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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2 21:20:19

프랑수아 드 쉬리엔

성명 프랑수아 드 쉬리엔
François de Surienne
별명 아라곤인(l'Arragonais)
생몰년도 1398년경 ~ 1462년 4월 8일
출생지 아라곤 왕국
사망지 프랑스 왕국 꽁데슈흐누와호
직위 용병대장, 가터 기사단 기사, 샤르트르 세네샬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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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말기에 활동한 용병대장. 20여 년간 잉글랜드 왕국에 고용되어 활약하다가 프랑스 왕국에 귀순했다.

2. 생애

아라곤 왕국 출신으로 알려졌으며, 스페인식 이름인 "프란치스코 데 소리아노(Francisco de Soriano)"로도 일컬어졌다. 문헌상에는 사리에라(Sarriera), 사리녜라(Sariñera), 시우라나(Siurana), 그리고 수레다(Sureda)로 표기되기도 했다. 일찍이 잉글랜드에 고용된 뒤 20여 년간 용병 활동을 하면서 32개 도시를 점령하고 막대한 재물을 긁어모았다고 전해진다. 1447년 11월 27일에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발탁되었다.

1444년 5월 28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 앙주의 르네의 딸인 앙주의 마르그리트를 결혼시키고 메인을 프랑스에 돌려주며, 휴전을 맺는다는 내용의 투르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메인을 넘기는 것에 대한 잉글랜드 여론의 반발과 제때에 메인을 넘겨주지 않은 것에 분노한 프랑스의 무력 행사로 인해 소규모 충돌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가, 1448년 3월 15일 메인이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양도되면서 휴전 협약이 체결되었다.

1449년 3월 24일,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브르타뉴로 쳐들어가서 푸제르를 공략했다. 휴전 기간 중에 부유한 도시인 푸제르를 점령한 것에 분노한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는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정부에 푸제르를 돌려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으나, 잉글랜드 정부는 쉬리엔이 단독으로 그렇게 했을 뿐 자기들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며 무시했다. 이에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탄원했다. 샤를은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잉글랜드군이 협약을 위반했다고 간주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노르망디를 향한 대규모 공세를 벌였고, 노르망디 전역이 프랑스의 영토로 신속하게 귀속되었다. 잉글랜드 측은 이를 어떻게든 저지하려 했지만 포미니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한편 쉬리엔은 1449년 11월 5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에게 1만 에퀴를 받고 자신과 부하들의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귀순했다. 이후 존 파스톨프의 영지였던 꽁데슈흐누와호의 영주가 되었으며, 몬트리올과 아발롱을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푸제르 성의 방어상태를 개선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에게 고용되어 겐트 반란을 진압하는 원정에 참여한 뒤 겐트 총독을 수 년간 역임했다. 1461년 샤르트르 세네샬을 역임했고, 1462년 4월 8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