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Prussian coup / Preußenschlag1932년 7월 20일 프란츠 폰 파펜의 사주를 받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하여 프로이센 자유주의 정부를 해산한 사건. 바이마르 공화국의 숨통을 실질적으로 끊어 놓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사민당의 아성과도 같았던[1] 프로이센 주 정부는 이 사건을 통해 무력화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서 프로이센 주는 사실상 독일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프로이센 주를 지배함으로써 사민당을 비롯한 공화국 지지파에 큰 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 중앙정부를 나치가 장악함으로써 프로이센까지 나치가 장악해 나치 독일로의 체제 이행이 가속화되었다.[2]
2. 내용
2.1. 배경
1920년대 내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중요한 정치적 화두 중 하나는 지방 정부의 개편 문제였다. 다양한 왕/공국들의 집합체였던 독일 제국의 후신이었던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기존의 전통을 존중하여 높은 수준의 지방 자치를 보장하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와 경제적 혼란 속에서 이러한 체제는 오히려 혼란만 야기하였다.[3] 결국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중앙 정계에서는 지방 자치의 수준을 제한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할 필요성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자 논의는 상당히 진전되어 지방자치단체장을 선거로 선출하는 대신 중앙 정부에서 임명할 것을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이 정계 일각에서 제기되었지만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등에서는 반발이 극심했다.바이에른 주도 덩치가 크기 때문에 반발했지만[4] 프로이센 주는 특히 문제가 심각한 편이었는데 프로이센 주의 크기는 독일 전체의 2/3에 해당했다. 일개 지방정부의 개혁안이라고 생각할 문제가 전혀 아니었다. 이 주가 이토록 큰 원인은 독일 형성에 프로이센 왕가였던 호엔촐레른 왕가가 떨떠름했던 것과,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후의 행정구역 개편 미비가 원인이다. 독일권 전토를 통일하고자 하는 희망은 호엔촐레른 왕가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수단으로 프로이센의 군사력과 영향력 투사로 확실한 우위를 가지고자 했고 프로이센이 없는 독일 황제는 과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처럼 무의미한 정치력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빌헬름 1세는 이를 명예대령으로 칭하며 자신이 전제적으로 부릴 수 있는 프로이센 왕국이 사라지는 것을 극히 꺼렸다. 이후 독일 제국이 무너진 후에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는 기존의 독일 제국 구성국에 기반한 구획을 튀링겐 일대의 베틴 가문의 소공국들을 튀링겐주로 통폐합한 것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하였는데, 이에 따라 프로이센 왕국령이 전부 1개주로 편성되고 기존의 프로이센 정부는 주정부로서 군림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문제는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였다. 프로이센을 묶어 주던 호엔촐레른 왕가가 사라진 이상 프로이센의 발상지인 동프로이센 지역과 중심지였던 브란덴부르크를 제외한 다른 지역은 점령당한 지역이기 때문에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을 싫어했고 더 이상 프로이센 이라는 이름에 묶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독일 전체의 군부와 재계의 주도권을 쥔 프로이센 주가 정작 방대한 점령당한 지역 주민의 반발표 때문에 강한 좌파지지 성향을 띄게 만든 것이다. 사민당은 프로이센을 해체하겠다는 뉘앙스를 꾸준히 띄우고 있었지만 정작 프로이센 주정부를 장악하자 프로이센의 관료조직과 예비군조직을 장악하던 브란덴 부르크가 독립하면 예산과 인력이 쪼그라들 게 뻔하니 이를 놓치기 싫어서 정작 해체를 하지 않고 있었으며 따라서 정치적 긴장감이 계속 감돌게 되었다.[5]
이런 상황에서 프란츠 폰 파펜으로 대표되는 반좌파 성향의 인물들이 이 빈틈을 파고드는 건 당연했다. 1차대전 패전 이후 그나마 해체되지 않고 남아 프로이센군의 성격이 더 강해진 군부 역시 프로이센의 점령지역 주민에 불과했던 어중이 떠중이들이 독일 제국,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남아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에 묶인 탓에 브란덴부르크의 관료조직을 사민당이 접수하고 있는 상황을 싫어했다. 즉 투표권자, 재계, 관료조직, 군부 모두가 이 상황을 싫어하고 사민당 역시 명분상 동의하고 있었으면서도 질질 끌고 있으니 언젠가 사단이 날 것이 분명한 문제였다. 결국 파펜이 신체제(Neuer Staat)를 부르짖으면서 프로이센 주정부를 해산하려고 할 때 이렇다 할 반대 세력이라고는 사민당 정부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생겼다. 1932년 프로이센의 유권자 역시 전세계를 휩쓴 대공황이 야기한 정치극단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어서 1932년의 프로이센 주의회 총선에서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공산당이 과반(총 의석수 432석 가운데 나치 162석, 공산당 57석)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나치당과 공산당이 연정을 할 수는 없어서 사민당 주 정부가 과도내각으로 존재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2년 7월 17일 SA와 공산당원 사이에 무려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유혈 사태가 베를린에서 빚어지자 파펜은 이 사건을 빌미로 프로이센 주 정부의 행정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유혈사태도 어디까지나 핑곗거리였을 뿐이다. 유혈사태가 빚어지기 사흘 전인 7월 14일에 이미 파펜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구워삶아서 프로이센 주정부를 해산할 계획을 수립하던 판국이었다.
2.2. 진행
7월 20일에 파펜은 와병 중인 오토 브라운 주총리를 제외한프로이센 주정부의 내각 구성원들을 호출하여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하여 프로이센 주 정부를 해산했음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프로이센 내의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die öffentliche Sicherheit und Ordnung in Preußen nicht mehr gewährleistet).'는 점이 해산의 법률적 근거였다. 프로이센 주 정부의 내각 구성원들은 터무니없다면서 격렬히 반발하였지만 당연히 파펜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이어서 같은 날 정오에는 친사민당 성향의 프로이센 주의 경찰관 9만 명을 해고하고 우익 성향의 민병대원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파펜은 사민당이 이 조치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프로이센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사민당 지방조직과 산하 준군사조직인 국기단은 무장봉기를 주장했지만 내전을 우려한 사민당 지도부가 무기력하게 반응하면서 결국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다만 사민당 지도부는 법률투쟁에 돌입해서 경찰관 해임이 위법이라고 대규모 소송을 제기하기는 했다. 그러나 소송 중에 다시 의회해산으로 인해 재선거가 있었고 1933년이 되자 해임처분은 부당하다는 판결은 받았으나 재선거로 인하여 이미 새 정부가 출범했기 때문에 법률상 이익을 구할 근거가 없다하여 복직 요청은 각하처분되었고 프로이센 주 정부가 치안 확보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며 따라서 비상대권에 의한 주정부 해산이 위법임을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했고 부분적으로 승소를 거둔다. 이에 따라 오토 브라운이 이끌던 프로이센 주 정부는 명목상으로는 재건되었지만 이미 모든 정치적 실권을 중앙 정부에게 뺏긴 뒤였기 때문에 유명무실했다.
2.3. 결과
빨갱이들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을 놓쳤다. 그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Die Roten haben ihre große Stunde verpasst. Die kommt nie wieder.
파울 요제프 괴벨스, 당시 일기에서
Die Roten haben ihre große Stunde verpasst. Die kommt nie wieder.
파울 요제프 괴벨스, 당시 일기에서
1932년 당시 프로이센의 주 정부는 독일의 우경화를 막을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하지만 프로이센 쿠데타로 인하여 프로이센 주정부는 허무하게 무너졌으며 애초에 소수에 불과했던 공화국의 신봉자들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체제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었고 결국 히틀러는 불과 반 년 뒤인 1933년 1월 총리에 취임했다. 프로이센 쿠데타는 어떻게 보면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질적인 종말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1]
당시 프로이센의 행정구역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프로이센 주에는
베스트팔렌과 같은 공업지대가 많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은 사민당이 원내 1당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1932년 이전까지는 중앙당이나 민주당 등 공화국을 지지하는 정당들과 함께 의석 과반수로 연정을 구성할 수 있었다.
[2]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지방 자치 수준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심지어 경찰력을 비롯한 무력까지도 주정부가 동원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애초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의 정규군이 10만명으로 제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프로이센 주의 경찰 병력은 독일에서 가장 큰 무장 집단 중 하나였다. 만약 프로이센 주 정부가 해산되지 않았더라면, 나치의 다른 정당 강제 해산이나
수권법 도입이 그리 쉽게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3]
당장
라인란트 일대에서는
콘라트 아데나워를 위시한 반프로이센 성향의 인물들이 프로이센에서 탈퇴하여 라인란트라는 독자적인 행정 구역 수립을 열망하였으며
뮌헨 폭동과 같이 아예 바이마르 공화국 자체를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여준 지방도 상당했다.
[4]
당시 프로이센 자유주에 이어 두번째로 넓은 주였으며 프로이센이 여러 주로 갈라지고 타국에 합병당한 후 바이에른 주는 독일에서 가장 큰 주다.
[5]
이런걸 보면 결국 프로이센 쿠데타에는 약속 이행을 하지 않은 사민당도 명분을 제공한 셈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기없는 공화국의 지지세력이나 기반이 없었던 사민당으로선 이거라도 감지덕지할 상황이라 사민당 입장에서도 나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당장에 우파가 이 사건을 일으킨 것 자체가 사민당을 공격하기 위함이었고 그나마 마지막까지 공화국을 지지하던 사민당이 무력화된 후 행보를 보면 결국 이런 어정쩡한 모양새는 나름 독일이 막장으로 빠지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였던 셈이다. 물론 독일 국내 한정으로 보면 비난받을 행위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