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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2:30:31

폴 콘체스키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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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폴 콘체스키
Paul Konchesky
본명 폴 마틴 콘체스키
Paul Martyn Konchesky
출생 1981년 5월 15일 ([age(1980-05-05)]세)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 바킹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직업 축구선수 ( 레프트백 / 은퇴)
소속 선수 찰튼 애슬레틱 FC (1997~2005)
토트넘 홋스퍼 FC (2003 / 임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2005~2007)
풀럼 FC (2007~2010)
리버풀 FC (2010~2011)
노팅엄 포레스트 FC (2011 / 임대)
레스터 시티 FC (2011~2016)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2015~2016 / 임대)
질링엄 FC (2016~2017)
빌러리케이 타운 FC (2017)
이스트서록 유나이티드 FC (2018)
국가대표 2경기 ( 잉글랜드 / 2003~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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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전 축구 선수. 포지션은 수비수로, 레프트백이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81년 5월 15일, 런던의 바킹에서 태어난 폴 콘체스키는 우수한 유소년 선수단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유스 출신[1]으로 이후 찰튼 애슬레틱 유스팀으로 옮겼으며 1997년 찰튼 애슬레틱 FC와 계약을 체결하며 프로 무대에 입단했다.

2.1.1. 찰튼 애슬레틱 FC

1997년 8월 단 16세 97일의 나이에 옥스포드 유나이티드 FC와의 경기에 출전하면서 찰튼 애슬레틱의 최연소 1군 경기 출전자라는 기록[2]을 세웠다. 그 뒤로도 간간이 리그 경기와 컵대회 경기에 출전하여 경험을 쌓아나간 콘체스키는 2000-01 시즌 27경기에 출전하며 불과 19세의 나이에 팀의 주축 왼쪽 수비수가 되었다. 2001-02 시즌에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데뷔골을 기록했으며 컵대회를 포함해 39경기에 출전해 2골을 득점했다. 2002-03 시즌에도 총 33경기에 출전해 3골을 득점하며 맹활약해 찰튼의 프리미어리그 잔류에 기여했다. 그러나 팀에는 경험 많은 왼쪽 수비수 크리스 포월이 있어서 당시 찰튼의 감독이었던 앨런 커비실리는 콘체스키를 본래의 포지션인 왼쪽 수비 대신 주로 센터백이나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했는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뛰었던 레프트백의 위치에서 뛰고 싶어했고 그로 인해 팀을 떠나게 된다.

2.1.2. 토트넘 홋스퍼 FC (임대)

2003년 여름, 레프트백으로 출장하기를 원했던 콘체스키와 센터백이 필요했던 찰튼 애슬레틱, 레프트백을 필요로 했던 토트넘 핫스퍼 3자간의 이해관계가 맞닥뜨려져 토트넘 센터백인 크리스 페리와의 트레이드 형식으로 토트넘에 6개월간 임대되었다. 토트넘에서 프리미어 리그 12경기에, EFL 컵 3경기에 출전했다.

2.1.3.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2005년 7월 1.5m 파운드의 이적료에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했다. 2005-06 시즌 총 45경기에 출전했고, 리버풀 FC와의 FA컵 결승전에 출전해 3-2로 앞서나가는 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웨스트 햄은 종료직전 스티븐 제라드에게 동점골을 허용했고, 결국 승부차기 끝에 리버풀에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2006-07 시즌에는 포지션 경쟁자였던 조지 매카트니에게 주전 자리를 내줬고, 이적을 결심한다.

2.1.4. 풀럼 FC

2007년 3.25m 파운드 가량의 이적료에 풀럼 FC로 이적했다. 2007-08 시즌부터 2009-10 시즌까지 4시즌간 총 122경기에 출전해 2골을 넣었으며 2009년 1월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넣은 멋진 중거리골 #은 해당 시즌 EPL 올해의 골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2009-10 시즌 UEFA 유로파 리그에서도 활약해 팀의 유로파 리그 준우승에 기여했다.

2.1.5. 리버풀 FC

파일:Liverpool-v-Steau-Bucharest-UEFA-Europa-League.jpg
호지슨 시절 리버풀 최악의 먹튀
2010년 여름, 풀럼 FC의 감독이었던 로이 호지슨 리버풀 FC로 팀을 옮기며 호지슨과 함께 리버풀로 이적했다.[3] 2010년 9월 12일 버밍엄 시티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전해 리버풀에서의 데뷔전을 치렀으나 후반 22분 가벼운 부상으로 교체되었다. 9월 16일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와의 UEFA 유로파 리그 경기에서도 선발출전해 리버풀에서 첫 유럽무대 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이후 출전한 경기들에서 실수를 연발하며 팀의 연이은 졸전의 원흉이 되었고, 특히 11월 29일 토트넘 핫스퍼와의 원정경기에서 아론 레논을 막지 못해 역전골을 허용하며 많은 비난을 받았다. 결국 로이 호지슨이 경질됨과 동시에 노팅엄 포레스트로 임대되며 리버풀을 떠났으며, 지금까지도 리버풀 팬들이 역대 최악의 선수를 선정하면 항상 상위 순위권 안에 들어가곤 한다.

2.1.6. 노팅엄 포레스트 (임대)

2011년 1월 EFL 챔피언십 소속 노팅엄 포레스트로 93일간 단기임대를 떠났고, 15경기에 출전해 1골을 넣었다.

2.1.7. 레스터 시티 FC

2011년 4월 원소속팀인 리버풀 FC로 복귀했으나 케니 달글리시 체제 하에서 그의 자리는 없었고, 2011년 6월 2부리그인 EFL 챔피언십 소속 레스터 시티 FC로 이적했다. 리버풀에서의 실패한 아픔을 딛고 레스터에서는 부활하여 구단의 2013-14시즌 승격에 기여하였고,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 2014-15 시즌에도 주전 왼쪽 수비수로 출장해 팀의 잔류에 공을 세웠다. 하지만 2015년 여름 부임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은 그에게 전력외 판정을 내렸고, 결국 퀸즈 파크 레인저스로 임대된다. 그리고 레스터 시티는 그가 없는 15-16 시즌, 기적적인 우승을 달성했다. 지못미

2.1.8.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임대)

2015년부터 2016년까지 2부리그의 Q.P.R.로 1시즌간 임대되어 34경기에 출전했다.

2.1.9. 질링엄 FC

그가 떠난 레스터 시티는 2015-16시즌 드라마와 같은 우승을 차지했고, QPR에서 돌아온 콘체스키가 설 자리는 없었다. 결국 2016년 레스터 시티로부터 방출되어 자유계약으로 EFL 리그 1의 질링엄으로 이적했다. 질링엄에서 29경기에 출전했다.

2.1.10. 질링엄 FC 이후

잉글랜드의 서섹스를 연고로 한 세미프로/아마추어 클럽인 빌러러케이 타운과 이스트서록 유나이티드에서 2017년부터 2018년까지 활약하다가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잉글랜드 U-21 대표팀 주장으로 15경기에 출전했고, 한 때는 애슐리 콜과 잉글랜드의 미래를 놓고 경쟁할만큼 전도유망한 선수로 꼽혔다.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A매치에도 2경기 출전했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2017년에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아카데미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2021년 5월에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위민의 코치가 되었다. 현지 시작 2022년 5월 8일, 감독이었던 올리 하더가 팀을 떠나면서, 뒤이어 위민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

4. 플레이 스타일

뛰어난 체력과 많은 활동량을 보유하고 있고, 그로 인해 공수 양 영역을 빠르고 꼼꼼하게 커버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또 크로스 실력과 대인수비 능력도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리버풀에서 보여준 최악의 모습(...) 덕에 여러모로 점수를 많이 잃었다. 상술했듯이 유망주 시절에는 애슐리 콜과 비견될만큼 우수한 잠재성을 가진 선수였지만 안타깝게도 애슐리 콜만큼의 월드클래스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5. 여담


[1] 동세대 스타 선수들 가운데는 존 테리, 프랭크 램파드, 조 콜 등을 배출했다. [2] 이 기록은 훗날 16세 59일의 나이에 찰튼의 1군 경기에 출전한 존조 셸비에 의해 깨진다. [3] 이때 콘체스키를 영입하려고 이적료뿐만 아니라 당시 리버풀 유스의 기대주들이었던 알렉산더 카카니클리치와 라우리 달라 발레까지 풀럼에게 트레이드로 넘긴 것으로 인해 이후 콘체스키는 부진한 경기력도 모자라 이적 당시 저런 딜이 이뤄졌다는 것까지 더불어 리버풀 팬들에게 욕을 대차게 먹게 된다. 저것마저도 저 두 선수가 기대치 이하의 선수로 전락했기에 그나마 덜한 것이지 만약 한명이라도 기대 이상의 선수가 되었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리버풀의 금지어 중 하나로 취급 당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