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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8:44:29

프리드리히 슐레겔

프리드리히 슐레겔
Friedrich Schlegel
파일:Friedrich_Schlegel.jpg
이름 카를 빌헬름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
Karl Wilhelm Friedrich von Schlegel
출생 1772년 3월 10일
신성 로마 제국 하노버
사망 1829년 1월 12일 (향년 56세)
작센 왕국 드레스덴
국적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
모교 괴팅겐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드레스덴 대학교
경력 예나 대학 교수
직업 시인, 문학평론가, 철학자, 언어학자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라이프치히, 드레스덴2.3. 예나, 베를린2.4. 예나에서의 낭만주의 모임2.5. 비엔나에서의 개종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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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시인, 문학평론가, 철학자, 언어학자.

2. 생애

2.1. 어린 시절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1772년 3월 10일 하노버에서 루터교 목사이자 시인인 요한 아돌프 슐레겔의 열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 중 한 명인 크리스토프 슐레겔(1613-1678)은 1651년 페르디난트 3세 황제에 의해 로이샤우에서 설교자로 임명되었을 정도로 뼈대있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가족 분위기는 예술적으로나 지적으로 개방적이었다. 하지만 어린 슐레겐은 항상 위축되어 있었고 건강도 나빴었기 때문에 가족에게 큰 근심거리였다. 그는 삼촌과 삼촌 형제들을 전전하면서 길러졌고, 16살 때 라이프치히의 은행가 슐렘 밑에서 견습 행원이 되었다. 슐레겔은 대학입시를 하겠다고 결심하곤 아버지께 부탁하여 그의 형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과 함께 살기 위해 괴팅겐으로 이사한다.

슐레겔은 1790년 괴팅겐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이 때 플라톤의 저서를 탐독하며 직업적 비평가 되기로 결심한다. 1년 후 그의 형이 개인 교사를 하기위해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했음에도, 슐레겔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남아 법학 공부를 계속했다. 하지만 하라는 법률공부는 안하고 이후 몇 년 동안 그리스 시와 드라마, 희극, 로마 문명, 역사 철학, 현대 독일 문학 등을 읽으며 독서광이 된다.

2.2.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1792년 1월 그는 노발리스와 친분을 맺었고, 여행 중에는 실러와도 만났다. 그들은 많은 공통 관심사를 공유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1793년 여름 그는 빚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프리랜서 작가가 되었다. 1793년 8월에는 나중에 형과 결혼하게 되는 괴팅겐 신학자의 딸이자 임신한 미망인인 카롤리네 부흐머와 친구가 되었다. 노발리스와 카롤리네는 슐레겔의 문학 작품을 응원했으며 이는 이후 슐레겔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1794년 1월 드레스덴 대학으로 이적하여, 그리스 문학 및 문화사 연구에 열중했고, 1년 뒤 프랑스 혁명, 공화주의, 민주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작곡가 요한 라이하르트를 알게 된다. 이 무렵 실러가 형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을 〈호렌〉지의 위원으로서 예나에 초대한다.

2.3. 예나, 베를린

1796년 7월 형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과 캐롤라인은 결혼했고, 슐레겔은 그들을 따라 예나로 갔다. 슐레겔은 점점 칸트와 스피노자 등의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여기서 그는 친구였던 피히테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는다. 예나에 처음 머무는 동안 젊은 슐레겔은 기성 세대 작가인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크리스토프 마틴 빌란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도 유익한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들을 다루면서 그는 이후 유명해질 그의 문학 이론을 발전시켜 나간다.

1797년 말에 형에게 보는 편지에서 '낭만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썼고, 고대 시와 관련하여 '퇴폐적인 예술'에 대한 단편들을 작성한다. 7월부터 라이하르트의 〈리체움(Lyceum)〉의 동인으로 베를린에 초대받아 그곳에서 신학자 슐라이어마허를 만났다. 슐라이어마허와 슐레겔은 작은 아파트에 같이 살면서 피히테의 《전 학문론의 기초》를 함께 읽고 플라톤을 번역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헨리에트 헤르츠의 문학 살롱에 가서 라헬 바른하겐, 루드비히 티크, 도로테아 파이트 등과 친분을 맺었다.

1798년 슐레겔 형제는 비판적 미학 잡지 《아테네움 (Athenäum)》을 창간했다. 이는 초기 낭만주의의 대표적 활동이었다. 노발리스와 함께 슐레겔은 이 잡지에서 여러 단편들을 작성했고 이 작품들은 낭만주의 문학 예술 형식으로 발전된다.

2.4. 예나에서의 낭만주의 모임

예나에서 형성된 낭만주의는 집단지성의 산물이었다. 슐레겔 형제를 중심으로 하여 노발리스, 루트비히 티크, 셸링, 그리고 카롤리네 슐레겔과 도로테아 파이트 같은 여성들도 모여들었다. 또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던 슐라이어마허와도 연대를 맺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낭만주의 서클이 만들어졌다.

슐레겔 형제는 낭만주의적 집단지성을 통해 ‘공동철학’과 ‘공동문학’을 추구했다. 공동철학이라는 용어의 ‘철학’이라는 말은 좁은 의미의 철학이 아니라 지적·예술적 사유와 창작 및 토론을 가리킨다. 독일에서는 전통적으로 철학이 인식과 사유 그리고 지식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이들은 공동철학과 공동미학이라는 기치 하에 상호 협력하고 보완함으로써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문화운동을 확립해 나갔다.

이 낭만주의적 집단지성 안에서 동생 슐레겔은 이론가이자 철학자로서 낭만주의의 이념과 이론의 초석을 놓았다. ‘낭만주의’라는 용어도 그가 만들어낸 것이다. 형 슐레겔은 문헌학자이자 비평가로서 외국문학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낭만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는 특히 셰익스피어 번역으로 유명한데, 1797년부터 1810년까지 모두 9권으로 출간된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표준 번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슐레겔 형제는 《아테네움》이라는 저널을 창간하고 그 편집을 담당했다. ‘여신 아테나의 신전’이라는 의미로서 이 저널은 비록 1798년에 창간되어 1800년까지 총 6권밖에 출간되지 않았지만 공동철학과 공동문학의 실천적 장과 기관으로 기능함으로써 낭만주의 운동이 정착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노발리스는 시문학을 대표했다. 낭만주의적 사랑과 동경을 상징하는 말인 ‘푸른 꽃’도 그의 작품에서 연유한 것이다. 티크는 대중적인 소설가와 동화작가로 활약했다. 셸링은 자연철학자로서의 역할을,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자와 모럴리스트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카롤리네 슐레겔은 작가 겸 번역가로서, 또 도로테아 파이트도 작가 겸 비평가로서 각각 낭만주의 형성사에서 확고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2.5. 비엔나에서의 개종과 죽음

1804년 4월 6일에 도로테아와 결혼했다. 쾰른에서 세계사, 철학, 논리학을 강연하기도 하고 노르만디의 아코스타성으로가서 슈탈부인에게 '초월철학'을 개인교습하기도 했다. 1808년에는 아내 도로테아를 따라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809년에는 비엔나 정부 파견군 궁정위원회 비서관으로 입명되었고 칼 대공의 사령부 소속으로 아스페른 및 바크람 전투에 참가했다.

1810년 비엔나에서 3개월간 근대사를 강연했고 2년 뒤 1812년에도 2개월간 고대 및 근대 문학사를 강연했는데, 이때 참석한 시인 아이헨도르프는 이렇게 말했다. "황제의 댄스홀에서 슐레겔의 첫 강의로 12길더를 썼습니다. 검은색 구두를 신고 있는 슐레겔은 향기로운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탁자 뒤의 높은 곳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많은 청중들과 여성들. 그리고 그 앞의 리히텐슈타인 공주와 리히노프스키 등 29명의 공주와 왕자들. 아래층에는 마치 무도회장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매우 훌륭했습니다." 1812년에 그는 잡지 《도이체스 무제움(Deutsches Museum)》을 창간하고 메테르니히의 지시를 받아 독일연방의회를 위한 정치적 건의서와 헌법초안을 작성했다.

1815년에는 교황 비오 7세로부터 그리스도 훈장을 수여받았다. 1815년부터 1818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 연방 의회 에서 오스트리아 공사관 의원이 되었고, 황제 프란츠 2세와 메테르니히를 수행하여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1820년 여름, 슐레겔은 《콩코르디아(Concordia)》지를 창간한다. 이 잡지에서 가톨릭을 옹호하고 근대 전체를 비난하면서 중세 계급 질서의 회복을 촉구했다. 그의 이러한 모습에 개신교 신자이자 자유주의자였던 주변의 지인들이 그를 떠나갔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형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과도 공개적으로 의절당한다. 1828년 비엔나에서 생철학(Philosophie des Lebens), 역사철학(Philosophie des Geschichte)을 강의하고 강연집을 출판했고 이후 드레스덴으로 가서 언어철학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던 중, 1829년 1월 12일 여관에서 뇌졸중이 일어나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틀 뒤, 드레스덴의 가톨릭 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