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왕국은 해외 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서유럽에서 가장 먼저 해양을 넘어선 지역으로 진출한 국가였다.
포르투갈 왕국은 해양 무역 규모가 엄청나게 증가했을 시기부터 다른 국가들을 압도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을 시작으로 세계의 무역 방식 자체를 교체시켜 버렸다.
근대 이전까지 서유럽으로 설탕을 가장 많이 생산해서 들여 올 수 있었던 지역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
키프로스였다.
포르투갈 왕국은 설탕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경로를 찾다가 아프리카와 가까웠던
마데이라 제도를 발견하고 설탕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450년 정도에는 포르투갈 왕국은 마데이라 제도에서 연간 100톤의 설탕을 생산할 수 있었고 베네치아 측의 독점을 뚫는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아직까지는 무역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가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1500년 정도에는
마데이라 제도의 설탕 생산이 연간 2,500톤까지 급격하게 증가해서 오히려 설탕 무역이 줄어들던[1] 다른 지역을 압도하고 거의 독점 수준으로 시장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더 본격적으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개척을 시작한
포르투갈 왕국은
마데이라 제도 이외에도 아프리카에 있는
상투메 프린시페 섬들과 아메리카에 있는
브라질 대륙으로 진출했다. 1550년 정도에는
상투메 프린시페 섬들에서 생산된 설탕이 연간 2,200톤으로 엄청나게 증가했고 1580년 정도에는
마데이라 제도에서 나오는 설탕은 지력 고갈로 연간 500톤으로 줄어들었지만
브라질 대륙에서 생산된 설탕이 연간 2,300톤으로 역시 빠르게 증가했다.
포르투갈 왕국은 이미 1550년부터는 서유럽의 설탕 무역을 완전히 독점하는 수준에 도달해서 1580년이 넘어서까지 이런 상황을 유지했다.
포르투갈 왕국은 서유럽에서 가장 먼저 본국에서 아시아 지역으로 선박을 보내서 상품을 가져온 국가였다. 1500년부터 아시아 지역의 상품을 독점해서 가지고 온
포르투갈 왕국은 1590년에
네덜란드가 아시아 지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많은 수익을 올렸다. 그렇지만 1600년부터 아시아 지역으로 출항하기 시작한
네덜란드,
잉글랜드,
프랑스가 차례대로 모두 무역 규모를 늘려 나가는 동안
포르투갈 왕국은 오히려 계속 무역 규모가 감소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포르투갈 왕국에서 선원과 병사들을
소모품 취급하면서 본토의 인적자원이 급속히 고갈된 것에 있었다. 포르투갈을 치고 올라온 네덜란드의 경우 독일에서 지속적으로 빈민들이 유입되면서 새로 유입된 인구를 대신 선원으로 소모시키면서 이런 문제가 적었다. 또한 아시아 무역 수입을 왕실이 독점하는 포르투갈과 다르게 네덜란드는
주식회사 체계를 통해 투자자들과 사업가들이 합리적으로 수익을 배분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네덜란드의 해상 무역이 포르투갈의 그것보다 압도적으로 효율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는 아시아 지역의 무역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상당한 수의 식민지를 확보하였음에도 불구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참고로 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한 국가 중에서는 규모가 많지는 않았지만
덴마크,
스웨덴,
벨기에도 있었다.
유럽 국가들의 아시아 선박 출항과 운송 규모
국가
16세기
17세기
18세기
포르투갈
705,000t
370,000t
195,000t
네덜란드
65,000t
1,770,000t
2,950,000t
잉글랜드
810,000t
1,865,000t
프랑스
155,000t
1,300,000t
기타
55,000t
350,000t
합계
770,000t
3,160,000t
6,660,000t
포르투갈 왕국에서 아시아 지역의 무역을 수행한 선박은 어느 정도 정해진 항해 경로를 따라서 이동했다. 모든 선박은 공통적으로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였던
리스본에서 출발해서
인도양으로 향했다. 그런 선박 중에서 손실된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동양에 도착했다. 현지에서 상품을 조달할 목적으로 머무르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시
인도나
믈라카에 모여서 출발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리스본에 도착하면 왕복 과정에서 아시아 지역의 상품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항해 과정에서 선박이 사고 등으로 이탈하거나 다른 활동을 위해서 정착하기 때문에 모든 선박이 복귀하지는 못했다.
포르투갈 왕국은 이렇게 무역을 위한 경로 개척을 선도하면서 처음으로 아시아 지역과 직접 교류하는 국가였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선박 이동과 운송 규모
경로
16세기 초반
16세기 후반
17세기 초반
(1)
450,000t
255,000t
290,000t
(2)
405,000t
215,000t
210,000t
(3)
260,000t
210,000t
130,000t
(4)
245,000t
170,000t
105,000t
(1) 리스본에서 출발해서 인도양으로 이동
(2) 리스본에서 출발해서 인도양으로 이동, 동양에 도착
(3) 리스본에서 출발해서 인도양으로 이동, 동양에 도착,
인도나 말라카에서 다시 출발
(4) 리스본에서 출발해서 인도양으로 이동, 동양에 도착,
인도나 말라카에서 다시 출발, 리스본에 다시 도착
최종적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리스본에 도착한
포르투갈 왕국의 상품은 유럽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포르투갈 왕국은 포르투갈령
인도를 중심으로
고아에 거점을 두고 국가가 직접 무역을 주도했다.
포르투갈 왕국이 압도적일 정도로 가장 많이 가지고 온 상품은
후추였다. 여기에 말루쿠에 있는 여러
향신료와 다른 여러
향신료도 가지고 왔다. 이렇게
포르투갈 왕국은 대부분 많은 물량의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를 아시아 지역에서 가지고 왔는데 처음에는 역시 유럽 지역에서 독점해서 수출했기 때문에 많은 이익을 얻었다. 많지는 않지만 다른 상품도 가지고 왔다. 참고로 여기서는 상품의 물량을 선박의 운송 규모를 기준으로 했다.
16세기 포르투갈이 유럽으로 운송한 아시아의 상품 구성
상품
향신료
기타
후추
말루쿠
기타
물량
565,000t
65,000t
65,000t
10,000t
다른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을 시기에도
포르투갈 왕국이 가장 많이 가지고 온 상품은
후추였다. 말루쿠에 있는 여러
향신료는 거의 가지고 올 수 없게 되었지만 다른 여러
향신료를 포함해서 여전히
포르투갈 왕국이 가지고 온 상품은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시기부터는 더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기 시작해서 직물과
인디고 같은 상품도 가지고 왔다. 그렇지만 강력한 경쟁 국가들이 등장하면서 상품마다 차례대로 독점적인 영향력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선박의 운송 규모를 기준으로 물량에서도 밀리기도 했다.
유럽이 아메리카를 개발하면서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엄청나게 많은
금과
은이 수송되었다.
포르투갈 왕국도 가장 많지는 않았지만 금과 은을 수송해서 이익을 얻기도 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수송된 금과 은의 규모
종류
16세기
17세기
18세기
금
200t
200t
1,400t
은
7,500t
26,200t
39,200t
이렇게 활발하게 수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을 시기에
중국은 은을 많이 수입해서 쓰고 있었다. 당시 은을 수출하던 주요 경쟁 국가는
일본, 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해서
필리핀 도독령을 지배하던
스페인, 역시 아시아 지역으로 나가서
포르투갈령 마카오로 물량을 수송하던
포르투갈 왕국이 있었다. 그렇지만 가장 지배적인 물량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그보다는 적었지만 다음으로 많았던
스페인에 비해서
포르투갈 왕국은 그렇게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다. 결국
포르투갈 왕국은 가장 먼저 은 수출을 포기했고 다른 국가들도 물량을 줄여 나갔다.
포르투갈 왕국은 15세기부터 서아프리카 출신 노예를 매매하였으며 대서양
노예
삼각무역의 핵심 국가 중 하나였다. 1700년 이후에 대서양 노예 무역에서
포르투갈 왕국의 주요 경쟁 국가들은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가 있었지만
포르투갈 왕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노예 수요가 많았던 브라질 식민지를 바탕으로 대서양 노예 무역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브라질 식민지 덕분에
포르투갈 왕국은 아시아 인도양에서 패권을 상실한 이후에도 대서양에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참고로 많지는 않았지만
네덜란드,
북아메리카,
덴마크도 대서양에서 활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