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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6-06 21:46:40

프란시스 에즈베리

프란시스 에즈베리(Francis Asbury) 1745-1816 영국 출신의 감리교 전도자 미국의 감리교 기반을 만든 인물이다. [1]
프란시스 에즈베리는 영국 버밍행에서 멀지 않은 영국 스태퍼드셔 주의 햄스테드 브릿지에서 1745년 8월 20일에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적다. 그의 동역자인 존 웨스리의 본드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정원사이며,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성과 영적 성장을 부모님을 잘 키웠으며, 그의 부모인 조셉과 엘리자베스 의 집은 방이 4개 였는데, 설교자와 성경연구 집회가 열려져 있었다. 그가 13살이 되었을 때, 감리교 순회 설교자인 알렉산더 마더가 버밍햄 지역에 배정되고 그의 집회를 통해서 거룩함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는 15세에 공개적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교제 모임에서 성경구절을 읽고 설명을 하고 그 후에 다른 감리교도들의 집에서 확장하게 된다. 그가 22살이 되었을 때 영국에서 열린 감리교 총회에서 그에게 설교할 수 있는 견습 허가를 주었고, 1년 뒤 그는 허가받은 목회자로 순회 구역에 담당되었다.
그 웨슬리형제는 미국인 목사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미국에서 조지 휫필드와 그의 각성운동을 따랐던 사람들이 일궈낸 부흥이 있는 동안에 따랐던 사람들이 일궈낸 부흥이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께로 온 새로운 회심자를 도와야 한다고 외쳤고, 이들을 정기적으로 양육할 선교사가 없다면 교회가 사멸할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존 웨슬리는 1771년 8월에 열린 브리스톨 총회에서 존 웨슬리는 미국에 보낼 자원자들을 요청했다.
프란시스는 리차드 라이트(Richard Wright)와 함께 가는데 동의 했다. 그들은 잘 때 필요한 담요 두 개와 옷가지,어떤 친구가 프란시스에게 준 10파운드를 챙겨서 17기년 9월 4일 출항했다.
17기년 10월 27일 일요일에 배가 필라델피아에 정박했고,프란시스와 라이트는 바로 그 밤에,그 도시의 감리교 본부인 세인트 조지 교회(Saint George's Church)로 갔다.
프란시스는 두 명의 지역목사를 설득하여 뉴욕,웨스트체스터 (Westchester) 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지역판사에게 법원건물을 강단으로 사용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일이 잘 되었기 때문에 그는 2주 뒤 돌아왔고,비록 법원건물은 사용할 수 없 었지만 여관 주인의 집에 소박하게 교회를 세웠다.
프란시스는 저녁 식사 후 기도하기 위해 그가 초대했을 때 감리교도가 된 지역 어느 가족의 집에서 밤을 보냈다. 프란시스는 그 이 후 40여년 동안 복음전도를 반복했다. 그는 설교할 장소를 발견하면 지역가족들과 머물고,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영접하도록 그들 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했을 무렵,새로운 감리교 사회가 태어났다.
그는 선교의 지도력을 장악한 다른 감리교도와 투쟁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세 주요 세력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는 영국 성공회의 교회 통치 체제였다. 두 번째는 교회를 운영하는 방식에 있어 유럽 교회의 전형을 따르기를 거의 원치 않거나 전혀 원 치 않았던 미국인들의 민주주의적이고 독립적인 사고 방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프란시스 자신의 자존심과 다른 중요한 감리교도들의 자존심의 대립이었다.
미국의 감리교 선교는 이 기간 2가지 고난이 있었다. 하나는 감리교 운동이 영국에서 발생했기에 미국과 영국 사이의 긴장감이 기하급수적으로 자라고 잇었고, 감리교 지도자들은 영국에서 보낸 사람들이고, 감리교 사회는 영국에서 발생한 운동을 모방했고, 여전히 영국 교회의 일부인 사람들과 함께 했다. 설상가상으로 존 웨슬리가 정치와 관련하여 옳지 못한 선택을 내려 식민지가 왕권과의 화해를 추구해야 한다고 권고했고, 두 번째는 미국의 다원주의적 개신교의 환경에서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지 못한 감리교인들이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침례교도들이나 회중교회가 집회를 드릴 때 감리교도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없었다. 성공회의 경우 주일을 제외하면 빈 공간이 있었지만 미국의 교회는 더 개방적이고 성찬예식보다는 개인적인 성경연구와 기도에 강조점이 많았다. 감리교는 영국 성공회의 일원이기에 회중파교회나 장로교, 침례교와 협력해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리교파는 다른 교파처럼 교세를 확장하기 보다 자체적인 교파로서 세 영역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
영국에서 갈등이 지속적으로 커겨 독립 선언까지 되었을 때, 1775년 8월 ,프란시스는 한동안 지도력을 공유했던 토마스 랜킨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커져 가는 불안 때문에 모든 영국인 감리교 선교사는 영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내용이었다. 프란시스는 선한 목자는 양뗴를 떠나서는 안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미국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1778년 이른 봄 ,프란시스를 제외한 모든 영국 감리교도의 지도자가 식민지를 떠났다. 프란시스는 그들이 영국으로 출항할 때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어떤 이는 보내는 편이 분명히 더 기뻤으나 ,그는 자신이 다른 이들을 그리워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
이 시기는 미국인 감리교 설교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나날이었다. 사람들이 어떤 이를 채찍질을 하고,때리고,몸에 타르를 붓고 깃털을 온통 붙였다. 조셉 하틀리(Joseph Hartley)는 메릴랜드 주 ,이스턴(Easton)에 수감되었으나 침묵하기를 거부했다. 그가 감옥 창문을 통해서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그는 재빨리 풀려났는데 그를 박해한 사람들이 그가 마을 모든 사
람을 회심시킬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뉴욕과 필라델피아 도시에 영국군이 주둔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감리교 설교자들은 남부로 이동했다.
그가 식민지에서 감리교도의 일을 하도록 다시금 그를 지명하는 웨슬리의 편지를 받았을 때 틀림없이 모든 사람이 놀랐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영국과 치른 전쟁의 와중에 왜 웨슬리가 영국인을 선택하여 미국을 이끌게 했는지 궁금해 했다. 그러나 그 뒤에 프란시스는 오래도록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제 주님과 구세주만큼이나 식민지에 속했다.
1782년 2월 ,영국인은 미국과의 전쟁을 지속하지 않는데 표를 던졌다. 전쟁이 끝나자 프란시스와 감리교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전쟁의 시련 동안에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도와 목사의 수가 줄어들었지만,감리교는 실제로 초기에 조금 감소한 이후에 성장하였다. 1773년 미국 감리교의 설교자는 않명,순회 예배 설교자는 12명,성도는 4,921명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감리교 목사는 82명,순회 예배 설교자는 39명,성도는 13,700명이 되었다.
프란시스는 미국에서 감리교 운동에 관한 그의 지도력을 견고히 하기 위해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정신을 의지하였다. 따라서 그는 북부와 남부 협회가 화합하여 투표할 것을 요청했다. 이것은 존 웨슬리의 지도자를 임명하는 방법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었다.
1784년 10월 27일,이후에 크리스마스 회담이라고 불렸던 그곳에서 미국인 지도자들이 투표를 했다. 그들은 새로 형성된 감리교 감독 교회의 감독관으로 프란시스를 선택했다. 이제 감리교는 자신의 교파가 되었으며 프란시스 애즈베리는 주교로서 여행
하며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감리교는 미국에서 이전에 결코 없었던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감리교는 현재 미국 감리교가 되었고 그 뿌리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1787년,미국 감리교 지도자들은 존 웨슬리의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고,실질적으로 미국 감리교의 독립을 선언했다. 프란시스는 그가 옳았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의 직함이 무엇이든 그의 초점은 미국의 새로운 지역의 모든 모퉁이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있었다.
프란시스는 이제 강력하고 새로운 역할을 맡았다. 프란시스는 나라를 여행하고자 하는 마음에 이끌려 하나님의 말씀을 퍼트렸다. 그러나 교구 감독으로서 프란시스는 여행을 하며 성직자를 임명하고 예배를 했다. 그가 새로운 지역에 와서 성직자가 될 만한 젊은 남자를 발견할 때면 언제든 감리교 성직자로 그를 임명했고 새 구역을 지정해 주었다. 때때로 그들의 지 역에서 일을 시작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한 감리교도들이 그를 불렀다. 다른 때에,그는 아직 전도하지 않은 새 지 역을 관할할 순회 설교자를 임명했다. 따리서 감리교는 미국의 한 귀통이에서부터 다른 귀퉁이에 이르기까지 새 영역을 거쳐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이 때에 여행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비나 진눈깨비 혹은 눈이나 추위도 프란시스의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궂은 날씨에 대해 언급하는 당시의 유명한 속담이 실제로 존재했다. “오늘 밖에는 까마귀와 감리교 설교자밖에 없구나.”프란시스는 여행 정보 센터와 소식전달자의 역할을 했기에 그의 사역이 두 배가 되었다.
프란시스는 영국에서 자라는 동안 존 웨슬리에게서 감리교를 퍼트리는 체계를 배웠고,미국에서 이 일을 계속했다. 이 체
계를 통해서 설교자는 새 국가 내에서 영토의 가장 먼 곳까지 가서 설교를 했다.
이 시기에 미국의 인구는 놀라운 속도로 증가했으며 1810년, 이민으로 미국에는 인구가 백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전통이 있는 교파의 일원들은 단순히 인구가 증가하는 것과 같은 속도로 새 교회를 세울 수 없었다. 새로운 성직자를 훈련시키기 위해 세운 기관의 일원들은 그들을 보내기에 충분히 빠른 속도로 성직자를 준비시킬 수 없었고,마찬가지로 전략을 바꿀 수 있는 도구를 갖춰 주지 못했다. 반면 감리교도들은 체계에 있어 내재적으로 유연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신선함을 불어넣기 위해서 설교자는 여섯 달에서 열두 달마다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갔다.
애즈베리는 감리교 순회 설교자로서 유망한지 평가하기 위해 오직 네 가지 질문을 제시 하였다.

1) 이 사람이 진실로 회개했는가?
2) 그가 우리의 규칙을 알고 지키는가?
3) 그가 받아들일 수 있게 설교하는가?
4) 그에게 탈 수 있는 말이 있는가?

프란시스는 특정한 성도들의 필요에 의해서,그리고 성령이 그에게 내린 지시를 따라서 설교했다. 감리교 설교자는 설교 준비 에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다. 설교 준비는 책무 가운데 포함되지 않았다.
감리교 설교자는 그들의 업무의 일환으로 성경,찬송가 책,다른 종교적 문헌 등을 배포했고 설교자는 이 책을 팔아서 적은 액
수의 수수료를 받았다. 그럼에도 프란시스는 매우 적은 봉급을 받았으며 가장 간소한 옷가지조차도 살 수 없었다. 여러 순회 예배자는 누더기를 걸치고 여행했다.
프란시스는 영국에 남기고 온 부모님을 제외하면 가족이 없었다. 그는 오래 전에 결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여성에게 한 주를 제외하고 1년 내내 혼자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일이 불공정하다고 말했다. 프란시스가 동료 설교자에게 독신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강하게 이를 장려했고 이에 대해 강압적인 의견을 지속하곤 했다.
프란시스와 다른 순회 설교자들은 개척 변경 에서 사는 낭만적 인 풍경의 일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숨겨진 흔적과 막다른 길 위에서 끝나는 삶과 죽음,고통과 슬픔이라는 실제 세계의 일부였다.
프란시스는 사실상 모든 곳을 여행했다. 그는 실질적으로 모든 주를 방문 했고 매년 6,500에서 103,000km를 여행했다. 프란시스는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보통의 경우 32km가 되지 않는 길을 갈 때는 말을 타지 않는다. 그리고 종종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까지 64에서 80km를 움직인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배고픔과 추위로 고통을 겪었다.”
그를 열렬히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지역이 있었다. 어느 날 밤 프란시스가 설교를 할 때,열린 창문으로 누군가가 돌을 던졌고 프란시스는 그 돌에 맞았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였다. 다양한 형태의 연설 장소에서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예를 들어,프란시스가 선술집에서 사람들에게 설교했을 때, 취한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그에게 욕을 했다. 남부에서 프란시스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아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보며 슬퍼했다. 그는 사람들이 너덜너덜해진 옷을 입었고 더러웠으며,굶주렸고 서로에게 잔인하게 대한다고 썼다. 프란시스는 특히 아이들에게 마음을 썼는데,그의 설교자들이 분명히 아이들과 이야기하는데 힘을 기울이며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기도하도록 하였다.
1800년 6월,세 교구인 레드 강,게스퍼 강,머디 강에 배정된 목사인 제임스 맥그리디는 레드 강 교회의 연례 성찬식에 지역 성직자를 초대했다. 제임스 목사는 월요일에 성찬식과 함께 주중 행사를 개최했다. 행사 첫 날 군중은 조용했지만 월요일 지역 설교자 한 사람이 말했을 때,하나님의 성령이 여성에게 임했고 여성은 소리 지르며 노래했다. 성직자로서 성도와 함께 앉아 있던 장로교 목사인 존 맥기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고 사람들은 울었다. 곧 나머지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울었고,구원을 부르짖었다.
1801년 8월 캐인 리지에서 열린 전도 집회는 정점에 다다랐다. 이 일은 문자 그대로 부흥운동의 성령강림절이었고,영적 현상을 동반했다. 그 영적 현상으로 성령이 전도 집회를 휩쓸었고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전도 집회가 유행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은 분명히 무아지경 상태에서 엎드러지고,성령의 임재로 몸을 흔들며 열정적으로 춤을 췄다. 또한 성령으로 인해 경련을 일으키 며 웃고,모임 장소의 변두리로 엘리야처 럼 달리며(왕상 예 46을 보라),영감으로 인해 노래를 부르고 ,성령의 영향력으로 이해할 수 없게 소리 질렀다. “사람들은 그들이 짖는듯한 소리를 내고,달려들며,이상한 소리를 만들어 냈음을 보고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여러 주요 교파 성직자들은 이 주정주의 (Emotionalism)를 비난했다. 하지만 프란시스는 과잉보다는 하나님을 보았고 전도집회운동을 포용하였다. 그는 같은 하나님의 운동이 영혼을 부흥시키기를 바라면서 감리교도가 동부에서 그들 자신과 그들이 사는 구역을 위해서 직접 전도 집회의 형식을 모방해야 한다고 촉구할 정도였다. 영국에 있는 웨슬리는 이 일에 결코 관여하지 않았는데,그와 마찬가지로 프란시스의 일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집회가 장로교인들을 위한 모임이었으나,장로교인들은 이 부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 에 참석하기 위해 왔음을 알고 크게 놀란 듯이 보였다. 장로교인들은 하나님이 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일한다면,이 일을 시작했을 때 돌보았던 사람들을 돌보는 일도 또한 가능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프란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직자가 이 사람들을 돌보아야 할 필요가 있고,장로교인과 침례교인이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감리교도가 틀림없이 이 일을 할 터 였다. 프란시스는 하나님의 힘을 제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리하여 감리교는 프란시스의 남은 생애 동안 도약하였고 계속해서 성장했다.
17기년 프란시스가 미국 식민지에 왔을 때,“열세 개 식민지에 약 300명의 사람을 돌보는 4명의 감리교 설교자가 있었다. 프란시스가 죽기 3년 전인 1813년,공식 인구 조사 수치에 따르면 '전체 사회에서 171,448명의 백인과 42,850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감리교 신자였다." 프란시스가 가진 교회 운영 사항에 대한 생각은 이렇게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는 데 핵심 요소였
다. 그는 하나님이 감리교를 만들고 다른 어떤 교파보다 더 위에 올려놓았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감리교는 엄격한 통제가 없다면 번창할 수 없다.
다리우스 솔터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누구도 조직을 관리하는 기술에 있어 애즈베리를 넘어설 수 없었다. 애즈베 리가 깊이 참여하면서 동시에 권위에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는 류머티스성 관절염을 앓았다. 삶의 마지막 즈음에,증상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수레에 실어서 옮겨야 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죽어 가는 순간에도 복음을 전하기를 바 랐 고 ,무엇도 그의 열망을 멈추지는 못했다.
프란시스 애즈베 리는 1816년 3월 31일 일요일 오후 네 시에 사망했다. 아놀드가 마을에서 아주 먼 곳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가족 소유지에 프란시스를 묻기로 결정했다. 이후에,감리교 협회가 시체를 발굴해서 볼티모어로 옮겼고 그곳에서 적절한 장례식이 행해졌다. 사람들은 볼티모어에서 애즈베리의 시신을 워싱턴 기념비를 모방한 3미터 크기의 기념비 아래에 묻었다.
프란시스는 누구도 자신의 삶을 다룬 전기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지를 담은 글을 썼고,심지어 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유언 집행자들이 힘을 다해 모든 일을 하기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은 모든 아이들에게 성경을 전달해 달라고 요구했고,수천 명의 아이들이 성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이 애즈베 리와 그의 종교적 교리를 어떻게 보는지와는 상관없이 감리교인과 감리교 성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대로 미국인 가운데에서 모든 신자들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지지했다. 구원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바로 지금,그리고 영원에 이르기까지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은 계층 사이의 구분을 산산조각 냈고,오히려 자신이 속한 계층에
서 신분 상승을 이루고,그의 가족을 위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내는 아메리칸 드림의 현실을 공고히 하였다. 애즈베 리의 삶은 어떻게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을 택해서 그와 함께 위대한 여행을 하도록 이끄시는지를 보여준 증거이다. 애즈베리가 말을 타고 40만2천 킬로미터를 달렸으며 앨러게니 산맥을 60차례나 횡단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 본다. 애즈베리는 10,000 가구에 머물면서 17,000번을 설교했다.”
티플에 따르면,감리교는 다른 교파와 다음의 요소 때문에 구분된다.

교회 정치 체계, 열렬하고 효율적인 복음 전도, 이성적이고 영적이며 설교에 사용될 수 있을 만한 신학, 적극적인 선교 정신, 경험에 바탕을 둔 구원과 관계된 가르침, 예배의 자유와 따뜻함, 특히 설교와 노래. 그것은 사도시대 이후로 세기의 어떤 운동보다도 초기 기독교의 부활과 더욱 가까웠다.

[1] 부흥운동의 거장들 로버트 라이든 저작 프란시스 에즈베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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