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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18대 왕후
八須夫人 | 팔수부인 |
|||
<colbgcolor=#4CCB3B><colcolor=#fbe673> 출생 (음력) |
390년대 추정[1] | ||
백제 | |||
사망 (음력) |
미상 | ||
백제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제18대 어륙 | ||
405년 9월 ~ 420년 3월 (14년 6개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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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CCB3B><colcolor=#fbe673> 휘 | 팔수(八須) | |
주군 | 전지왕 | ||
자녀 | 구이신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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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 제 18대 국왕 전지왕의 처.2. 생애
아이부인 진씨와 달리 팔수부인의 출자는 확실치 않은데, 이에 대해서는 해씨(解氏) 설[2]과 일본 귀족 여성이라는 설[3]이 제기되었다.25년에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薨]. 이에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야마토(大倭)의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王母)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서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다.”라고 한다.】.
일본서기 오진천황 25년.
일본서기 오진천황 25년.
일본서기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되는데, 414년[4] 전지왕이 사망한 후 구이신왕이 즉위한 후[5] 왕이 어려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다고 한다. 목만치는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서로 정을 통하고 왕에게 무례한 행동들을 했다가 이를 보다못한 오진 덴노이 목만치를 일본으로 소환시켰다는 기록이 있다.[6] 이후의 행적은 불명.
일본서기에 목만치와 밀통해 무례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서술한 것에 대해 목만치 등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정국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출처]
김현구 교수의 주장에 따라 실제로 일본인일 경우 부여풍의 아내 왕후 오호노오미씨 이전 첫 일본인 왕후가 된다.
[1]
아신왕의 출생연대를 역산하면
전지왕은 390년대생이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한 추정.
[2]
전지왕 시기에 해씨들이 대거 기용되었는데, 이 때 기용된 해수(解須)와 해구(解丘)가 왕의 친적이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3]
한일 관계사를 연구한
김현구 교수의 주장이다.
[4]
원문은
294년으로 되어있다.
이주갑인상으로 올린 연도다.
[5]
삼국사기에 기록된 전지왕의 사망 / 구이신왕의 즉위년도(420년)과 6년이나 차이난다.
[6]
천황의 부름을 받고 일본으로 소환했다는 내용은 일본서기의 윤색으로 보인다. 목만치가 왜로 건너간 이유에 대해선 구이신왕-비유왕 계승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들어 비유왕의 쿠데타로 인해 실각하여 왜로 건너간 것이라는 설이 있다.(홍성화, 2024)
[출처]
조경철 ( Jo Gyung-choul ). "백제 왕비 팔수부인(八須夫人)의 출자와 그 생애." 여성과 역사 -.11 (2009): 105-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