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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17 08:02:16

펜서콜라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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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스페인군3.2. 영국-인디언 연합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81년 3월 9일 ~ 5월 8일 플로리다의 펜서콜라에서 스페인군과 영국군이 맞붙은 전투. 스페인군은 이 전투를 승리함으로서 영국령 웨스트 플로리다 주의 수도인 펜서콜라를 공략한다.

2. 배경

1779년 영국에 선전포고한 스페인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시기 영국에게 상실한 지브롤터, 마요르카 섬, 그리고 플로리다를 탈환하려 했다. 스페인 루이지아나 식민지 사령관 베르나르도 데 갈베스는 전쟁이 개시되자마자 영국령 웨스트 플로리다를 공략하기 위한 공세 작전을 개시했다. 1779년 9~11월, 그는 부테 요새를 포함한 영국의 5개 요새를 공략해 미시시피 강 하류 계곡 일대를 확보했다. 이후 1780년 3월 14일에는 모빌을 공략해 웨스트 플로리다를 위협했다.

웨스트 플로리다 주 사령관 존 캠벨은 이러한 스페인군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펜서콜라 수비를 강화했다. 펜서콜라 근처 언덕에 조지 요새를 건설했고, 도시 북쪽에 프린스 웨일즈 보루, 북서쪽에 '여왕의 보루'를 건설했으며, 만 근처에도 배란카스 콜로라다 요새를 건설했다. 그리고 1781년 초까지 16연대, 60연대 1개 대대, 그리고 제4 포병 연대 7개 중대 등을 펜서콜라 수비대로 편성했다. 여기에 발데크,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의 영국 충성파 민병대가 가세했다. 또한 많은 인디언들도 영국군을 지원했다. 1780년 3월 모빌이 공략된 후, 1,500명의 인디언들이 펜서콜라 수비대에 가세했다. 그러나 펜서콜라 공방전이 임박할 무렵, 캠벨은 적이 펜서콜라를 곧 공격할 거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인디언들을 웨스트 플로리다 각지에 흩어놨기 때문에 실제로 펜서콜라 공방전에 가담한 인디언의 수는 500명이었다.

스페인군은 1780년 10월 중순까지 펜서콜라 침공에 대한 준비를 갖췄다. 10월 16일, 11척의 군함과 51척의 수송선으로 이뤄진 스페인 함대가 아바나에서 출항했다. 그러나 이 함대는 허리케인에 직면해 많은 배들이 침몰하거나 카리브해, 캄페체 해안, 그리고 미시시피 강으로 흩어졌고 일부 함대 만이 11월 17일 아바나로 귀환했다. 하지만 갈베스는 포기하지 않고 1781년 2월 13일 호세 칼보 데 이리자발 대위가 이끄는 함대에 1,300명의 병력을 싣고 출항했다. 그는 뉴올리언스와 모빌에 주둔한 스페인군에게 자신과 합세할 것을 지시하고 3월 9일 펜사콜라 만에 상륙했다. 이리하여 플로리다의 패권을 둘러싼 영국과 스페인의 대결이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스페인군

3.2. 영국-인디언 연합군

4. 전투 경과

1781년 3월 9일 펜사콜라 만 인근 해안에 상륙한 갈베즈는 만 근처의 산타 로자 섬에 일부 병력을 파견해 포대를 설치하여 펜사콜라 만에 있는 영국 선박들을 포격하게 했다. 그러나 호세 칼보 데 이리자발 대위는 만 입구에 설치된 영국군 대포가 아군 함대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만에 진입하라는 갈베즈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에 갈베즈는 루이지애나 총독으로서의 권한을 이용해 함대 지휘권을 인수하고 3월 18일 몸소 갈베즈타운 호를 이끌고 다른 세 적의 배와 함께 펜서콜라 만으로 향해했다. 영국 포대는 즉각 발포했지만, 그들이 쏜 포탄은 갈베즈타운 호에 전혀 미치지 않았다. 다음날 갈베즈는 만 어귀에 건널목을 장악하고 육군을 그곳에 상륙시켰다. 이에 칼보는 갈베즈의 육군을 인도해야 할 임무는 끝났다고 주장하며 산 라몬 호를 이끌고 아바나로 돌아갔다.

3월 24일, 아르투르 오닐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군 척후병들이 펜서콜라 만을 거쳐 본토에 상륙했다. 이후 3월 28일 오후 초토 족 인디언 400명의 역습을 막아냈고 곧 모빌에서 진군한 스페인군과 합세했다. 오닐은 4월 첫째 주동안 펜서콜라의 방어 상태를 점검하고 갈베즈에게 이를 보고했고, 갈베즈는 포위전을 위한 광범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수백 명의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이 물자와 무기를 수송했고, 병사들은 참호, 보루 등을 파 영국군의 반격으로부터 부대를 방어했고 군대의 신속한 이동을 위한 도로를 건설했다. 그러던 4월 12일, 갈베즈는 영국의 요새를 살펴보던 중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을 맞고 부상을 입었고, 부사령관이자 그의 친구인 호세 데 에즈펠레타가 대신 지휘권을 맡았다.

4월 19일, 조지 요새를 수비하던 초토 족 인디언들이 역습을 감행하자, 스페인군은 공사를 중단하고 반격을 가해 인디언들을 격퇴했다. 같은 날 만을 향해 항해하는 함대가 포착되자, 에즈펠레타는 적 증원군으로 여기고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 함대는 호세 솔라노 보테와 몬테일 남작 프랑수아 아메르가이끄는 스페인-프랑스 연합 함대로, 후안 마누엘 드 카르발이 이끄는 육군을 수송했다. 이리하여 스페인군의 병력은 7,400명으로 늘어났고, 솔라노는 육군을 무사히 수송시킨 뒤에도 영국 함대의 구원을 저지하기 위해 남기로 했다.

4월 24일, 인디언들이 다시 기습을 감행해 5명의 스페인 장교가 부상당했다. 4월 26일, '여왕의 보루'에서 출진한 영국군 병사들이 스페인군 포대를 공격했지만, 오닐의 척후병들은 적을 가까스로 격퇴했다. 스페인 포대는 4월 30일부터 펜서콜라 요새를 향해 포격을 개시해 수비대를 괴롭혔다. 그러나 5월 5일과 6일에 허리케인이 닥쳐오는 바람에 스페인 함대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참호가 폭우로 인해 범람해 병사들이 고생하자, 갈베즈는 브랜디를 배급해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5월 8일, 스페인 포병대가 발사한 포탄 하나가 운 좋게도 크레센트 요새의 화약창고를 강타했다. 그 바람에 창고에 들어있던 화약이 폭발하면서 영국군 57명이 전사하고 요새가 파괴되었다. 에즈펠레타는 즉시 경보병을 파견해 크레센트 요새를 공략하게 했고 뒤이어 조지 요새와 프린스 웨일즈 요새에 화력을 집중시켰다. 영국군은 조지 요새에서 대포를 동원해 반격했지만, 스페인군의 화력에 압도당했다. 결국 존 캠벨 장군은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5월 10일 오후 3시 경 조지 요새에 백기를 계양하고 스페인군에게 항복했다. 이리하여 펜서콜라 공방전은 스페인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영국군은 펜서콜라 공방전에서 200명의 사상자를 기록하고 1,100명 이상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 포로들은 아바나로 이송되었다가 포로 교환을 통해 뉴욕으로 보내졌다. 반면 스페인군의 손실은 전사자 74명, 부상자 198명이었다. 이로서 영국령 서플로리다 전역을 확보한 갈베즈는 아르투르 오닐 장군을 서플로리다 주 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5월 30일 아바나로 귀환해 영웅 대접을 받았다.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는 갈베스를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웨스트 플로리다와 루이지애나 식민지 총독으로 임명했다. 반면 영국은 플로리다를 상실한 뒤 요크타운 전투에서 참패하자 전쟁을 지속하길 꺼렸고, 결국 1783년 파리 조약을 체결하면서 플로리다가 스페인의 영역임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