친견이후 1952년 사망할 때까지 40년 동안 성령과 대화를 하였다고 전해지며, 1912년(임자) 5월 24일 당시 한센병을 앓고 있던 종제 장기준(구암, 순천교 사수)에게 매봉산에 수련소를 제공하고 당일 성령을 친견하고 익일인 5월 25일 사후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1912년 7월 24일 강일순의 부친으로부터 '학즉순천지학(學則順天之學) 도즉증산지도(道則甑山之道)'라고 쓰여 있는 글이 든 봉투를 받고, 10월 27일에는 강일순의 아내인 고부인이 기거하는 방에서 현무경(玄武經)을 필사하였다고 한다. 1915년(을묘) 11월 17일(음) 동지 법회시 강일순의 모친께서 옷 한벌을 지으신 후 겉감 옷은 김형렬에게, 안감 옷은 장기동에게 주었는데, 그 뚯이 '수의상요순지성법야(受衣裳堯舜之聖法也)' 라고 하며, 이 공사가 증산 미륵의 도맥이 김형렬에서 장기동으로 전수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916년(병진) 10월 태운 김형렬, 김자현과 삼인 혈맹의 결의를 맺고, 김형렬의 3남 태흥과 장기동 차녀 기순의 혼인으로 사돈을 맺었으며, 1920년(경신) 3월 김자현의 외동딸 필순과 장기동 아들 보만(寶萬)과 혼인케 하여 겹사돈이 되었다. 장영주는 강증산을 열심히 신앙하던 장기동의 손자이자 장보만의 아들이며, 강증산의 주요 제자 중 하나인 김자현의 외손자다.

이 밖에 세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14년 고부인께서 거쳐하던 포교당 신축 자금 전액 지원, 1921년 조선총독부로부터 미륵진흥회 설립 허가, 1929년 대순전경 간행비 등을 지원하였으며, 장기동과 강일순 가족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증산법종교의 화은당 실기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화은당은 강일순의 딸 강순임의 호)
성부께서 화천하신 뒤로 가세는 더욱 궁핍하여 생계가 곤궁 막심하니 어디라 의탁할 곳 없는 환경 속에서도 관후하신 정씨성모께서는 모든 난관을 겪으면서 유리걸식하여 따님 기르기에 온갖 마음을 다 기우리시고, 노쇠하시 조부께서는 짚신을 삼아 가며 아드님과 크나큰 이상을 생각하고 그의 재림을 기원하여 사시로 치성을 올리시고 축원하는 그 모습은 실로 필설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이 무렵에 전라남도 순천에 사는 장기동 종반이 찾아와서 가장집물을 사주어 가난하고 막막한 살림살이를 도와주고, 외로운 처지를 위로해 주니 그 은혜 실로 골수에 아로새겨서 잊지 못할 바라.모녀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위로하며 근근이 지내는데, 어느덧 세월은 흘러 선사 나이 열세 살이 되어 부모의 소중함이며 제반 인사범절도 대략 깨닫게 되었는데, 조부께서 별세하시니 의지할 곳 없는 정씨 성모 선사를 안고 애통망극하니 그 누구하나 위로하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정신을 가다듬어 겨우 장사 지내니라. - 화은당 실기 제1장 유소시대 -

- '우리는 미륵이다' 제8장 미륵님 도맥이야기 중에서 발췌-

1.3. 유일 장보만 (1900∽1964)


장보만은 부친 장기동의 삼인혈맹 결의에 따라 김자현의 외동딸 필순(必順)을 아내로 맞아들여 후일(1930년) 진혜원 창교주 호산 장영주를 낳게 된다. 장보만은 효심이 지극해서 부친의 수명을 10년간 연장해 드렸다고 전해지며, 1955년 부친 삼년상을 마친 후 지리산에 입산하여 오늘날 진해원에서 수련문으로 읽고 있는 주문의 원형인 여의주(如意呪)와 수명문(受命文)을 하늘로부터 받아내렸다고 한다.
- 여의주(如意呪) -
南無彌勒 當來佛 (나무미륵 당래불)
千罪萬孼 光明恕 (천죄만얼 광명서)
五萬極樂 慧智明 (오만극락 혜지명)
至氣今至 願大降 (지기금지 원대강)
- 수명문(受命文) -
南無彌勒 當來佛 (나무미륵 당래불)
當來彌勒 天造佛 (당래미륵 천조불)
天造彌勒 廣濟佛 (천조미륵 광제불)
廣濟彌勒 受命佛 (광제미륵 수명불)
受命彌勒 福授佛 (수명미륵 복수불)
福授彌勒 世尊佛 (복수미륵 세존불)
世尊彌勒 永世佛 (세존미륵 영세불)

2. 진혜원(진해원) 역사

2.1. 호산虎山 장영주(1930~2011)

2.1.1. 신앙 동기

진혜원 창교주 장영주(1930~2011)는 30대 후반의 나이에 어느정도 성공을 이룬 중소기업인이었다. 그는 증산신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종교에 열중했던 조부와 부친에게 약간의 원망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랬던 그가 강일순을 신앙하게 된것은 1968년경 그의 아내 김옥자의 갑작스런 정신병 때문이었다. 현대의학이 통하지 않자 기독교, 불교는 물론 무당까지 불렀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기도를 하려고 아내와 함께 북악산을 찾아갔다. 북악산은 청와대의 뒷산이라 예나 지금이나 군인들의 경계하에 있고 특히 당시는 경비가 삼엄한 시절이었다. 장영주는 경비병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간절히 부탁한 끝에 입산을 허락받고 바위굴을 찾아 들어갔다.
또 세번째로 옮긴 곳은 그곳에 우뚝 솟아있는 바위였다. 거기에는 칠성대(七星垈)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먼저 촛불을 밝히고, 바위굴에서 하듯이 나는 천지신명에게 마음속으로 호소하고 기원하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디서 누가 대답하거나 상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 스스로의 입에서 자문자답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 광경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를 돌았다고 하였을 것이다.

그때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네 아내의 병은 네가 하고 있는 건축공사사업을 그만두고, 세상 바로잡고 사람 구제하는 천지공사를 하면 고친다」하고, 그리고 또 자문하기를 「천지공사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면, 또 말하기를 너희 조상이 원하던 후천 五萬年 운수이다.」 그리고 또 자문하기를 「후천 五萬年운수가 무엇인가?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다.」, 누가 나를 이렇게 시키는가 하였더니, 「네가 말로만 들어오던 증산이다」고 하는 것이었다. 또 다시 나는 자문하기를, 중생을 어떻게 구제하는가 하였더니, 「그때 그때 알려준대로만 하면된다」 하면서 이제부터 알았거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자문자답한 나는 이때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으며, 지금까지 자문자답한 그 언구만 뚜렷하게 기억되고 있다.

- 미륵님 말굴레 13~14p -
산에서 내려온 그는 아내의 정신병이 나은것을 보고 다시 건축사업에 몰두하려 했지만 아내의 정신병이 도져버렸다. 어쩔수 없이 아내의 곁에 머물렀던 그는 차도가 보일 때마다 사업을 시작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아내는 발작을 일으켰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자 장영주는 종교사업이 자신의 운명임을 깨닫고, 강일순을 신앙했던 조부와 부친이 강일순을 신앙했던 흔적을 찾아보았다.
조부 장기동이 만들어 부친 장보만이 모셨던 미륵불상이 있었다. 장보만이 사망하자 장영주는 미륵불상을 부친의 묘 인근에 묻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리가 없는 아내가 미륵불상을 모셔오라고 성화를 냈다. 차비도 없던 형편이었지만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차비를 얻어서 고향에 있는 조부의 미륵불상을 찾아왔다. 그 지인은 나중에 몇사람과 더불어 장영주의 집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는 당시 중풍으로 인해 왼쪽 팔이 불편했다고 한다. 그런데 장영주와 대화중에 갑작스레 팔이 완쾌되어 버렸고, 그 자리에서 장영주는 지인과 함께 찾아온 이들의 위장병과 치질까지 치료했다. 이것을 계기로 장영주는 본격적인 종교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장영주는 동생이자 제자인 장영준과 함께 물약자효 의통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하였으며, 2007년 물약자효 의통법으로 진혜원의 국제화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운이 다했음을 알고 귀국하여 2011년 4월 별세하였다.

2.1.2. 물약자효 의통법

장영주가 주장하는 물약자효법은 다음과 같다. 사전적 의미
3. 물약자효와 심성(勿藥自效와 心性)

약물을 쓰지않고 병을 고치는 형태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알고 있는 방법으로는 안수로 병을 고치는 안수요법이 있고, 주문을 외어서 고치는 기원 치병법이 있으며, 기합으로 치병하는 통기치병 등이 있다.
이러한 방법들은 치병하는 사람의 정성과 기합, 최면 등으로 환자에게 전달하므로써 이루워지는 일시적인 능력의 결과로 보아지는 것이다. 대외적인 물질이나 약물을 사용 하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물약자효(幼葉自效)라고할 수 있겠지만, 미륵님(증산)에서 말씀하신 물약자효의 범주에는 들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증산도[1]에서 말하는 물약자효는 병자의 심성과 의식意識을 먼저 정화한 다음에 이루어지는 치병을 의미하고, 거기에는 신명(神明)의 작용으로 병을 물리치는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 자신이 먼저 올바른 인간심성과 의식을 가지게 되는때로부터 효력을 보게된다.
현무경(玄武經)에 언청신계용(言聽神計用)이라고 한것은 바로 신명을 작용시켜 치병할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의 말을 듣고 신명이 작용 한다는 것은 신명을 용사 (用使)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을 것이 다.
따라서 증산께서 말씀한 의통(醫統)은 단순한 병을 고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성의 개혁 또는 개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보아 물약자효로 완치된 사람도 그 이후의 생활에 있어서 미륵님의 뜻에 어긋나게 되면 또다시 병이 재발하는 것올 보았다. 그래서 다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 환자의 심성이 개혁되지 않으면 완치되지 않는다. 현사회에서는 약을 훔쳐먹어도 약효가 나며, 외상약을 복용해도 약효가 난다고 하지만, 물약자효법은 그 심성이 개혁되지 않으면 언제나 재발 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심성이 미륵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낫는지 모르게 완치되나, 그의 심성이 개혁되지 않고 말로만 개혁 한척 하면 언제 어떻게 재발되는지 소리없이 또 발생한다. 이것이 "언청신계용"의 신명의 조화법이라 할 것이다.

- 미륵님 말굴레 80~81p -

2.1.3. 미륵님 말굴레 출간

파일:미륵님말굴레.jpg

북악산에 오른지 약 20여년후, 장영주는 자신의 경험담을 '미륵님 말굴레'(도서출판 진혜원, 1988)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미륵님 말굴레라는 뜻은, 경오생 말띠인 장영주가 운명적으로 미륵님(강증산)을 믿을 수 밖에 없게 된 굴레를 썼다는 의미다. 훗날 증산참신앙이 이 책을 통해 한동한 잊혀졌던 진혜원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여기에서 본문 전체를 볼 수 있다.
또다른 저서로는 '금산사의 전설', '진주성에 서린 민족혼', '한국의 미륵사상', '충의공 장윤 장군 사실록'이 있으며, 물약자효 의통법의 실체 체험실화는 '사차원의 세계'를 발간하였다.

2.2. 유산有山 장영준(1946 ∼ )

2.2.1. 미륵님 신앙을 하게 된 과정

장영주의 동생 장영준은 형제의 의로써 장영주를 도우며 물약자효법을 전수받았다. 두 형제는 형제의 연을 끊고 사제의 연을 맺었다고 전해진다. 장영준도 형 못지않은 치병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진혜원에서 펴낸 '미륵님 말굴레'를 보면 오히려 장영준의 치료법이 더 상세히 나와 있다.
그때부터 환자들은 순서대로 자기병세에 대하여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영준에게 어떠한 힘이라 할까,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환자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에, 영준은 조용히 메모지와 같은 종이 쪽지를 준비하여, 그 쪽지에다 회장님이 부(符) 그리던 생각이 나서, 부는 그리지 못하니 되는대로 글자를 썼다. 하늘천자(天字)를 쓰기도 하고 바를정자(正字)를 쓰기도 하고, 마음심자도(心)쓰기도 하여, 그 종이를 마음 가는대로 한장씩 집어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불에 태워 그 재(?)를 냉수에 타서 마시라고 일러 주었다. 그야말로 어이없는 치료방법이었다. 그러나 치료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부작값 달라는 것도 아니니, 그들 환자들은 시키는대로 종이 한장씩 마음대로 집어들고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때 영준은 돌아가는 환자들에게 말하기를, 이 시간 이후 부터는 조석으로 냉수 목욕을 하고, 음식을 먹을때마다 , 미륵부처님이 이 음식이 약이 되게 해 달라고, 마음 으로 심고하고 음식을 먹으라고 말하며, 그렇게 열심히 실천하며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키는대로 실천해보고 병이 나으면 다시 올 필요 없고 만약 병이 낫지 않으면 다시 찾아오라고 하였다. 허술하기 보다 어린애 착란같은 처방이지만, 사실은 어려운 처방인 것이다. 환자가 스스로 병은 고치겠다는 결심과 노력이 곧 약이 되기 때문이다.

- 미륵님 말굴레 68~69p -

유산 장영준은 형님이자 스승인 장영주와 한날 한시에 미륵님을 신앙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장영준이 체험한 내용이 '우리는 미륵이다.'라는 책자에 소개되어 있어 일부를 옮긴다.
49년 전에 미륵님에게 미륵님을 믿는 조건으로 ‘부자를 만들어 주세요.’ 그랬습니다. 미륵님이 ‘그리 해 준다.’ 고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49년이 지난 지금도 거지입니다. 돈이 없는데, 하나도 없는 게 아니라 간신히 풀칠만 하고 부자를 안 시켜 주셨습니다. 만약에 부자가 되었으면, 내가 지금 여기 없었을 것입니다. 죽었던지 개판이 되었을 것입니다. 49년 동안 미륵님 일을 했지만 내가 욕심도 많고, 내가 너그러운 인간도 아니고, 무진장 공부를 많이 해서 유식하지도 않고, 올해 71살입니다. 22살부터 피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입니다.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도 가난하게 살았으니까! 나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진짜로!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 매우 배고프게 살았습니다. 오직 난 배부르게 돈 버는 것, 그것만 머릿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 동네에 나가면, 이웃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어! 부잣집 손자가 왔다. 저 사람은 장부자의 손자인데, 할아버지가 도를 잘 못 믿어서 망해버렸다. 그 손자야!’ 하는 소리가 귀에 박혀버렸습니다. 도대체 우리 할아버지는 무슨 도를 믿어서, 그 큰 부자가 거지가 되셨는가?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더 열을 받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한 일은 공염불은 아니지만, 미륵님께서는 ‘믿어라.’ 하셔서 했습니다. 그러나 난 ‘나를 망하게 할 도를 하지 않는다. 난 부자 돼야 도를 한다.’ 하고 버티니, 미륵님께서 ‘부자 되게 해준다.’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런 얘기가 여러분은 웃기고, 재밌게 들리지만 나는 심각한 얘기입니다.
1968년 어느 날, 은진 미륵불을 찾아 가라고 말씀하셔서 은진 미륵불님을 찾아뵙고 예를 갖추고 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미륵님께서 “나를 보고 무엇이 생각나는지 말해 보라.” 는 물음에 아무 생각 없이 하루 반을 그저 앉아만 있었습니다. 그 때 미륵님께서 그러고 있지만 말고 안내책자라도 가져다 보고 생각을 말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안내 책자를 가져다 읽어보니 수 천 년 동안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으시는 미륵존불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혹 인내가 아닌가 싶어 "인내忍耐입니까?” 하였더니 ‘반은 맞았다.’ 하시며 나머지를 맞추라는 것입니다. 막막하게 이틀째 밤을 새고 새벽녘에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학생시절 운동장에서 ‘차렷 자세’ 즉 ‘부동 자세’가 힘들었던 것이 불현 듯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인내부동忍耐不動입니다.” 라고 큰 소리로 말했더니 고생했다고 위로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風霜閱歷誰知己풍상열력수지기 湖海浮遊我得顔호해부유아득안 驅情萬里山河友구정만리산하우 供德千門日月妻공덕천문일월처」(오랜 세월 온갖 시련 다 겪은 나를 누가 알까. 저 멀리 호수나 넓은 물에 떠 있는 내 얼굴 찾으면 알 것인데. 정 따라 흘러온 기나긴 세월 산과 물을 벗 삼았네. 수 많은 공덕 가문 닦은 대로 천지 보은 입게 되리라.)

이 시는 증산 성제님께서 쓰신 시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증산성제님께서 은진미륵불상에서 읊으신 시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하여튼 3일간 미륵님이 내 엉덩이를 움직이지 않게 하시어 움직이지를 않는 겁니다. 1〜2시간 정도는 그래도 버티지 않습니까? 아무 생각도 없이 하루 이틀을 몸이 안 움직이니 그대로 앉아서 일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 때가 초가을이었는데, 돌바닥이니 여러 사람들이 방석과 이불을 가져오고 거기서 죽으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3일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기운이 살아나니, 다들 의아해 하였습니다.

-'우리는 미륵이다' 제6장 원평장꾼도 없다더냐? 중에서 -

2.2.2. 담양도관 제작

파일:담양도관.jpg

1980년경[2], 진혜원은 물약자효 의통법으로 치병을 받은 사람들에게 목걸이형 기념메달을 증표로 주었다. 이 메달의 명칭은 청담淸潭에서 潭자, 삼양三陽에서 陽자, 신도新道에서 道자, 진관津寬에서 寬자를 따서 담양도관潭陽道寬 이라고 한다. 한쪽면에는 관촉사 은진미륵과 닮은 부처와 함께 좌우에 정도광명생正道光明生, 세존영세불世尊永歲佛이 새겨져 있고, 또 한쪽면에는 남방객南方客이 새겨진 날개달린 말의 상하에 진혜원眞慧院, 조화정造化定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마패(馬牌)」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일부에서는 진혜원의 「도관(道寬)」을 미륵님이 제세 시에 만들어서 자기들 종단에 전수된 마패라고 거짓 선전하고 있습니다. 도관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냐?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68년도에 청담동(淸潭洞)에서 도를 시작해서 삼양동(三陽洞)으로 이사를 간 후, 고양군 신도면(神道面) 진관리(津寬里)에서 우리 호산선생이 도를 완성했다고 해서 만든 것이 담양도관(潭陽道寬)입니다. 도의 텃밭을 옮기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앞 문양은 은진미륵불상이고, 뒤의 용마상(龍馬象)은 우리 호산성사님이 30년생 말띠이고, 호산성사님 부인이 김옥자 보살인데, 40년생으로 용띠입니다. 그래서 용마상을 내가 그린 것입니다. 위에는 진혜원(眞慧院), 가운데에는 조화정(造化定)이라 새겨 넣었습니다. 조화라는 것! 우리가 지금 음양의 조화를 얘기 했는데, 그 조화라는 것이 정해졌다. 억지로 사람의 힘으로 안된다는 뜻입니다. 남방객(南方客)을 밑에다 해 놓았는데, 제 고향이 순천입니다. '남쪽에서 온 손님'이라는 뜻으로 호산성사님이 쓰셨습니다. 예전에 미륵님께서 「남방 삼이화(南方 三離火」라는 글도 쓰셨습니다. 내가 그것을 어쨌다는 것이 아니라 호산 성사님의 여러 글에도 '남방객 호산', '호산 남방객' 이라 쓰시고 평소 이용하시던 호랄까, 별명이랄까 그런 것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미륵님 께서 내려주신 영서-
自然自來曰靑潭(자연자래왈청담)
天地報恩曰三陽(천지보은왈삼양)
再生原法曰神道(재생원법왈신도)
一字五結曰津寬(일자오결왈진관)
山雲峯一醫統法(산운봉일의통법)
勿藥自效眞慧院(물약자효진혜원)
生死判斷造化定(생사판단조화정)
辛亥元旦(신해원단)

진짜 말을 안 하고 살기도 힙듭니다. 작년(乙未) 3월 12일에 도관 특허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9월 7일에 특허가 나왔습니다. 참! 그것도 9와 7일입니다. 미륵님이 이번에는 '도관(道寬)을 금(金)처럼 해라.'하시어 금을 입히듯 금메달을 만들었습니다.

- 우리는 미륵이다 - p.44∽45.

2.2.3. 신도들의 입교

장영주 창교주 때부터 자작사당(自作私黨) 이라 하여 일체의 신앙단체 조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연맥이든가, 조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으며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것이 미륵님의 법이라'라고 하며 일체 조직을 금하고 있다. 세간에 알려진 신도수가 줄었다가 다시 늘었다고 하는 것은 진해원 입장에서는 의미가 없는 말이다. 충청도 서산시 운사면 원평리 한적한 시골로 들어간 연유와 타 단체 신도들이 진해원 방문한 내용이 '우리는 미륵이다'라는 책자에 기술 되어 있다.
어떤 동문이 와서 경전에 「당시 성도들이 “그 때를 당하여 일꾼들이 없으면 어찌합니까?”하고 걱정하니 증산성제님이 “원평 장꾼도 없다더냐.” 하셨다.」고 그럽디다. 그러면서 “여기에 간판을 다신 것도, 여기가 경전에서 나오는 원평院坪인 줄 아시고 왔습니까?” 하고 묻기에, 복장이 터집디다. 하하하. “우연히 왔는데, 그리 됐습니까?”“예. 그리 됐소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 말했습니다. 여기가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입니다. 장場이 5일장이 아니라 매일 서는 상설시장입니다. 매일 사람이 오기 때문입니다. 장 판에는 단골도 있고 새로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내가 2010년도에 내려올 때 도道하고 담을 쌓으려고 내려왔습니다. 내가 68년도, 22살부터 도道 생활을 하였습니다. 나는 미륵님께서 그 때 그 때 영을 내려주셔서 천하가 다 내 것이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65살을 먹도록 남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나이 먹고 몸만 늙어서, ‘지난 42년간 미륵님 도를 해왔으니, 미륵님 신앙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이제는 조용한 시골에 내려가서 조용히, 죽을 때까지, 우리 부부 둘이 남은 여생을 보내고자 한다.’ 라고 지인에게 말했더니 마침 이곳에 자기가 지은 빈집이 있다고 말합니다. 주소를 얻어 찾아 내려왔는데, 가진 돈도 없고 해서 여기서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 부부 둘이 죄를 안 짓고 산다 해도,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있을 테니 그 죄나 닦아 후손이나 잘되게 해야겠다, 보살도 나를 많이 원망하고, 나이가 먹도록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했고,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일명 가짜 마패사건이 생기면서 내가 세상에 알려진 것입니다. 작년 일 년 동안 궁금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내가 진짜 아무소리 않고 살려고 했는데, 이 마패사건이 일어나서 세상에 알려진 덕에 여러분도 만난 것입니다.

- '우리는 미륵이다' 제 6장 원평장꾼도 없다더냐? 중에서 -

장영준은 새로 들어오는 교인들에게 法號를 주기 시작했다. 2015년 초하룻날, 미륵님 전에 예불을 하러 들어 갔는데 미륵님께서 "너의 별호를 '정도전(正道傳)'으로 해라."고 했다 합니다. 그리고 들어 신도(진해원에서는 동문이라고 함)들에게 號를 주라고 했는데, 진해원 동문들을 보면 林, 綠, 河, 井 자 돌림의 호를 볼 수 있다.
작년乙未 초하룻날, 미륵님 전에 예불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미륵님이 말씀하시기를 “올해부터 너의 별호를 ‘정도전’으로 해라!” 그러시는 겁니다. “이씨 조선 창업을 도운 정도전鄭道傳입니까?” 하고 물으니 "그것은 나라 정鄭이고, 너는 바를 정正을 써라.” 하셨습니다. 내가 ‘도道나 전하고 살아야지.’ 그전에도 그런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서 내려왔는데 정도전正道傳을 하라는 게 기분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

작년乙未부터 미륵님의 지시로 동문들에게 호號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약 70명 정도를 주었습니다. ‘아! 이것은 포교를 하라고 하시는가보다.’ 생각했습니다. 임林자는 28명이고, 심었으니 푸르게 해야 되서 록綠자는 14명, 그 다음에는 물이 많이 필요하니 우물 정井이 14명, 그 다음에 하河자가 14명, 그래서 70명입니다. 그것이 그냥 시구절로 내게 내려와 있는 것입니다. 한 글자마다 7자씩 한 구절씩 줍니다. 앞으로도 경주용담이 있습니다. 경 14명, 주 14명입니다. 용도 14명씩, 담도 14명, 그러면 126명이 되고, 보충하는 이들이 14명입니다. 진짜 아무것도 안 하려고 했는데, 새로 시작을 한 것이 작년 을미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여러 동문들을 만났습니다.

내가 호號를 내리고 나서, 날이 하도 가물어 가지고호 받은 동문들이‘도를 닦는 둥, 마는 둥’해서 미륵님께 “가물어서 심은 나무동문들이 잘 자라지 않습니다.” 나도 기술이 늘어서 말에 재주가 늘었습니다. 그랬더니 미륵님께서 답하시기를 “심는다고 다 잘 자란다냐? 사는 놈도, 죽을 놈도 있지.” “그러면, 미륵님! 동문들에게 물을 좀 내려주십시오.” 말씀을 드리니까, 미륵님께서 “그러면, 우물 정井과 푸를 녹綠 자를 쓰거라.” 하신 것입니다. 물 하河도 써서 내년丁酉 봄이 되면, 이파리가 파래질 것입니다.

- '우리는 미륵이다' 제7장 원평 장꾼, 육임을 맡다 중에서 -

3. 주요 가르침

3.1. 미륵재생신(彌勒再生身)

진해원에 오면 처음 깜짝 놀라는 것이 "미륵재생신 주문"이다. 기존 교단과 달리 강일순이 재생신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온 인류가 미륵으로 재생신하여야 한다고 한다. 미륵 용화세계는 미륵들이 사는 것이므로 당연히 미륵이 되기 위해 심성을 개혁해야 한다고 한다. 강증산 미륵님이 인간으로 오셖기에 그 미륵 씨들이 전세계에 퍼지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미륵이다!'를 외치면 미륵이 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신앙의 목적은 그 신앙대상인 그 분을 닮는데 있다고 한다.

미륵재생신 주문은 다음과 같다.
새세상이 됐다!
미륵 세상이다!
미륵님을 믿자!
미륵님을 닮자!
미륵님이 되자!
나는 미륵이다!
우린 미륵이다!
‘새 세상 됐다! 미륵세상이다! 미륵님을 믿자! 미륵님을 닮자! 미륵님이 되자! 나는 미륵이다! 우린 미륵이다!’ 순서대로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그냥 내가 지은소리가 아닙니다. 미륵님이 앞으로는 전 세계에 퍼트려야 한다고 했어요. 지금은 내가 능력도 없고, 이런 시골에서 소리를 질러봐야 안 됩니다. 하지만 반드시 될 것이고, 퍼져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도 아들 손자들에게 가르치면 제일 잘합니다. 애들을 가르치면 금방 따라서 합니다. 여러분들 올해 병신년 희망을 가지시고 병신육갑丙申六甲 좀 한번 해봅시다.
- "우리는 미륵이다' 제1장 우리는 미륵이다 중에서-

3.2. 신행 오대강령

미륵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신행 오대 강령의 실천을 매우 중시합니다. 이 신행 오대 강령이 진해원의 교리의 핵심이자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신행 5대 강령(나는 미륵이다)]
1. 미륵님처럼 보고
2. 미륵님처럼 듣고
3. 미륵님처럼 생각하고
4. 미륵님처럼 말하고
5. 미륵님처럼 행동하자
1. 나는 요즘 이렇게 말합니다. “미륵님처럼 듣고, 미륵님처럼 보고, 미륵님처럼 말하고, 미륵님처럼 행동하자.”고 합니다. 다시 말해 “미륵님 놀이를 하자!” 애들이 소꿉놀이 하듯이 “미륵님 놀이를 해보자.”고 합니다. 난 유식하지 않으니까 쉽게 이야기 합니다. 대개 증산미륵님을 신앙하시는 분들은 증산甑山이라는 그분의 호를 부르는데 나는 그렇게 부르지 않고 미륵님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미륵이다.’라는 말은 내가 만든 말이 아니고, 그 분의 말씀을 내가 쓰는 것입니다. 내가有山 ‘유산이 미륵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미륵이다!” 라고 외치면 그분께서 즉 증산미륵님께서 ‘이놈아! 너 가짜다.’ 이렇게 하시는 게 아니고, ‘너 한번 진짜 미륵이 돼 보라.’면서 막 밀어줍니다. 한번 미륵이 되어 보라고. 그래서 생각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도 “나는 미륵이다!”를 많이 해야 합니다. 미륵님이 깜짝 놀랄 정도로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가짜 미륵입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을 미륵님으로 보자! 세상의 모든 소리를 미륵님 소리로 듣자! 내가 하는 모든 말을 미륵님같이 말하자!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미륵님같이 행동하자!’ 이 신행 4대 강령! 4대 강령은 미륵님께서 인류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 네 가지만 명심하면 미륵님이 됩니다. 그러면, 다른 공부는 필요가 없습니다. 두꺼운 책들을 다 읽을 게 없고. 나는 쓸 책도 없습니다. 아이들이 소꿉놀이 하듯이, 우리 스스로 미륵 놀이를 하듯이! 사물을 미륵님처럼 듣고, 보고, 말하고, 행동하고, 그렇게 하면 서로 싸울 일이 없습니다. 미륵님들은 싸우지 않습니다. 나도 당신도 미륵이니까 잘못이 있어도 감히 서로 성질을 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미륵님이 되는 것입니다. 증산성제님께서 「너희들은 오직 일심을 가지라.」라고 하셨습니다. 매사에 미륵처럼 듣고,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일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륵이다' 제1장 우리는 미륵이다 중에서 -

3.3. 실천신앙 생활신앙

한국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 석가부처님을 보면 그 분들 살아생전에 기행이적奇行異跡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런 형태의 종교나 신앙의 방식으로는 안 되겠다. 요즘 교회이나 법당 형식의 신앙은 없어져야 한다.’ 고 봅니다. 그런 후 무엇이 있어야 하나? 생활신앙, 생활종교, 실천신앙으로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닮아야 하고, 부처님을 믿으면 부처님을 닮아야 하고, 나는 미륵님을 믿으니 미륵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누구를 닮는다는 것, 그것은 책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성경聖經,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읽어서 닮아지진 않습니다. 직접 따라해 봐야 합니다. 아직 가짜라도 미륵 놀이를 하면 자기도 모르게 진짜 미륵이 되어버립니다. 실천신앙, 생활신앙을 해야 합니다. 증산미륵님께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하셨습니다. 난 한마디로 ‘천지공사란 선천先天의 인간사人間事에 이롭지 않는 것을 전부 뜯어고친 것이다.’ 라고 봅니다.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는 일은 예전에도 없었고 오직 내가 처음 짓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선천에는 교회나 절을 짓고 또 신흥종교는 그런 본을 따서 성전을 만들고, 모임을 크게 하고, 조직을 만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안 됩니다. 집에 가서 열심히 실천신앙을 하면 됩니다. 가족끼리 하게 되면 행복해집니다. 스스로 실천하는 신앙으로 행복해져야 합니다. 조직하고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나 절에서 노래하고, 설교하고, 목탁을 치며 염불하고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실컷 목탁치고 교회서 찬송을 하고 밖에 나와서는 먹고 산다고 금방 거짓말을 합니다. 이렇게 하는 신앙이 뭣입니까? 또 절에서 천 배례, 만 번 배례를 하고서는 밖에 나오면 절하기 전 습관 그대로 돌아갑니다. 도로 아미타불입니다. 뭔 소용이 있습니까? 교회당에서, 절에서 맞는 소리만 하다가 세상에 나와서, 장사를 하면서 또 속이고 하는데 왜 속입니까! 물건을 팔면서 ‘조금도 안 남고 밑지고 판다.’고 합니다. 왜 밑지고 판다고 합니까. ‘조금 덜 남고 팝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사람들 입에 붙은 게 전부 거짓말들입니다. 이제는 말로 덕德을 쌓아야 합니다. 말로 덕을 잃으면 벌을 받습니다. “조금 남습니다.” 하면서 덕을 붙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말이라도 후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40〜50년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다 한 얘기들입니다.
'우리는 미륵이다' 제1장 우리는 미륵이다 중에서 -

3.4. 서적 소개


미륵님 말굴레와 유산스님이 전하는 새세상 미륵세상 이야기를 엮은 우리는 미륵이다(도서출판 해원정사, 2016년 7월 7일 발간)를 보면 진해원 가르침의 개략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파일:우리는 미륵이다(책자표지).gif
[1] 안세찬이 세운 교단 증산도가 아닌 범증산교단을 말함. [2] 정확한 시기를 아시는 분은 추가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