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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20:14

타토미초

田富町

일본 야마나시현 고후 분지 중앙남부 지역에 있는 시로 2006년 2월 20일, 나카코마군 타마호초, 히가시야츠시로군 토요토미무라와 합병되어 주오시가 되었다.

잦은 수해 피해로 후에후키와 카마나시 하천이 범람원에 해당되었고, 정착지가 곤란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선사시대 고고 유적지의 분포는 적었다. 구석기 시대 유적은 지질학적인 조건 때문에 가능성이 낮았고, 승석문 시대 유적도 미고하게 지상에 있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야요시대 때는 가장 오래된 굽 그릇이 표면으로 채집되었고, 고분 시대 때는 토기나 고분군이 확인되어 고대까지 지속적으로 촌락지가 장만되었다.

고대 시대 때는 안라쿠쥬인령의 코이카와 장원과 도호쿠인령의 후세 장원 등 셋칸케령이 성립되어 있는 것 외에 이치카와 장원이나 나고 장원 일부에도 해당되어 있다.

카마쿠라시대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촌락 유적지인 후세 코이가와 유적이 소재되어 있고, 후세 장원 구역을 나타낸 카마쿠라 시대 후반기 때의 오륜탑과 전국시대 사찰의 잔존물이 검출되었다.

전국시대 때는 카마나시 강의 주류가 흐르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빈번하게 수해로 피해를 당했다. 여기에 근세 초반에는 가이시 류오지역에 신겐 둑이 쌓여졌고, 카마나시 강 지류 미다이 강 유역 호수 조치가 취해지면서 물길은 고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수해는 이어졌고, 마을이 하나씩 자주 사라질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니시하나와무라에 나이토 세이우에몬이 경영했던 글방 시학관을 비롯해 히가시하나와무라에 1845년부터 1873년까지, 후지마키무라에 1824년부터 1865년까지 개원한 서당 요로칸이 있었다. 1751년에는 세이우에몬이 고후에서 교대 근무한 마츠다이라 사다마사와 함께 카이국지 편찬에 힘을 쏟았다.

1836년에는 카이 일국 규모의 백성들이 단결하며 봉기를 일으킨 텐포운동에서 후세, 히가시하나와, 니시하나와 등 모든 마을에서 깨뜨려 부수고 피해를 받았다.

근대 시대에는 수해가 많았고,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55년에 카마나시 강과 후에후키 강의 제방을 튼튼하게 만들고 하천 개수 완화를 마쳤다. 한때 다슬기의 서식지이자 풍토병이 원인이었던 우스이 늪은 종전 뒤인 1977년에 매립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판국에 악화된 1943년에는 공장의 소개로 타치카와 비행기가 타토미 초로 이전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는 하천개수로 인하여 벼농사에서 오이나 토마토 등을 재배하는 근교 농업으로 전환되었다. 1977년에는 야마노카미에 센터나 회관을 포함한 유통단지가 설계되어 광역 기점이 되었고, 고후 시가지의 확대로 인하여 일대에는 베드타운화도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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