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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1 15:24:58

폴리카르포프 I-5

파일:P-I-5.jpg

Поликарпов И-5

1. 개요2. 제원3. 개발사
3.1. 개발 실패3.2. 수용소 설계국3.3. 엔진 빼고 완성
4. 구조와 특징5. 무장6. 배치와 운용7. 독소전의 막대한 희생8. 파생형9. 같이 보기

1. 개요

1931년 처음 소개된 이 전투기는 곧바로 양산에 들어가 그 해부터 소련 공군에 배치되기 시작한 복엽 전투기였다. 등장 무렵 기준으로는 그리 구식은 아니었으나, 곧바로 단엽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급속하게 구식화되었다. 그렇지만 3개의 원형기를 포함해 803대나 만들어진 I-5는 1936년까지도 일선에서 전투기로 쓰였고, 그후로는 고등 훈련기로 사용되다가 독소전을 맞게 된다.

1941년에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여 공군의 많은 보유 기체가 지상과 공중에서 격파되자, 이 구식 훈련기는 다시 기관총 4정과 폭탄랙을 달고 경 공격기와 야간 폭격기로 재징집되었다. 이 기체는 소련의 항공기 생산이 회복되면서 일류신 Il-2 같은 현대적인 지상 공격기를 갖추게 된 1942년 초에야 전선 임무에서 물러났다.

2. 제원

승무원 : 1명
전장 : 6.78 m / 전폭 : 10.24 m (7.4 m) / 익면적 : 21.3 m2
에어포일 : Göttingen-436
중량 : 934 kg~1,355 kg
동력 : 쉬베초프 M-22 공랭식 9기통 엔진(480 hp) 1기
연료 탑재량 : 165 ℓ
최대속도 : 278 km/h
항속거리 : 660 km
상승한도 : 7,500 m
상승률 : 1,000 m까지 1분 40초
수평 선회율 : 360° 10초
무장 : 7.62 mm PV-1 기관총 2정 / 10 kg 폭탄 2발
초도비행 : 1930년 4월 29일
생산수 : 803대
운용시기 : 1931년~1942년

3. 개발사

3.1. 개발 실패

1928년 소련 정부가 시행한 5개년 계획(Пятилетка)에서 각 설계국들은 과제를 받았다. 그 당시 소련 항공업계를 선도하는 위치에 있던 투폴레프 설계국은 영국제 브리스톨 주피터 VII 엔진을 장착한 복엽 전투기의 개발을 맡게 되었다. 첫 번째 프로토타입 ANT-12는 1929년 9월 1일에 완성되었는데, 이 새로운 전투기는 당으로부터 I-5(Истребитель-5 / Istrebitel-5)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같은 시기에 니콜라이 폴리카르포프가 이끄는 설계국은 I-6라고 명명된 목제 전투기의 디자인을 지시받았다. I-5는 안드레이 투폴레프의 감독을 받으며 세부 설계는 파벨 오시포비치 수호이가 맡아서 진행했다. 투폴레프 자신은 대형 폭격기 개발에 전념했던 탓이 사실 이 전투기는 수호이 혼자 설계한 결과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1929년에 폴리카르포프의 주도 아래 I-5와 I-6 계획은 통합되었지만, 계획은 상부에서 정해준 완료 날짜까지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원형기를 제출하지 못했다.

3.2. 수용소 설계국

국가의 예산은 받아놓고 결과물을 내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사보타주 혐의를 받은 니콜라이 폴리카르포프는 9월에 OGPU에게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귀중한 두뇌를 제거하기는 아까웠는지 10년 교화형으로 감형을 받고 굴라그에 수감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OGPU는 부틸카 형무소(Бутырская тюрьма)에 폴리카르포프를 포함하여 수많은 항공기 엔지니어들을 모으고 드미트리 그리고로비치(Дмитрий Павлович Григорович : 1883~1938)의 주도 아래 전대미문의 수용소 설계국(Тюремное Бюро Дизайна : KB VT)[1]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KB VT는 1930년 초에 부틸카에서 제30번 공장 부지로 이전하였다. 그 후 폴리카르포프는 그리고로비치 대신 개발 책임자가 되었다. 이러한 인사 조치는 순전히 I-5의 설계안이 유용함을 OGPU가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1930년 3월 28일에 실물이 완성된 VT-11(Внутренняя тюрьма-11)로 명명된 1호기는 1개월 후에 비행 가능한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3.3. 엔진 빼고 완성

​V-11은 4월 30일에 처녀 비행했는데, 이때는 영국으로부터 직도입한 450 마력짜리 주피터 VII이 장착되었다. VT-12로 알려진 두 번째 프로토타입은 주피터 VI 엔진을 달고 동체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라고 새겨넣은 상태로 5월 22일에 처음 비행했다. 2호기는 꼬리날개의 형태라든가 착륙 장치의 구조 등 세부적인 곳이 달랐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2호기는 약간 더 무겁고 속도는 빠른 반면, 1호기는 항속거리가 더 길고 상승률이 약간 더 앞서고 있었다. VT-13으로 명명되고 "제16회 당대회 선물"이라는 글자가 그려넣어진 원형 3호기는 출력 600 hp의 소련제 M-15 엔진과 NACA 카울링을 장착하고 있었다. 원래 스펙대로라면 당연히 3호기가 가장 뛰어나야 했으나, 국산 엔진은 신뢰성 부족이 판명되고 생산에 옮겨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2호기는 1931년 8월 13일에 시험을 통과해 한 달 후인 9월 13일에 생산 지령이 떨어졌다. 예심 동안에 기록된 하나의 문제는 미풍을 안고 착지할 때 자꾸 기수가 돌아가는 버릇이었는데, 착륙 장치를 15 cm 줄이고 간격을 12 cm 넓혀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 간단한 개량으로 문제를 해결해낸 엔지니어는 그 댓가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이 개량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10대의 선행 제작기가 8월부터 10월 사이에서 제작되었다. 아직 국산 엔진이 충분한 성능을 내지 못하고 있었던 탓에 초기형은 모두 영국제 엔진이 장착되었지만, 자체적인 개량도 연구했다. 크랭크 케이스의 냉각 벤트 수정, 우측 날개에 피토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압력 환기 개선, 조종사를 위한 머리 받침, 지상에서 피치각을 조정할 수 있는 금속제 프로펠러 등, 다양한 면에서 개량이 시도되고 있었다.

4. 구조와 특징

I-5는 상단과 하단 날개가 엇갈리게 배치된 스태거 윙에다, 고무링 완충장치가 붙은 고정식 랜딩기어와 꼬리바퀴와 더불어 하나의 엔진과 좌석을 가진 복엽기였다. 동체는 강관을 짜맞춰 용접한 프레임에 앞부분은 얇은 듀랄루민을 씌웠지만 뒷쪽은 옥양목 원단으로 덮었다. 듀랄루민을 쓴 부분은 엔진 카울링부터 조종실 후방 가장자리까지로 최소화시키고 있다. 미륜에 달린 완충 장치를 정비하기 쉽게끔 분리형 패널도 사용되었다. 165리터들이 연료 탱크와 엔진 사이에는 방호벽을 설치했다. 또한 당시 항공기로서는 매우 드물게 소화기를 연료펌프 출구와 연료 흡입구, 기화기에 추가시켰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생존성을 높이는데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일부 기체는 바퀴를 덮는 눈물방울형 스팻을 장착하기도 했다.

당대에서는 최신이었던 Göttingen-436 에어포일을 적용한 날개는 분리가 가능했다. 상단 날개는 3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중앙은 듀랄루민 재질이고 외측은 목재였다. 마찬가지로 나무로 된 하단 날개는 1장으로 되어 있었다. 듀랄루민 재질의 N형 버팀대는 단면이 유선형에 위아래 날개와 동체를 연결시켜주고 있지만, 강철제 케이블은 없애지 못했다. 날개 외판은 합판 락카 도료를 칠해 마감했는데, 날개 앞전 일부는 경금속 박판으로 보강해놓고 있다.

에일러론은 상단 날개에만 있었고, 방향타와 마찬가지로 금속 프레임 위에다 캔버스 천을 입혔다. 꼬리 날개도 원형기에서는 강선으로 지탱되고 있었지만, 양산형에서는 아래쪽에 버팀대를 붙이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미익은 엔진 토크를 상쇄하기 위하여 3.5 mm 왼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이것은 지상에서 조절될 수 있었다.

초기형은 영국에서 들여온 엔진을 얹었지만, 나중에 생산된 기체는 대부분 쉬베초프 설계국에서 면허 생산한 480마력짜리 M-22 엔진을 올리고 타우넨드 링을 두르고 있었다. 또한 초기형은 직경 2.9 m의 목제 고정피치 프로펠러를 돌렸으나 이것들도 곧 피치각을 지상에서 바꿀 수 있는 직경 2.7 m의 듀랄루민제 프로펠러로 교체되었다.

5. 무장

이 전투기의 무장은 그 시대의 표준에 가까왔다. 600발 탄창과 동조기어가 딸린 7.62mm PV-1 기관총 2정은 OP-1 망원식 조준경으로 조준해 사격할 수 있었다. 원래는 4정의 기관총을 장착할 것을 희망했지만, 같은 무게의 추를 달고 시험해보곤 비행 성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되어 2정으로 결정된 것이다. 거기에 각각 10 kg 폭탄을 매달 수 있는 Der-5 파일런이 주날개 아래에 부착되었다. 시험적으로 250 kg 폭탄 2발을 장착하게 해주는 폭탄가가 테스트되기도 했지만, 이것은 폭탄도 달기 전에 눈에 띄게 성능을 떨어뜨리고 있어 거부되었다. 이 전투기는 소련 공군에서 실용기와 실험기를 모두 통틀어 테스트 동안에 급강하 폭격을 처음 시도한 기체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 전투기는 RS-82 로켓의 정확도 평가에도 사용되기도 했는데, 실전에서 이 로켓을 사용한 예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41년 소련에 독일군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훈련기로 쓰이던 I-5는 다시 기관총 2정을 더 추가시켜 전투폭격기로 사용되는데, 이때 예전에 취소되었던 대형 폭탄으로 무장하는 탑재 형태를 다시 시도했다. 이 형식은 지상 공격기를 뜻하는 I-5LSh라는 파생형으로 불리지만, 전투의 승패에 크게 공헌했다는 케이스는 보고되지 않고 있다.

테스트 파일럿 빅토르 L. 카르빈(Виктор Львович Корвин : 1916~1942)은 I-5의 비행 특성을 가리켜 "매우 난폭하고 변덕스러운 비행기라고 확신했다."라고 평가했다.

6. 배치와 운용

1931년 10월 1일에 54대가, 그리고 연말까지는 도합 66대의 I-5가 소련 공군에 넘겨졌다. 이 기체는 모두 코딘스키(Ходынский) 제1공장에서 제작되었지만, 후년부터는 고리키 제21공장에서도 납품을 시작했다. 제21공장은 1932년에 10대, 1933년에 321대, 1934년에 330대를 생산해 사실상 대부분의 기체를 생산했으며 제1공장은 1932년에 76대를 생산한 다음에는 I-7이라고 명명된 하인켈 HD. 37의 면허 생산으로 전환되었다. I-5의 초기 인도분은 레닌그라드 군관구 및 키예프 군관구, 바이칼 군관구로 전달되어 1932년 말이 되자 소련 공군 전투기 전력의 20%를 차지했다. 1933년 동안에는 극동 군관구 및 백러시아 군관구, 모스크바 군관구에 보내져서 그 해 말에는 전투기 전력의 40%까지 차지하여 당당한 주력기가 되었다. 1934년 말쯤에는 대부분의 기체가 폴리카르포프 I-3과 투폴레프 I-4를 갖추고 있던 소련 해군 항공대에도 전달이 시작되었다. I-5는 1936년에 신형기인 I-15로 대체되기 시작하여 1937년 말에는 전선에서 전투기로 운용은 끝났지만, 고등 훈련기로 계속 사용되었다.

7. 독소전의 막대한 희생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소련 공군은 최전선에서 엄청난 숫자의 보유 기체를 잃고 여기에 더해 안그래도 높던 사고율까지 몇 배로 치솟았다. 더군다나 이를 보충해야만 할 항공기 생산체재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어 손실 보충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총체적 난국에 빠지게 된다. 공군이, 아니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I-5는 훈련 부대에서 떠나 전선으로 향했다. 이들은 구식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소련 공군에서도 명백히 낡고 구식으로 취급되던 기종이었지만, 1942년 초까지 지상 공격기와 야간 폭격기로 전선을 날아다녔다. 공장에서 개조를 받은 I-5는 모스크바 전투에 참가한 제605전투기 연대(Истребительные Авиационные Полки / Istrebitel'nyye Aviatsionyye Polki : IAP) 및 제606전투기 연대에서 야간 폭격기로 사용되고 1942년 2월에 새로운 기체를 지급받을 때까지 전투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세계 최강의 전투기를 타고 극히 효율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실전 경험까지 쌓은 루프트바페의 노련한 조종사들에게 벌거벗은 채로 노출되었다.

제2습격기 연대(Штурмовой Авиационные Полки / Shturmovoy Aviatsionyye Polki : ShAP)는 1941년에 크림 반도에서 예비군 항공학교에 있던 훈련기들로 편성되었는데, 강화 개조도 받지 못했다. 이들은 10월 10일까지 32대의 I-5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단 며칠만에 작전 가능한 기체는 16대로 줄어들었다. 이들은 10월 18일까지 12대가 더 격추되었고, 글자 그대로 프라이팬 위의 버터처럼 녹아없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이 부대는 1942년 2월 1일에 일류신 Il-2로 장비를 보충받으며 제766습격기 연대로 재편될 때까지 몇 대 남은 I-5로 계속 출격했다. 오히려 살아남은 승무원이 신기해보일 정도로 이들의 생존율을 바닥을 기고 있었던 것이다.

제11습격기 연대는 1941년 9월 22일에 흑해 함대의 보유 기체로 급히 편성되었다. 그들은 10월 18일에 18대의 작전기와 15대의 개조를 받지 않은 훈련용 I-5를 받아 전선에 나섰다. 그러나, 11월 7일에는 11대의 작전기와 8대의 비전투기만 남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들도 1942년 2월 1일에 연대가 재정비될 때까지 I-5를 계속 날려 보냈다. 독소전을 통해 탄생한 루프트바페의 숱한 에이스들에게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 바로 I-5였으며, 실제로도 이 전투기로 첫 격추로 경험치를 쌓은 조종사가 흔했다.

8. 파생형

I-5는 그 크기가 작고 앙증맞아 러시아 공중항모 계획인 즈베노 프로젝트(Звено Проект)에 써먹기 딱 좋았다. 모함이 되는 TB-3(ТБ-3)가 3대의 I-5를 기생전투기로 탑재되었다. TB-3의 날개에 랜딩기어를 특별히 개조한 I-5를 각각 1기씩, 동체 위에 1기가 올려지는 상태로 장착되었다. 이 전투기들은 실제로는 분리와 다시 장착하는 작업이 굉장히 어렵고 상부와 하부에 도킹하는 기체가 결합장치가 서로 달라 비효율적이었던 탓에 계획 후반에는 아예 분리하는 일 없이 TB-3의 추가 엔진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화되었는데, 만일 스탈린이 이런 눈속임을 알았더라면 크게 분노했을 것이 분명하다.

I-5UTI-1(И-5 УТИ-1 / Учебно-Тренировочный Истребитель / Uchebno-Trenirovochnyy Istrebitel : 훈련 전투기)라고 명명된 기종 전환을 위한 복좌 훈련기가 제21번 공장에서 20대 정도 제작되었는데, 이 형식은 조종실을 약간 뒤쪽으로 옮기고 전방석과 복조종장치를 설치한 단순한 개조여서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



9. 같이 보기



[1] Konstruktorskoye Byuro Vnutrenniya Tyur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