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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에리 앙리/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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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에리 앙리의 클럽 경력을 다루는 문서.

2. AS 모나코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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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앙리는 클레르퐁텐 축구 아카데미에 입단해서 두각을 나타냈고[1] 이듬해인 1993년 AS 모나코 유스팀에 들어갔다. 이때 모나코의 감독이 바로 그 유명한 아르센 벵거.[2]

앙리의 첫 프로 경기는 1994년 8월 31일 OGC 니스와의 경기. 다음달인 9월 17일에 벵거 감독이 해임되었지만 이후 감독들에게도 역시 신뢰를 받았다. 1996-97 시즌 모나코가 리그와 컵 더블을 하며 앙리 역시 커리어에서 첫 우승을 기록한다. 자국에서 열린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윙 포워드로 출전하여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한다.

1998년 월드컵의 우승 이후 1998-99 시즌 중반까지 다소 부진했고, 1999년 1월에 겨울 이적 시장에서 세리에 A의 명문 유벤투스로 향하게 된다.

앙리는 모나코에서 4시즌 반 동안 141경기에서 28골 37도움을 기록했다.

3. 유벤투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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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델피에로가 시즌 아웃을 당하며 리그에서 부진하던 유벤투스는 1,250만 유로라는 거금을 들여 앙리를 데려왔는데 망했어요. 앙리의 장점은 탁월한 돌파와 스피드였는데 유벤투스에서는 앙리의 스피드와 돌파력만 가지고 윙에 쳐박은 게 문제다. 모나코에서 데뷔할 때부터 앙리는 스트라이커로 데뷔했다.

이때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새로 부임한 인물이 카를로 안첼로티였는데 루치아노 모지에게 앙리가 스트라이커 롤을 소화 할 수 있냐고 물어보고 모지가 그냥 윙만 뛸 줄 안다길래 판매에 찬성을 했다. 참고로 안첼로티가 가장 후회하는 게 이때 앙리를 스트라이커로 써보지도 않고 팔아버린 것이라고 했던것이었다.

유벤투스에서 앙리는 반 시즌 동안 16경기 3골이라는 다소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다. 팬들도 월드컵 거품이 껴있다고 비판을 가했고 앙리는 실의에 빠져있었다. 이 6개월이 앙리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유베도 끝내 리그에서 6등을 기록한다.

위기에 빠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물은 프로 데뷔의 은사인 아르센 벵거였다. 레알 마드리드 니콜라 아넬카를 보내며 2,000만 파운드가 넘는 어마어마한 돈[3]을 거머쥐고 있던 그는 의외로 세리에 A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던 윙어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4. 아스날 FC 1기

파일:앙리/아스날.jpg
375경기 228골 92도움

모나코에서 자신을 데뷔시켜준 아르센 벵거가 감독으로, 그리고 프랑스 국대 동료인 파트리크 비에라 에마뉘엘 프티가 있어 아스날에서의 적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앙리를 가장 잘 서포트해줄 수 있는 데니스 베르캄프라는 테크니션도 있었다. 게다가 프리미어 리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스피디한 리그여서 앙리와 쿵짝이 잘 맞았다. 이러한 점들이 앙리의 성공 요소로 꼽힌다.

앙리는 1999-00 시즌부터 2006-07 시즌까지 아스날에서 8시즌(1기)을 보냈는데 이 기간 중 득점왕을 4번이나 차지했다. 특히 2001-02 시즌부터 2005-06 시즌까지 5시즌 동안에는 2001-02, 2003-04, 2004-05, 2005-06까지 4시즌간 득점왕을 차지했고 2002-03 시즌도 1골 차이로 뤼트 판니스텔로이에게 득점왕 자리를 빼앗겼다. 그러나 이 시즌에는 리그 24골 20도움이라는 전무후무한 역대급 기록을 만들어냈다. 아스날 1기는 앙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 아스날도 앙리의 활약 속에 이 기간 동안 2번의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그 유명한 아스날의 무패 우승이 이뤄진 2003-04 시즌도 바로 이때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 앙리는 말 그대로 아스날의 독보적 에이스이자 자타공인 EPL의 황제로 군림했으며, 특히 아스날에서 써내려간 기록은 언터처블 그 자체였다. 앙리가 아스날에서 기록한 총합 228골은 아스날 클럽 역사상 최다골이었다. 이러한 임팩트로 앙리는 다수의 영국 언론에 의해 아스날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물론 EPL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수식어를 부여 받는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선수 생활 말년인 2012년 1월 10일에 친정팀 아스날로의 임대 확정 후 잠시 돌아와 리그에서 1골, FA컵에서 1골을 추가하며 새로운 전설을 써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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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FC 바르셀로나

2007년 6월 25일 이적료 2,400만 유로에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바르셀로나 입단 이후 등번호는 기존의 14번을 그대로 달았다.

당시 메디컬 체크에서 바르셀로나 의료진에게 "이 몸으로 어떻게 축구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앙리의 몸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라는 이야기가 돌곤 하는데, 이런 식의 이야기는 선수 이적 시 선수 당사자의 사기진작(?), 언론 플레이 등의 이유로 나오는 이야기라 엄청나게 과장된 이야기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아르연 로번의 경우를 예를 들면 그가 첼시에서 레알 마드리드, 레알 마드리드에서 바이에른 뮌헨으로 옮길때마다 새 소속팀의 의료진은 전 소속팀 의료진의 선수 관리 수준을 폭풍 디스 하였다. 역시나 바르셀로나 이적 후 앙리는 그 엉망인 몸으로 상대편 수비진을 피지컬로 압도하는 플레이를 자주 선보여줬다. 위 서술대로 축구를 못 할 몸이었으면 전혀 불가능할 일. 물론 과장되긴 했어도 그동안 누적된 신체의 피로와 부상을 안고 뛰면서 몸에 부하가 심하게 걸렸던 건 맞다. 또한 아내와 이혼하고 양육권 싸움에서 패배한지라 멘탈적으로도 크게 흔들렸다. 아스날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날리다시피한 건 이 때문이다.

5.1. 2007-08 시즌

파일:Henry_0708.jpg

9월 19일에 펼쳐진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1라운드 리옹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면서 바르사에서의 첫 골을 넣었다. 이후 약 1주 뒤, 레반테와의 리그 경기에서 바르사에서의 첫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부상으로 자주 빠지는 사무엘 에투 때문에 공격진에 구멍이 생겼으나 리오넬 메시와 함께 그래도 어느 정도 메꿔냈다. 팀은 부진하나 그래도 본인은 어느 정도 본인의 이름 값을 해 주었다. 하지만 앙리는 아스날에서와는 달리 주로 윙어로 출전한지라 아스날에서 보여준 만큼의 득점력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전성기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결국 리그 30경기 12골 10도움을 기록하고 챔스에서도 그럭저럭 괜찮은 활약을 보였으나 무관에 그쳤다. 전체적으로 팀이 침체했던 시즌이었으며 본인 또한 아스날 시절만큼의 압도적인 면모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내 최다득점을 기록했다.

이 시즌에 앙리는 아스날 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본인의 장점을 발휘하기 힘든 역할과 스타일을 부여받았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망가져가던 팀에서 나름대로 클래스를 보여주었지만, 바르셀로나 현지팬과 언론은 그 유명한 'EPL의 왕'이 고작 이것밖에 안되냐며 앙리를 엄청 갈궈대며 실패한 이적이라고 낙인 찍었다. 지금의 파리가 그렇듯 이 시기의 바르셀로나도 팀 실패의 원인을 주로 '이방인 선수'들에게 독박 씌우고 마녀사냥을 하는 문화가 상당히 심했는데, 가뜩이나 이런 분위기를 가진 팀에서 하필 앙리는 가장 유명한 선수인지라 대표격으로 나서서 현지 팬과 언론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당한 것이다. 거기에 개인적으로는 부상의 후유증과 이혼-양육권 소송 패배까지 겹쳐 축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무척이나 힘겨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

앙리로서는 본인 커리어의 마지막 퍼즐인 빅 이어를 위해 부푼 꿈을 안고 왔지만, 막상 와보니 팀 상태는 엉망이었고 본인에게 안맞은 역할을 부여 받았으며 본인의 역량이 전보다 떨어졌다지만 팀 실패의 이유를 독박쓰는 등 첫 시작은 너무나 힘들었다.

2007/08 시즌: 47경기(선발 40경기) 19골 1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30 27 3 12 10
챔피언스 리그 10 7 3 3 2
코파 델 레이 7 6 1 4 0
합계 47 40 7 19 12

5.2. 2008-09 시즌

파일:Thierry-Henry.jpg

2008/09 시즌에는 이전 시즌보다 나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에투 또한 지난 두 시즌과 달리 건강한 모습이었다. 메시는 각성하여 최고의 선수가 되었기에 최강의 공격진을 구축했다. 역대급 시즌을 보내고 있으며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와의 격차를 매우 크게 벌렸다.[4]

앙리의 움직임 자체는 예전 전성기만 못했지만 연계능력과 골 결정력은 살아 있어서 바르셀로나의 왼쪽 윙어로 출전하면서 티에리 앙리- 사무엘 에투- 리오넬 메시의 공포의 H-E-M 삼각편대를 구성하면서 셋 다 엄청난 스탯놀이를 했다. 다만 앙리 팬들에게 아쉬운 점이라면, 앙리에게 잘 맞지 않는 왼쪽 윙어로 뛰던 점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벤투스 때와는 달리 원숙한 베테랑이 된 앙리는 윙어로도 꽤나 준수한 활약을 보였다는 점이다.[5][6]

앙리는 특히 엘클라시코 같은 큰 경기(6:2 승)에서 활약하며 과르디올라의 팀 구상에 꼭 들어가는 선수였다. 리그에서 29경기 19골을 기록하며 전 시즌보다 훨씬 나은 모습을 보였고 챔스에서도 6골[7]을 기록한다. 리그와 국왕컵을 우승했으며 챔스 4강에서 첼시를 상대로 이니에스타의 동점골로 결승에 진출하게 되며 아스날 시절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승에서 맨유를 2-0으로 꺾고[8]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한풀이에 성공한다. 앙리는 이 시즌 26골을 기록하면서 바르셀로나의 트레블과 6관왕이란 대업에 기여하였다. 이 때의 앙리-에투-메시 공격진은 바르사 역사상 MSN 다음의 최고의 공격진으로 꼽힌다.
우승 이후 꿈에 그리던 빅 이어를 만지며 기뻐하는 앙리의 모습.

2008/09 시즌: 42경기(선발 36경기) 26골 1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29 24 5 19 7
챔피언스 리그 10 9 1 5 3
코파 델 레이 1 1 0 1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1 1
합계 42 36 6 26 11

5.3. 2009-10 시즌

파일:Thierry+Henry+Barcelona+v+Sevilla+La+Liga+3SFLpcjWIcul.jpg

하지만 2009/10 시즌에는 폼이 너무 하락한 데다[9] 페드로 로드리게스, 보얀 크르키치 등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신예들과 경쟁해야했고 결국 페드로에게 밀려났다.[10]

피지컬 하락에 따른 노쇠화의 진행과 신예들의 성장으로 자리를 잃은 앙리는 2009/10시즌 모든 대회 합쳐서 10골도 기록하지 못했고 2010년 바르셀로나가 스페인 국가대표 공격수 다비드 비야를 영입하면서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앙리는 2010년 여름, FC 바르셀로나에서 미국 MLS의 뉴욕 레드불스로 이적한다.

2009/10 시즌: 32경기(선발 23경기) 4골 4도움[11]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21 15 6 4 3
챔피언스 리그 6 3 3 0 1
코파 델 레이 1 1 0 0 0
클럽 월드컵 1 1 0 0 0
UEFA 슈퍼컵 1 1 0 0 0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 2 0 0 0
합계 32 23 9 4 4

6. 뉴욕 레드불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thierry_Henry_New_York_Red_Bulls.jpg

첫 시즌 활약은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이후 18경기 동안 11골을 넣고 주장까지 하며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증명했다. 미국에선 헨리라고 부른다.[12]

6.1. 아스날 FC 2기 (임대)

파일:henry201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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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임대 이후

아스널 임대기간 동안의 활약에 고무됐는지 2012시즌엔 2011년보다 한층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준 편이다. 시즌 성적은 25경기 15골 12도움. 물론 아스널 리즈시절에 비하면 좀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후 2013시즌과 2014시즌 모두 리그 30경기 출전 10골을 기록했다. 한때 2012년 12월에 또 다시 아스날로 임대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앙리 본인도 승인했으나, 구단들의 마찰로 진행되진 못했다.

2014 시즌 이후 레드불스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 것이고 팀을 떠날 것이라고 한다. 2014 MLS 시즌 종료 이후 앙리는 선수생활 연장 대신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사

[1] 클레르퐁텐은 프로축구팀이 관리하는 일반적인 유소년클럽과는 달리 프랑스 축협이 직접 관리하는 엘리트 축구 교육기관이다. 여기 출신으로는 앙리 이외에도 니콜라 아넬카, 윌리엄 갈라스, 루이 사하, 아부 디아비, 아템 벤 아르파 등이 있다. [2] 벵거는 1987년 여름부터 모나코의 감독이었다. [3] 1997년 PSG에서 단돈 50만 파운드에 사왔는데 2시즌 쓰고 2,250만 파운드에 레알로 팔았다. 이적료 차이가 40배가 넘는다. [4] 레알은 반대로 침몰하였고, 이를 계기로 다음시즌에 갈락티코 2기가 시작된다. [5] 바르셀로나에서 윙어로 좋은 활약을 했던 것과는 별개로 앙리 본인은 스트라이커가 아닌 윙어로 뛰기를 정말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이 거기에서 뛰라고 시켰기 때문에 팀을 위해 군말없이 뛰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얻어내는 결과들도 매우 좋았으니 딱히 불평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훗날 음바페가 본인의 출전 포지션에 관하여 불만이 있다는 얘기가 돌자 앙리는 이 시절 자기 얘기를 하며 음바페가 감독의 전술적 선택을 존중하고 본인보다는 팀을 위해서 뛸 필요가 있다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6] 스트라이커로서는 전성기인 에투가 하락세였던 앙리에 비해 우세했지만 윙어로서는 앙리가 좀 더 우위에 있었다. 그리고 사실 바르사 역사상 윙어 자리에서 앙리만큼 해준 선수는 그다지 없었다. 페드로가 메시-비야-페드로 라인의 일원으로 활약했지만 앙리보다 확연히 앞섰는가를 묻자면 섣불리 대답하기 어렵다. 산체스는 바르셀로나에서는 기복이 좀 심한 편이었고 비야 역시 부상과 기량 쇠퇴로 총체적인 활약상이 만족할 수준은 아니었고, 결국 앙리 이후 한참 후에 네이마르만이 충공깽스러운 활약상을 선보이며 윙어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었다. [7] 플레이오프 1골 포함 [8] 특유의 리듬으로 리오 퍼디난드를 탈탈 털기도 했다. [9]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유일한 이유였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이뤄지면서 바르셀로나에서의 동기부여 자체가 없어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고질적인 등부상이 악화되어 신체능력이 급감하였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냥 나이를 많이 먹었다. 애초에 앙리는 20대의 전성기 폼은 아스날에서 다 태웠고 바르샤엔 클라스가 남은 노장인 상태로 왔었다. 앙리는 30살 딱 되면 닥치고 노장이었던 시절의 올드 해축팬 세대의 선수다. [10] 앙리가 결정적으로 신예 페드로에게 밀려난 원인은 수비 가담 문제였다. 바르셀로나의 수비시 전방압박에서 메시와 앙리는 최전방을 압박하는 에투의 뒤를 받쳐 주면서 패스 루트를 측면으로 한정시키거나 직접적인 가로채기를 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본래 스트라이커인 앙리는 측면에 너무 많은 공간을 내 주는 경향이 있었다. 공격 스탯이야 나무랄데 없었지만 말이다. [11] 후반기 뉴욕 레드불스 출전 기록 제외 [12] EPL 감독들의 인터뷰 영상을 자주 보는 사람들 혹은 FC 온라인 유저들은 대체로 해설진들이나 기자들이 원 발음에 기초해서 이름을 불러주는걸 알 수 있다. 물론 호날두는 해외에선 로날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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