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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30 17:39:57

프리트비 나라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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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초대 국왕
프리트비 나라얀
पृथ्वीनारायण शाह
파일:1686026497445.jpg
<colbgcolor=#DC143C><colcolor=#fff,#fff> 출생 1723년 1월 11일
네팔 구르카 왕궁
사망 1775년 1월 11일 (향년 52세)
네팔 왕국 데비가트
재위기간 네팔 초대 국왕
1768년 9월 25일 ~ 1775년 1월 11일
칭호 프리트비 나라얀 샤
부모 아버지 나라 부팔 샤
어머니 카우샬야바티 왕비
배우자 인드라 쿠마리 왕비
나렌드라 락쉬미 왕비
종교 힌두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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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있던 네팔을 통일한 최초의 군주. 즉 현대 네팔의 국부. 단 2008년 네팔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면서 국부의 위치도 애매해졌다(...). 그래도 이 사람 덕분에 네팔은 왕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인도 제국에도 합병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기에 국부로서의 공은 인정할 만 하다. 물론 이는 네팔을 통해 티베트 청나라를 견제하고자 했던 영국의 계획도 한 몫 했지만...

2. 생애

파일:220px-Prithvi_Narayan_Shah_(oldest_picture).jpg
원래는 구르카 지역을 기반으로 한 부족의 지도자였지만, 그가 기반으로 삼고있던 구르카 지역은 그리 풍요롭다고 할수 없는 지역이었던지라 풍요로운 지역인 카트만두를 다스리기를 원했다. 전승에 의하면 어느날 그가 카트만두가 내려다보이는 산에 올라가 눈 밑에 보이는 땅을 다 차지하겠노라고 선언했다는것. 하지만 카트만두는 그의 세력으로서는 차지하기가 버거운 지역이었다.

따라서 프리트비 나라얀은 일단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로 결심하고, 카트만두를 차지하기 위해 우선 카트만두를 둘러싸고 있는 계곡 주변지역을 차근차근 점령하기로 한다. 특히 카트만두를 쉽게 공략할수 있는 전략적 거점 마련이 중요했는데 이를 위해서 카트만두에서 3시간 정도의 거리가 있는 지역인 키르티푸르를 먼저 점령하기로 했다.

하지만 키르티푸르를 점령하는 것도 쉽지는 않아서, 무려 12년동안 3번에 걸쳐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칼루 판데이라는 총애하는 장수와 형제들이 희생되었는데 칼루 판데이는 키르티푸르 공략에 실패하고 되려 역습을 당해 도망치다가 키르티푸르 병사들에게 붙잡혀서 참수를 당했다고 한다.

총애하는 장수가 희생되자 프리트비 나라얀은 협상을 통해 키르티푸르로 들어가기 위해 그곳의 지도자들과 협상을 했고 결국 무혈입성하는 협약을 맺었지만, 중간에 키르티푸르 지도자들이 변심해 성문을 걸어잠그고 저항했고 이에 격분한 프리트비는 총공세를 펼쳐 마침내 네번째만에 키르티푸르를 함락시켰으며, 자신과 맺은 협약을 어긴 것에 대한 보복으로 키르티푸르의 모든 남자들의 코와 입술을 잘라버리도록 지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잔혹한 조치가 프리트비 나라얀과 그의 군대에 대한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카트만두에서 불과 두세시간 떨어진 키르티푸르에서 그런 잔혹한 일이 벌어졌으니 카트만두의 민심이 동요하는건 당연했을 터. 결국 그가 카트만두로 진군을 시작하자 카트만두의 통치자는 싸울 의지를 상실한채 도망쳐버렸고 1768년 12월 21일, 카트만두를 힘들이지 않고 손에 넣으면서 통일된 네팔 왕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생의 목표를 이룬이후 목표 상실에 대한 허탈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목표를 이루는데 모든 것을 쏟아부어버린 탓이었는지, 프리트비는 네팔을 건국한지 6년만인 1775년 사망하게 된다.

그의 사망은 갓 태어난 네팔 왕국에 혼란을 가져왔다. 그에게 여러 부인과 자녀들이 있었지만 자신이 갑자기 죽을 것을 예상하지는 않았던지 누가 후계자가 될것인지를 정해놓지 않았던 것. 이런 탓에 정실 왕비의 자녀들은 물론 첩의 자녀들까지 왕위를 놓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면서 이후의 치세는 혼란의 연속이 되었다.

이런 왕조의 비극적인 역사탓인지 그와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프리트비 나라얀이 네팔을 통일하고 왕이 되기 전의 어느날, 숲을 산책하다가 늙은 현자를 만났는데 그는 성자 호라크나스였다. 그는 호라크나스에게 우유 한그릇을 바치고 경의를 표했는데 호라크나스가 우유를 다 마시고서는 다시 그걸 토해내서(...) 그릇에 담은 뒤 프리트비에게 복종의 뜻으로 마시라고 내밀었다고 한다. 프리트비는 화가 나서 그 그릇을 땅바닥에 집어던졌고 발에 더러운 우유가 묻게 되었다. 이에 호라크나스도 화가 나서 앞으로 네 후손은 10대밖에 왕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는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샤 왕조는 11대 갸넨드라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데 호라크나스의 저주 탓이라는 뒷말이 무성했다고.[1] 물론 이 전설은 샤 왕조 왕실에 드리운 왕위를 둘러싼 음모와 일족의 다툼을 은유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호라크니스가 졸렬하기 따로 없다...
[1] 실제로 대를 세어보면 갸넨드라는 프리트비 나라얀의 11대손이며, 프리트비 나라얀을 제외하면 딱 10대이다. 물론, 디펜드라를 넣어버리면 11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