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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5:38:43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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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알리는 당시 기사( 경향신문)

1. 개요2. 배경3. 사건 전개4. 이후5. 대중매체

1. 개요

1965년 11월 당시 6대 국회의원이던 김두한 대학생들과 한국독립당 당원들을 배후 조종하여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고 한 제3공화국의 정치조작사건이다.

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 이전 현역 국회의원이 내란죄에 연루된 최초의 사건이다.

2. 배경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국회에 입성한 김두한은 4년 뒤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지고 이어 5대 총선에서도 낙선하면서 실의에 빠졌다. 1963년 군정이 끝나고 민정을 준비하던 시기, 과거 김구 한국독립당 출신으로 군인, 정치인이었던 김홍일이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 선거용으로 당을 재건했으나 단 한 명의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한일기본조약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서민호, 김재광, 윤제술 등이 의원직을 사퇴하여 보궐선거가 치러졌고 이 때 김두한이 한독당에 입당해 용산구에서 당선되면서 한독당은 원내정당이 되고 김두한은 원내로 돌아온다.

그러나 김두한은 김종필과 청년단 문제로 가깝게 지냈고 또한 군사정권을 비판해 왔기 때문에 당시 김종필과 사이가 안 좋은 김형욱이 수장으로 있던 중앙정보부에서는 김두한을 한 번 손 보고 싶어했다.[1] 거기에다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한 젊은 운동가들중에서도 김두한과 가깝게 지내며 한독당원인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김두한도 손 보고 청년 운동가들도 정리하는 1석 2조의 효과를 노려 국가보안법을 내세운 조작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3. 사건 전개

1965년 11월 치안국[2]은 6대 국회 보궐선거에 입후보했다 낙선한 한독당원 박상원 등 10명 외에 당시 학생운동으로 수감 중이던 김중태를 이 사건으로 추가 입건하는 한편, 김두한과 전 국회의원 서민호[3], 그리고 전 국회의원 이종남 등 30여명을 불구속 입건하고 모 대학 총학생위원장 김유진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받으면서 1965년 8월 25일에 있었던 학원난입사건 이후 사제 폭발물을 북한산성에서 폭발 실험을 한 사실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2달 뒤인 1966년 1월 8일 정기국회가 폐회되자 마자 김두한 의원은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심한 취조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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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의원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

그러나 당시는 유신 이전으로 아직은 박정희가 여당을 완전히 장악한 것도 아니었고[4] 야당 역시 세력이 약하지 않았던 상태였으며, 거기다 간신히 10년 만에 보궐 선거로 당선되어 회기가 1년 정도 남은 상태에서 당선되자마자 감방 행이라는 사실이 동정표를 끌었다. 이에 1월 29일 국회에서 "국회의원이 회기전에 체포 또는 구금된 때에는 현행범인이 아닌 한 국회의 요구가 있으면 회기중 석방된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44조에 따라 '김두한 의원 석방결의안'이 116표 중 106표로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이틀 뒤 풀려났다.

같은 해 4월 28일 서울형사 지법 3부 김병룡 부장판사 중심으로 개정되었는데 황공렬 검사는 반정부적인 한일협정 비준무효화 데모에 참가했고 피고인들이 폭력혁명을 통해 국가전복을 음모했음이 뚜렷하니 일반예방이라는 형사정책상으로 마땅히 이들은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며 국가보안법 폭력행위 등 처벌관한법률 위반죄 내란음모죄 등을 적용해 구형했는데 다음과 같다.

그러나 애초에 없는 사건을 조작하려니 제대로 된 증거나 진술이 있을 리 없었고 그 해 5월 10일 모두 무죄 판결을 받는다.

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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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 전원 무죄판결을 알리는 당시 기사( 경향신문).

이 사건이 종결된 뒤 기소된 10명 가운데 한 명은 경찰이 심은 프락치임이 밝혀졌으며, 무죄 확정에 따른 형사보상금은 김 모씨가 일괄수령해 잠적해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그럭저럭 마무리는 되었으나 1966년 9월 김두한은 그 유명한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일으켜 의원직을 잃었고 딱 한 명 있던 의원이 없어지자 다시 원외정당이 된 한독당은 휘청휘청하다 1970년 신민당에 흡수되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5. 대중매체

5.1.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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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작중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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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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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
(124화)
국회 오물 투척 사건
(1, 1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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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화인 124화 초반에 이 사건이 다뤄졌다. 용산 보궐 선거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겨우 정계에 복귀한 김두한이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에게 끌려가 빨갱이로 취급받으며[5],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애초 빨갱이라기에는 반공활동이 많았던 것이 부각되었고 선거도 반공활동을 강조해서 당선되었던지라 김두한이 빨갱이라는 것은 너무 억지였던 것도 있다보니 조윤형, 이만섭 유진산이 적극나서서 김두한 의원 석방 결의안이 극적으로 통과되었고 김두한은 법정에서 무죄판결 받지 않고 중앙정보부에서 풀려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위기를 넘긴 김두한이었지만 이후 이보다 더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다.


[1] 사실 김두한이 "수 틀리면 청와대를 부수겠다."는 등 선거 중 말을 과격하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것 가지고 어떻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시대를 생각해보자. 이 일이 있은 지 몇 년 뒤 김형욱도 김두한처럼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게 된다. [2] 현재의 경찰청. [3] 김두한의 용산구 의원 전임자다. [4] 사실 유신 이전까지 박정희는 3선 개헌 관련해서나 10.2 항명 파동 등 당과 마찰을 겪은 적이 제법 있었다. [5] 자신을 빨갱이 취급하는 것에 백색테러의 정점이던 김두한은 당연히 황당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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