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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4 07:18:53

타키가와 카즈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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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사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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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5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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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60px-Takigawa_Kazumasu.jpg 파일:1024px-Japanese_Crest_Maru_ni_tate_Mokkou.svg.png
다키가와 이치마스 둥근 세로 오이 가몬[1]

瀧川一益(롱천일익)[2]
(1525 ~ 1586.10.21)

나아갈 때도 타키가와, 물러날 때도 타키가와(進むも引くも瀧川).[3]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일본 전국시대 무장.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활약하였다.

2. 생애

타키가와 가즈카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등용시기는 대략 1560년 전후가량으로 히데요시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닌자 마을이 있는 코우가 지역 호족의 아들이라서 본인도 닌자 출신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철포술과 병법에 능하여 아케치 미츠히데, 시바타 카츠이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다 가문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오다 가문 내에는 '나아갈 때도 타키가와, 물러갈 때도 타키가와'라는 말이 퍼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세 지역 수군을 인솔하는 대장 역을 맡기도 했다.[4]

내정에도 능해 1578년의 아즈치 성 축성, 1580년의 야마토 지역의 측량조사를 미츠히데와 함께 실시했다. 이렇듯 통솔, 군략, 모략, 철포, 정략 등 그 능력은 거의 미츠히데와 맞먹는 준 먼치킨.

1582년, 노부타다를 도와 다케다 가쓰요리를 쓰러뜨리고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킨 후 그 보상으로 시나노국 2개 군(郡)과 고즈케국, 간토 간레이의 권한을 받게 된다.[5] 그러나 거기까지가 인생의 최상의 지점이었다. 혼노지의 변이 발발하고 인근 지방의 호조 우지나오와 붙어 패배한다. 일명 칸나가와 전투(神流川の戦い)로 5만 이상의 호조군을 상대로 1만 8천의 압도적 열세에 더해 노부나가 사후 어수선한 상황 속에 다른 무장들이 비협조적인 태도여서 질 수밖에 없는 전투였다. 그럼에도 분전하여 초반엔 우세하고 우지나오군을 물러나게 했다는 점에서 짬밥이 어디 안 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 패퇴하고 도망치듯 관동을 떠나지만, 키요스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하여[6] 중신의 대열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시바타 카츠이에를 지지했고 카츠이에와 히데요시 간 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영지인 이세국에서 배가 넘는 히데요시 군을 상대로 농성하며 끈질기게 버텼으나,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카츠이에와 노부타카가 패배해 자결했기 때문에 의미없는 싸움이 되고 말아 이후 히데요시에게 항복, 남은 이세의 영지마저 몰수 당한다.

1584년, 은거했음에도 히데요시에게 호출당해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여러 성을 빼앗는 듯 나름 활약했으나, 이에야스의 주력 부대에게 패퇴하여 이세로 퇴각한다. 그래도 이때 참전한 공으로 차남에겐 1만 2천 석, 본인은 3천 석의 영지를 받았다. 그후 1586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일반적이지만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다른 전설이나 기록을 보면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났음에도 의외로 말년은 평안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후 은거한 뒤로는 히데요시의 관동 방면의 외교를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카즈마스 사후 자손들은 하타모토나 다이묘의 가신이 되거나 의사가 되어 메이지 유신때까지 이어졌다.

3. 대중매체에서

오다 사천왕 중에서 시바타 카츠이에 아케치 미츠히데는 창작물에서도 비중있거나 특색있게 나오는 편인데 이 사람과 니와 나가히데는 창작물에서의 대접이 박한 편.[7]사실 나가히데는 사람 자체가 상대적으로 수수한 인물이라 그렇다고 해도 이 사람은 닌자 출신이라는 설이 있을 만큼 출생 전반기가 수수께끼스러운 면도 있어서 각색하기 좋은 요소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이 초라해서인지 창작물에서도 잘 나오지 않는 편. 히데요시, 미츠히데, 가츠이에 같은 오다 가문 중신들이 워낙 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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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長様に逆らうとは愚ろか者めが...默って逝けぃ!!
How silly you are resist our lord Nobunaga. Go away! Say nothing!
노부나가 님에게 대들다니, 어리석은 놈. 닥치고 꺼져!
파일:滝川一益2.jpg 파일:滝川一益.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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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파일:external/90e0292e17cb43358606d5550aec89ef9558aa44740e216db62adefec033964c.png 파일:external/749986b5674078f698978e4dd4a307d6f328610b80dbd4cdb91307b33df95295.png 파일:external/blog-imgs-55-origin.fc2.com/9130078.png
NPC 보스 모습 쓰러진 모습


[1] 다키가와 이치마스의 가문으로, 오이를 둥근 세로 오이로 표현해서 만든 다키가와 가의 가몬이 되었다. [2] 이 무장의 이름은 흔히 '타키가와 카즈마스'라고 하지만, 이름을 '이치마스'라고 읽기도 한다. 독음이 이치마스라고 달려 있는 사료도 있고, 오늘날 타키가와가의 후손도 一자를 통자(일종의 돌림자)로 쓰는 경우 '이치'라고 읽어서 사실은 '타키가와 이치마스'라고 읽는 게 올바르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카즈마스'라고 읽으며, 일본 위키피디아에는 이치마스와 카즈마스 둘 다 기재하였다. [3] 항상 오다 가의 선봉, 최후미를 맡아 싸웠기 때문. [4] 그래서 슈팅 게임 바사라 2에서 그가 보스인 4 스테이지도 바다 위에서 진행한다. [5] 노부나가가 카즈마스에게 간토 지역을 평정하라며 내린 정식 직책은 관동수호, 관동어경호 등이었고, 간토 간레이는 아니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카즈마스가 받은 직책들과 비슷한 유형의 직책을 찾다가 업무 등이 비슷한 간토 간레이를 따다가 붙인 것. [6] 했다는 설도 있긴 하다. [7] 그 예시로 카츠이에와 미츠히데는 최신작들인 4편 기준으로 < 전국무쌍 시리즈>, < 전국 바사라 시리즈>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출연했지만 카즈마스와 나가히데는 이 두 작품에서 플레이어블로 출연하지 못했다. 나가히데는 영화 < 기요스 회의>를 통해 멋진 재해석으로 재탄생되었다. [8] 이름에 瀧(폭포)가 들어간다. [9] 닌자들은 대개 정치력이 낮다. 대표적으로 핫토리 한조의 경우 정치력이 1. [10] 범용 전법이라고는 해도 전체 무장 중 6명밖에 보유자가 없는 나름 레어한 전법이며 지속 시간이 짧을 뿐 효과도 강력한 전법이다. 전법코스트가 2밖에 안 돼서 오다 노부나가의 삼단격, 스즈키 시게히데의 팔지오같이 4코스트 먹는 전법보다 부담없이 사용가능한 것은 덤. 카즈마스 외에는 아케치 미츠히데, 시모츠마 라이렌 등이 보유하고 있다. [11] 다케다 가문과의 싸움에서 풍림화산이 걸린 다케다 군대를 지워버릴 때 유용. [12] 물론 후마 소속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시작부터 가지고 나오는 무장들은 카즈마스 외에도 몇 있기는 하다. [13] 칸나와 란마루의 스승인 츠치미카도 하루아키의 말에 의하면 노부나가가 일본에 있을 때 마왕 강림의 제물 의식을 혼노지로 정한 이유가 높은 순도의 영력이 집중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쿠노 공주에 의해 혼노지가 메이플월드로 오게 되자 혼노지의 영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버린 바람에 지금 혼노지는 전투의 여파로 의식 장소로서의 가치와 거처로서의 필요가 없어짐과 동시에 지킬 필요도 없는 폐허가 되어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