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군인, 정치인. 제10대 아랑다 백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 시기에 스페인 장성으로서 활동했고 이후엔 스페인의 총리로서 계몽주의를 기반으로 한 개혁 정책을 이끌었다.2. 일생
2.1. 초기 경력
아바르카는 1719년 8월 1일 스페인의 후스카 근처의 시에타모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아라곤의 유력 집안으로, 아버지는 제9대 아랑다 백작 페드로 알칸타라 아브라카 데 볼라이고 어머니는 로브레스 백작 마리아 호세파 폰스 데 멘도사이다. 아바르카는 사라고사에 있는 학교에 다녔고 1726년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볼로냐와 로마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인 1736년, 아바르카는 아버지가 복무하고 있는 스페인 연대에 합류했다. 그리고 1739년엔 안나 마리아 데 필라 페르난데스와 결혼했다.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바르카는 이탈리아에서 아버지와 함께 복무했고 같은해 카스티야 보병대 대령으로 진급했다. 1742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아바르카는 제10대 아랑다 백작에 봉해졌다. 1743년 캄포산토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아바르카는 그 여파로 1746년 군 복무를 그만두고 펠리페 5세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1747년, 아바르카는 스페인군 소장으로 승진했다.전쟁이 끝난 후, 아바르카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에서 시간을 보내며 프로이센군의 전술과 훈련을 공부했다. 1755년, 아바르카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중장으로 승진했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한 1756년, 스페인은 중립을 선언했다. 이때 페르난도 6세는 아바르카를 포르투갈 대사로 임명했다. 같은 해, 그는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황금 양털 훈장을 수여받았고 1757년 포병대 감찰관으로 승진했다. 또한 1759년 8월 3일에는 바르샤바의 작센 선제후 및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3세의 궁정에 기거하는 스페인 대사로 임명되었다.1762년, 스페인은 중립을 그만두고 프랑스와 연합하여 포르투갈과 영국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해 5월 5일, 니클라스 데 카르바할 마르퀴스 대장이 이끄는 스페인군은 포르투갈 국경에 도착하여 카르자홀레 근처에 진을 쳤다. 5월 8일, 포르투갈의 침공으로 미란다가 함락되자 군무에 복귀한 아바르카는 군대를 이끌고 8월 16일 알바르다를 포위해 8월 25일 함락시켰다. 이후 1763년 7년 전쟁이 끝났고 아브라카는 스페인군 최고위급인 발렌시아 주의 대장으로 승진했다.
2.4. 스페인의 총리
1766년 카를로스 3세는 이탈리아 출신의 에스킬라체 후작 레오폴도 데 그레고리오를 기용하여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에스킬라체 후작이 스페인의 전통인 챙이 넓은 모자와 검은색 망토의 착용을 금지하고 프랑스식 삼각 모자와 망토를 입으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에 반발한 군중이 1766년 3월 '에스킬라체 폭동'을 일으켰다. 카를로스 3세는 이 폭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에스킬라체 후작을 나폴리로 추방했지만 폭동의 배후에 예수회가 있다고 판단하고 아바르카를 카스티야 평의회 의장으로 임명했다. 아바르카는 폭동의 배후를 1년간 조사한 뒤 1767년 4월 폭동의 배후가 예수회라고 발표하고 스페인과 스페인령 식민지에서 예수회 활동을 금지했다.이후 아바르카는 카스티야 평의회 의장으로서 7년간 계몽주의를 기반으로 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교역과 관련된 낡은 규제들을 모두 철폐하고 남미 대륙 식민지와의 자유무역을 허용했다. [1] 또한 도로를 새롭게 건설하고 곳곳에 다리를 설치해 국내에 원활한 상업 활동이 이뤄지게 했다. 그러나 농업 정책에 대해서는 빈민층에게 토지를 분배하려는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지주 계층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러한 개혁 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어 경제 발전이 이뤄졌고, 쇠락하던 스페인은 중흥을 맞이했다. 그리고 아바르카는 미국 독립 전쟁에 스페인이 가담하게 하면서도 미국 독립 전쟁의 여파가 남미 식민지에 퍼지지 않도록 영국과 북미 식민지 양측의 입장을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해 1783년 평화 협약을 체결하게 했다.
1792년, 아바르카는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 직후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바르카는 중립 정책을 표방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공화정이 선포되자, 프랑스 대혁명의 토대가 된 계몽주의에 대한 보르본 왕정과 귀족들의 반감은 심화하였고, 계몽주의에 입각한 개혁 정책을 펼친 아바르카에 대한 비난이 폭주했다. 결국 1792년 9월 아바르카는 총리에서 해임되었고 카를로스 4세의 최측근인 마누엘 고도이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이후 아바르카는 체포되어 하엔에 감금되었다. 이후 스페인은 프랑스 혁명 정부에게 전쟁을 선포했으나 프랑스군에게 압도되어 막심한 손해를 입었다.
1793년 석방된 아바르카는 아라곤에 있는 그의 저택에 칩거했고 1798년 1월 9일 사라고사 근처의 에필라에서 사망했다. 향년 79세.
[1]
그러나 외국에 대해서는 이전의 규제를 그대로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