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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3 09:05:04

피에르 프랑수아 드 리고



1. 개요2. 일생

1. 개요

피에르 프랑수아 드 리고(Pierre François de Rigaud)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군인. 보드레이유 후작. 7년 전쟁 시기 누벨 프랑스 총독이었다.

2. 일생

보드레이유 후작은 1698년 11월 22일 퀘벡에서 태어났다. 그는 누벨 프랑스 주지사 필리프 드 리고와 루이즈 엘리자베스 드 조이베르트 드 소울랑즈의 아들이었다. 보드레이유 후작은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 해군에서 대위로서 복무를 시작했고 1733년 트루아 리비에르의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1742년, 보드레이유 후작은 루이지애나 주지사가 되어 1753년 2월 9일까지 맡았다. 그는 루이지애나를 잘 관리해 자신이 유능한 행정가임을 입증했다. 그후 1753년 루이지애나 주지사에서 물러난 그는 프랑스로 귀국했다가 1755년 루이 15세에 의해 누벨 프랑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755년 6월 23일 퀘벡에 도착한 그는 누벨 프랑스 방면 프랑스군 전체를 지휘했지만, 그의 명령들은 잘 먹히지 않았고 루이 조제프 드 몽캄과 같은 프랑스 본토 출신 장성들에게 자주 무시당했다. 몽캄은 그가 "너무 캐나다적"이라며 괄시했고, 보드레이유 후작은 이 때문에 몽캄과 자주 갈등을 빛었고 결국 그를 혐오했다. 또한 보드레이유는 프랑스와 연합한 인디언 부족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몽캄은 캐나다 민병대와 친프랑스 인디언부족들을 믿지 않고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된 정규군에 의존했다. 이에 보드레이유는 끊임없이 몽캄을 헐뜯었고 프랑스 궁정에 몽캄이 일을 잘못 하고 있다고 비방했고 군사 문제에 사사건건 개입했다.

그렇게 충돌을 거듭한 두 사람이었지만, 전쟁 초반에는 나름 일이 잘 풀려 1757년 몽캄의 8천 병력이 윌리엄 헨리 요새를 공략하고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758년부터 영국의 대대적인 반격에 직면했고 카리용 요새 전투에서 15,000명의 영국군을 상대로 3,600명의 프랑스군으로 대승을 거둔 몽캄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자 이를 시기하기도 했다. 1759년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제임스 울프 소장이 이끄는 영국군에게 패한 몽캄이 전사한 후, 보드레이유는 퀘벡의 항복을 승인하고 서둘러 몬트리올로 향했다. 그는 프랑스 궁정에게 퀘벡이 함락당한 건 전적으로 몽캄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애썼다.

1760년 9월 8일 영국군이 몬트리올을 포위하자 전의를 상실한 보드레이유는 제프리 애머스트 장군에게 항복했다. 그후 그는 포로로 생활하다가 1762년 프랑스로 귀환했고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어 누벨 프랑스를 상실한 것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했다. 조사 후 무죄 판결을 받은 그는 루앙 근처의 조상들의 터전에서 은거했고 1778년 8월 4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8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