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7년( 고려 우왕 3) ~ 1438년( 세종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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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초기의 대표 무장 중 한 명이다. 특출난 용력을 가진 맹장으로, 태종대부터 관직을 시작하여 세종대까지 북방에서 활약했던 장수다. 본관은 진주(晉州)[1]. 시호는 양정(襄靖).2. 생애
1377년 경상도 진주목(현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아버지 하승해(河承海)의 아들로 태어났다.진주 하씨 가문 출신으로, 이 가문은 고려대부터 이어져내려오는 진주 지역의 뼈대 굵은 지역 호족 가문인데, 이 때문에 하경복의 가문은 고려 말에도 이색이나 정몽주 같은 시대의 문인들과 교류가 깊었던 문관 가문이었다.
그런데 하경복은 정작 문과 쪽 머리는 그닥이었고, 대신 어릴 때부터 대단한 완력을 가졌다고 하고 또 똘끼도 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에 얽힌 야사가 몇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호랑이 사건이다. 경복이 산에 패거리를 이끌고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가 나타나 개판이 벌어졌는데, 일행은 전부 사방팔방 흩어지고 하필이면 호랑이는 경복을 향해 달려들었다. 보통 인간이면 그냥 끔살인 상황에서 경복은 거기서 그걸 또 살아보겠다고 호랑이한테 헤드락을 걸고 아웅다웅 버텼다고 한다. 그렇게 호랑이를 부둥켜안은 채로 연못에 뛰어들어 물고문을 시전한 경복은 기어코 승리를 거두고 목숨을 건지고야 말았다.
이후 나이를 좀 먹은 20대 초반의 하경복은 정종시기에 갑사취재에 응시해 궁궐의 숙위갑사가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 재수가 옴 붙었는지 제2차 왕자의 난이 벌어져 궁궐이 난장판이 된다(...)
야사에서는 하경복이 하필이면 난이 벌어진 그 날 입직시위를 서고 있던 갑사 친구를 만나러 궁에 들어갔다 고대로 오도가도 못하고 궁궐에 갇혀버렸다고 하는데... 어찌됐건 도성 안은 이방원과 이방간 양패로 나뉘어진 군사들의 시가전으로 개판이 나버렸고, 한창 시가전 중에 하경복은 이방원 측 병력에게 포박당하고 만다. 거기서 이방간 측 군사로 오인받은 하경복은 얼렁뚱땅 그대로 목아 달아나게 생겼다고 한다.
문제는 거기서 하경복의 '완력'과 '똘끼'가 동시에 발휘되었다는 것. 군중 사이에서 말을 타고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정안군 이방원을 발견한 하경복은 그 자리에서 자신을 붙들어 무릎 꿇리고 있던 갑사들을 모조리 집어던지고서 그대로 이방원을 향해 어택땅을 때려버렸다(...)
이방원 진영 측에선 적병이라고 잡아서 목을 치려고 했는데 바로 그놈이 갑자기 스팀팩이라도 빨았는지 우리 병사들을 다 던져버리고서 그대로 우리 대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닥돌하는 상황. 이 예상외의 사태에 방원 주변의 병력은 혼비백산했다고 한다.[2]
마음만 먹으면 이방원에게 위해를 입혀 전황을 뒤집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경복은 이방원에게 달려가는 그 짧은 순간에 최고의 선택을 했으니, 이방원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간 이 똘게이는 그대로 이방원의 말고삐를 잡고서 이렇게 간청했다고 한다.
"방금 지 힘쓰는 거 보셨지예? 아따 이런 용사를 죽이믄 므합니꺼? 함만 봐 주이소!"
...정말 또라이 같은 일화지만 어찌됐건 이 때 하경복은 무사히 명줄은 연장한 것은 물론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이 되는 이방원에게도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물론 야사 버전이라 상당히 윤색되어 보이는 이야기이고 대충 살펴보면 방간 쪽 사병이었다가 어찌저찌 싸움통 틈바구니에서 방원 쪽으로 재빨리 갈아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도 이방간 측 사병이었던 주제에 이후에도 숙위갑사 업무에서 잘리지 않고 차후 무과에도 정식으로 급제하여 태종~세종에게 중용되었던 걸 보면 디테일은 야사지만 정사상으로도 이때 제대로 이방원 눈에 들기는 했던 모양.
다만 이 일화가 하경복에겐 근자감의 근원이 되었던지, 태종대에서 하경복은 좀 막나가는 행보를 보이게 된다. 이에 대해서도 몇몆 일화가 전해지는데, 몇개만 추려보자면 이렇다.
어느날 할 짓 없이 궁궐 경비나 서며 노닥거리던 하경복의 눈앞에 웬 궁인들이 공손히 받들고 지나가는 화사한 꽃병이 보이는 게 아닌가? 다름아닌 임금께 직접 진상되는 매화 꽃병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였는지 나랏님한테 진상되는 그 매화꽃의 가지 하나를 그 자리에서 꺾어버렸다(...) 그러고는 지 투구에 꽂고서 그대로 궁궐 안을 돌아다니며 자랑하고 다녔다! 기겁한 궁인들의 고변을 받은 태종도 이때에는 ‘이건 도대체 뭐하는 미친놈인지 모르겠다.’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갑사대장 쯤 되는 ‘총제’ 직위에 오른 상태에서 중신들과 함께 기생까지 껴서 술판 벌리다 사헌부에 고발 당하질 않나, 좀 많이 막 나가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 때 태종은 가뭄을 위로한다고 금식하고 있던 때였다. 다시말해 임금이 금식하고 있는데 근위병은 기생 끼고 술판을 벌린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막 나간 것의 업보인지, 이후 하경복에겐 고생길이 열리게 된다.
하경복은 태종 2년(1402)에 드디어 제대로 식년 무과에 급제하여 당당한 무관의 반열에 오른다. 이때의 나이가 26이었으니, 이후 태종 10년(1410)에 이르기까지 경복은 그럭저럭 서울에서 무관 커리어를 타고 승승장구해나간다. 똘끼 넘치는 짓거리들을 열심히 저질렀는데도 꾸준히 진급하는 걸 보면 그걸 메꿀만큼 무재는 타고났던 모양.
그러다 하경복에겐 운명의 태종 10년이 다가왔다. 당시 건국 초의 혼란기를 지나 이제 이것저것 본격적으로 정비해 나가던 조선은 당장 초반에 가지고 있는 인재풀을 총동원해서 온 사방에 흩뿌려 뺑뺑이 돌리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인재풀은 넉넉하지 않으니 대충 일 좀 한다는 애들은 온 사방으로 뺑뺑이를 돌려버리는 것이다.
하경복이 바로 여기에 걸려들었는데, 태종 10년 하경복은 함길도 길주로 발령이 난다. 그렇다. 나중에 4군 6진이 되는 한반도 최북단 최전방 동북면 GOP 대대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하경복 입장에선 한양에서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다가 이 무슨 날벼락인지.
하지만 길주 발령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때부터 경복의 장대한 뺑뺑이 인생이 시작되는데, 길주로 갔다가 경원으로 갔다가 진짜 한반도 맨 위 경성으로 발령이 났다가 아주 최전방 끝장나는 산골짜기들로만 뺑뺑이를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예 ‘마 니가 그냥 동북면 확실히 잡아라잉~’하고 함길도병마절제사에 임명된다. 고작 1년 만에 최전방 오지 전역을 뺑뺑이 돌다 아예 그 지역 전체를 관할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바로 그 해 여진족이 대규모로 침공해 경원진 지역이 싹 털리는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조선군 사상자도 대규모로 발생하고 막 민간인들도 납치 당하고 하는 대규모 약탈전에 일시적으로 경원 지역 조선군들이 전부 남쪽으로 밀려나 버리고 지역 전체가 붕 떠버리는 상황이 되는데, 정작 휘하 병력이고 진이고 다 철수하는 그 판국에 병마절제사인 하경복에게만 철수 지시가 안 떨어졌다(...) 결국 하경복은 철수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여진족이 기세등등 활개치는 함길도에서 Man vs. Wild를 찍게 된다.
하경복의 철수명령은 아예 해를 넘겨 다음 해인 태종 11년 봄에 떨어졌다는게 충격과 공포. 그 내용도 '거기 행정구역이고 민호고 다 철수했는데 너 혼자 거기서 뭐해?' 였던걸 보면 철수지시가 중간에 누락됐거나 조정이 잊어버린 듯 하다(...)
이후 동북면 최전방 지역은 조선군과 여진족이 끊임없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불안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하경복은 그거 1년 뺑이 좀 쳤다고 조정에서 ‘경력직’ 취급을 받아 태종대 내내 뭔 일만 생기면 한반도 끝까지 직빵으로 불려 올라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하경복의 행보를 매의 눈으로 눈여겨보던 사내가 있었으니...
2.1. 세종의 눈에 들다
상술했듯이 북방에서 아주 Man vs. Wild를 찍고 간신히 서울로 철수한 하경복은 태종대 내내 무슨 일만 있으면 동북면에 불려 올라가는 일종의 파견직 사원 비스무리한 처지가 된다.그래도 태종대에는 그나마 좋았다. 원래부터 이방원의 사병 보디가드 비스무리한 인사에다가 이방원이 원체 마음에 들어해서 이것저것 태종 말년에는 태종을 따라 여기저기 사냥도 다니고 석전에서 뚜까패기도 하면서 그래도 서울에 엉덩이를 자주 붙이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하경복이 큰 실수를 범했으니, 동북면에 발도장 좀 찍어봤다고 그쪽 사정을 잘 모르는 서울 신료들 앞에서는 실컷 아는 체를 하고 다닌 것이다.
"북방산천은 천험지고가 있고 군사와 말이 또한 정강하니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축성과 설진은 꼭 필요한 것이다."
이런 식의 언사를 하며 계축진설의 편찬에도 관여하는 등 실컷 동북면의 전문가라고 으스대고 다녔는데, 이때 세종이 즉위한다. 그리고 세종은 인재가 있다면 그 효율을 극한까지 뽑아먹는 왕이었다.
하경복은 딱 태종이 승하하자마자 그대로 세종 4년(1422년)에 함길도병마절제사 자리를 다시 받고 북방으로 파견당한다. 그때 나이 44세. 아버지가 아끼던 놈이라 나름 효도한답시고 딱 아버지 숨 넘어갈 때까지만 기다려줬다. 참으로 그레이트하다.
원래 도병마절제사 자리는 2년 임기였던 듯하다. 그 2년 동안 경복은 성도 쌓고, 목책도 세우고, 병사들도 조련하고 하면서 가끔 쳐들어오는 여진족과 드잡이질도 하고 그럭저럭 북방 사단장 생활을 나름 성실히 수행했다. 사실 그 산골짜기에서 그것말고 할 게 뭐 있겠냐만은.
그러다 임기도 다 끝나서 슬슬 서울에 놔두고 온 가족들 생각도 나고 따뜻한 남쪽으로 돌아갈 생각에 싱글벙글하던 무렵인 1424년 가을, 그동안 깔짝대던 수십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략 300기가 넘는 올적합 여진족 대부대가 추수철을 노려 경원부를 급습한다. 하지만 하경복이 누구인가, 이래 봬도 잔뼈 굵은 실전갑사출신 무인이었다. 이 제법 규모 있던 전투에서 하경복은 재빨리 규합한 조선군 기병 5백기의 선두에 서서 여진족을 싹싹 털어버렸다.
이 전투는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 초 여진족을 상대로 거둔 최대 규모의 승전이었고, 이전 태종대에 있었던 경원부 약탈전 때 당한 것도 갚아준 그야말로 중앙조정으로서는 통쾌한 한방이었다.
하경복 본인도 이 전투가 퍽이나 자랑스러웠던지 늘 으스대고 다녔다고 하는데, 나중에 늙어서도 젊었을 적 자랑을 시작하면 이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을 생각하면 차라리 적당히 이기는 편이 하경복 개인에게는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 전투에서 하경복이 보여준 뜻밖의 능력치에 세종이 대단한 인상을 받아버린 것이다.
그 해 겨울, 임기가 끝난 경복에게 서울로 돌아오라는 복귀명령 대신 웬 서찰 하나가 도착한다.
내시 한홍(韓弘)을 보내어 유서(諭書)를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하경복(河敬復)에게 주었는데, 이르기를
"야전 생활에 수고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당초에 경이 진(鎭)에 부임할 때, 변방의 경보가 급하여 명령을 받고 바로 떠나 늙은 어머니를 뵈올 겨를도 없었으니, 내 실로 민망히 여겨 일찍이 사람을 보내어 경의 어머니를 존문한 것은 이미 들어서 알리라고 생각한다. 경이 북문(北門)을 수직하면서부터 국경을 방어하는 군정(軍政)은 날마다 잘되어 나가고, 간사한 도적들이 틈을 타고 나왔으나 여러 번 승전을 보고하여, 변방의 백성이 자못 편하게 쉴 수 있게 되었다. 작년 가을의 경원(慶源) 싸움에 경이 몸을 일으켜 단신으로 뛰어나와 친히 시석(矢石)를 무릅쓰고 싸워, 드디어 여러 장교가 앞을 다투면서 역전하여 적을 격파하였으니, 경의 충의에 내가 중요하게 의지하는 바이다. 경이 진(鎭)에 있은 지 거의 두 돌이 되어 가니, 규례로는 당연히 갈려서 돌아와야 할 것이나, 나는 생각하건대, 인재가 어렵다는 것을 탄식한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거니와, 장수의 임무를 어찌 경솔히 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군사는 경의 위엄과 은혜에 익숙하고 적도 경의 용감한 병략을 무서워하는데 〈어찌 경을 바꿀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장수될 만한 사람을 살펴도 경과 바꿀 만한 사람이 없다. 옛날에 송나라 태조 때에 변방에 주둔한 장수로 이한초(李漢超)·마인우(馬仁瑀)와 같은 사람은 모두 그 직에 오래 있어, 혹 수십 년이 되었어도 교대하지 아니하였다. 옛사람의 조처도 실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경은 나를 위하여 머물러서 장성(長城)이 되어, 나의 북쪽을 염려하는 근심을 없애도록 하라. 겨울날이 추우니, 근일에 편안히 지내라. 유서를 보내는데 다른 말은 더하지 않는다."
하였다.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 11월 29일 경자 2번째 기사 1424년 명 영락(永樂) 22년
"야전 생활에 수고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당초에 경이 진(鎭)에 부임할 때, 변방의 경보가 급하여 명령을 받고 바로 떠나 늙은 어머니를 뵈올 겨를도 없었으니, 내 실로 민망히 여겨 일찍이 사람을 보내어 경의 어머니를 존문한 것은 이미 들어서 알리라고 생각한다. 경이 북문(北門)을 수직하면서부터 국경을 방어하는 군정(軍政)은 날마다 잘되어 나가고, 간사한 도적들이 틈을 타고 나왔으나 여러 번 승전을 보고하여, 변방의 백성이 자못 편하게 쉴 수 있게 되었다. 작년 가을의 경원(慶源) 싸움에 경이 몸을 일으켜 단신으로 뛰어나와 친히 시석(矢石)를 무릅쓰고 싸워, 드디어 여러 장교가 앞을 다투면서 역전하여 적을 격파하였으니, 경의 충의에 내가 중요하게 의지하는 바이다. 경이 진(鎭)에 있은 지 거의 두 돌이 되어 가니, 규례로는 당연히 갈려서 돌아와야 할 것이나, 나는 생각하건대, 인재가 어렵다는 것을 탄식한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거니와, 장수의 임무를 어찌 경솔히 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군사는 경의 위엄과 은혜에 익숙하고 적도 경의 용감한 병략을 무서워하는데 〈어찌 경을 바꿀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장수될 만한 사람을 살펴도 경과 바꿀 만한 사람이 없다. 옛날에 송나라 태조 때에 변방에 주둔한 장수로 이한초(李漢超)·마인우(馬仁瑀)와 같은 사람은 모두 그 직에 오래 있어, 혹 수십 년이 되었어도 교대하지 아니하였다. 옛사람의 조처도 실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경은 나를 위하여 머물러서 장성(長城)이 되어, 나의 북쪽을 염려하는 근심을 없애도록 하라. 겨울날이 추우니, 근일에 편안히 지내라. 유서를 보내는데 다른 말은 더하지 않는다."
하였다.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 11월 29일 경자 2번째 기사 1424년 명 영락(永樂) 22년
참고로 저 세종의 서찰에 담긴 문구들에는 조선 사대부 한정으로 무시무시한 가불기가 잔뜩 걸려있다.
사대부하면 무엇인가? 바로 충과 효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금이 직접 신하 개인에게 편지를 보내 충에 호소하고 있다. 가불기 + 1
거기에 옛 중국의 고사에 신하와 자신의 일을 빗대고 있다. 한문에서 고사에 비유하는 것은 엄청난 권위를 가지는 문장이 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가불기 + 1
마지막으로 신하를 옛 중국의 명신에다 직접 빗대고 있다. 옛 명신들의 치적을 익히고 그에 버금가는 공적을 세우는 것은 유교국가를 살아가던 사대부에게 최대의 찬사이자 무자비한 가불기나 다름없다. 가불기+1
즉, 가불기 삼연벙으로 그냥 거서 말뚝 박고 내려올 생각하지 말라는 소리다. 결국, 하경복은 정규 임기 2년을 훌쩍 넘기고 1432년 판중추원사가 되어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10년 가까이 반 종신급으로 동북면 최전방에 짱박히는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