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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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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陶鑄
간체 陶铸
한국식 독음 도주
영문 Tao Zhu
출생 1908년 1월 16일 청나라 후난성 치양현
사망 1969년 11월 30일 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허페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직업 군인, 정치가
종교 무신론

1. 게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2.3.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2.4. 문화대혁명의 시련과 사망
3. 가족관계4. 참고 문헌

1. 게요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1926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정치 선전활동을 벌이다가 1933년 5월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난징 중앙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37년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면서 풀려났다. 출옥 후 정치 선전 활동을 전개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광시성 서기 대리를 맡았을 때 좡족을 대대적으로 박해했고 국무원 부총리,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장, 정치국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에 휘말려 실각된 후 호된 탄압을 받았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타오주의 집안은 본래 후난성의 평범한 농민이었으나, 아버지 도철쟁(陶鐵錚)이 형남 남로 우등사함학교를 졸업하고 신해혁명에 참가한 뒤 동료들과 합작해 작은 탄광을 세우면서 사회적 신분이 높아졌다. 1908년 1월 16일, 타오주는 이렇듯 탄광업에 종사하며 나름 잘 사고 있던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굶을 걱정 없이 잘 지냈으나 10살이던 1918년에 그의 아버지와 셋째 숫부가 직예군벌 우페이푸의 부하 시아오야오난(蕭耀南)에게 살해당했고, 타오주는 학업을 중단하고 친척집으로 들어가 수년간 독학했다.

1926년, 광저우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한 타오주는 같은 해 조세가(趙世嘉), 천바오화(陳葆華) 등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년 4월 초, 타오주는 우한에 파견되어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선전부에 참여했다. 그런데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하고 왕징웨이가 7월 15일에 국공결렬을 결정하면서 국민당의 공산당원 체포령이 선포되자, 타오주는 우한을 떠나 난창 폭동에 참여했으며 광저우 폭동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혁명군 제4군대 경비대에 참여했다.

1929년, 타오주는 중국 공산당 복건성위원회 비서, 성위원회 조직부장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그리고 1930년 5월, 타오주는 12명의 동료와 함께 샤먼 교도소를 급습해 40여 명의 공산당원을 무사히 구출하고 국민당 소속 교도관 20여 명을 살해하거나 상해를 입혔다. 이 사건은 중국 전역에서 '샤먼 대탈옥'이라고 불렸고, 타오주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33년, 타오주는 상하이에 있는 중국 공산당 중앙기관에서 일하다가 국민정부에 체포되어 난징 헌병 사령부로 압송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난징 중앙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수감 생활 동안 전향 권유를 여러차례 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했다. 그러던 1937년, 저우언라이 예젠잉이 국민정부에게 타오주 등을 석방해줄 것을 요청했고, 서안 사건 이후 공산당과 손을 잡고 일본에 대항하기로 한 국민정부는 이 요구를 승낙하고 9월 26일에 타오주 등 7명을 석방했다.

2.2.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

타오주는 석방 후 후베이성 당위원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을 맡았다. 1938년 10월 우한회의가 끝난 후, 타오주는 지방 유격대를 조직하여 대홍산을 근거지로 삼아 일본군에 대항했으며 밤마다 일본군이 주둔한 윈멍(雲夢)현을 습격했다. 이후 리셴녠이 조직한 신사군에 합류하여 지대정위를 담당했다. 그후 1940년에 옌안으로 돌아와 1943년 이후로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 비서장, 총정치부 사무총장 겸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또한 1945년 중국 공산당 7대회의에 참가해 상하이와 광둥성 계변 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변경 당조직의 부서기 겸 팔로군 예하 제3지대의 부정위를 맡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후, 그는 태항산과 산해관 동쪽 방면으로 파견되어 9월 중순에 심양에 도착하여 랴오닝성 당위원회의 비서가 되었고 쓰핑(四平)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탄약 보급 및 부상병 운송과 같은 물류 조직을 담당했다. 1947년 9월, 타오주는 동북 민주연합군 제7종대 정치위원회에 배속되었고 랴오선(遼瀋) 전투 후 중국 공산당 선양시 당서기와 선양 군사관제위원회 부주임을 역임했다.

1949년 1월, 타오주는 동북 야전군을 따라 심양을 떠나 동북 야전군 정치부 부주임으로 부임해 산해관에 들어가 핑진(平津) 전역에 참가했다. 그해 1월 21일, 타오주는 인민해방군 핑진전선사령부의 전권대표로서 녜룽전과 함께 베이징 수비 사령관 푸쭤이(傅作義)와 협상하여 인민해방군이 베이징에 무혈 입성할 수 있게 했다. 그해 5월, 타오주는 중국 공산당 중화중국 위원 겸 제4야전군 및 화중군구 정치부 부주임을 맡아 후안 3진의 인수 업무를 맡았다.

2.3.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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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뤄루이칭과 함께 광둥성의 후추밭을 시찰하고 있는 타오주(맨 왼쪽).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타오주는 중화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겸 중남군구 정치부 주임, 중국 공산당 중앙남국 상무위원, 중남군정위원회 위원, 중남군구 정치부 상군부 주임을 역임했고 1951년엔 중국 공산당 광시성 대리 서기를 맡았다. 이때 광시성에 거주하고 있던 좡족 출신 농민들이 중국 공산당의 토지개혁에 반발해 민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타오주는 강경 진압에 나서 수만 명에 달하는 좡족 농민들을 처형했고 수십만 명을 수용소에 가뒀다. 이후 좡족들은 50년대 내내 총합 40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참가한 민란을 여러 차례 벌였지만, 타오주의 뒤를 이은 광시성 서기들은 타오주의 선례를 따라 좡족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53년, 타오주는 중국 공산당 화난분국 서기 겸 광둥성 인민정부 주석을 역임헀다. 그리고 1955년부터 중국 광둥성위 제서기, 광저우군구 제1정위, 군구당위 제 1서기, 광둥성 성장, 기남대 총장을 역임했다. 또한 1956년 중국 공산당 8대 회의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 중국 중앙중남국 제1 서기를 겸임하고 1961년엔 중공 광둥성위 상무위원 및 제1 비서를 역임했다.

1958년 대약진 운동 중, 타오주는 광둥성에서 반만산운동(反瞞產運動: 생산을 속이는 행위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대약진 운동 추진 과정에서 전국 농촌의 관리들은 중앙 당국의 독촉에 부응하고 자신들의 공로를 과장하기 위해 성과를 과장하거나 위조하는 행태를 일삼았다. 그리고 1958년 수립된 인민공사에 대해 농민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일부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양식의 실제 생산량을 숨기고 식량을 사사로이 분배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타오주는 1958년 상부에 올라온 보고에 기록된 식량 구매량이 실제 구매된 식량보다 훨씬 낮은 점을 지적하며 이 상황의 주된 이유는 관리들의 위조 문제 보다는 농부들이 양식을 은폐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1959년 2월부터 3월까지 개최된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인민들이 식량을 감추는 게 나쁜 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고 말했다. 회의 후, 중국 공산당 광둥성 위원회는 '반만산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많은 인원들을 파견해 식량을 감춘 이들을 적발하게 했지만, 지방 당 위원회는 이들을 제대로 적발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1959년 3월부터 4월까지 소집된 전문회의에서, 광둥성 위원회 위원들은 각지에서 올라온 보고를 종합한 결과 1958년 식량 생산량은 원래 보고됐던 것처럼 그렇게 많지 않다고 결론내렸다. 광둥성 위원회는 중국 공산당 중앙에 보고서를 올려 실제와 맞지 않는 고 징수 수매를 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중앙은 이 보고서가 내놓은 개선 방안을 비준하여 전국 각 성에 배포하고 관리들이 성실하게 일을 하고 솔직하게 보고하여 성실한 사람이 될 것을 호소했다.

1959년 4월 27일, 마오쩌둥은 당 내에 "틀린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전보를 발송하고 지방, 현, 카운티 및 각 지방 인민정부에 배포했다. 이리하여 반만산운동이 중단되었다. 그후 1959년 5월 중국 공통 광둥성위원회 확대회의에서, 타오주는 '총노선과 작업 방법'을 주제로 연설하면서 대약진 이래의 교훈을 총집결하면서 스스로의 실책에 대해 자아비판했다. 회의 후, 타오주는 차오안의 대중 집회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제가 차오안에 온 것은 현 전체 사람들에게 사과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대중이 배고프고 간부들은 억울한 일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교훈을 얻어야합니다. 이제부터는 더이상 과장하지 말고 실사구시의 정신을 준수해야 합니다."

1959년 타오주는 중난부 조장으로서 루산 회의에 참석했다. 7월 3일, 타오주와 리루이(李銳)는 후차오무(胡喬木)의 숙소를 들렀다. 세사람은 한담을 나누며 이번 루산 회의에서 반드시 경제 법칙을 준수하게 해야 한다는 뜻을 정했다. 7월 17일,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로부터 받은 편지를 회의장에서 공개하며 펑더화이가 우경주의로 기울어졌다고 바판했고, 주제는 '좌'를 바로잡는 것에서 '반 우경주의'로 급격하게 바뀌었다. 7월 22일, 타오주는 장문의 발언을 하면서 펑더화이의 편지를 옹호하면서 "펑더화이의 편지는 이번 회의에서 한 걸음 더 토론을 하는 데 좋은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8월 1일, 마오쩌둥은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펑더화이에게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현재 당내에서 많은 이들이 우경주의로 치우치고 있다. 타오주, 덩샤오핑 등 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편지에 공감하고 있다. 지금의 문제는 새로운 우익 공격에 대응하는 것이다."

8월 5일, 타오주는 입장을 선회하기로 결정하고 황커청(黃克誠)에게 편지를 보내 펑더화이가 우경주의에 치우쳤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이 옳다고 밝혔다. 이후 당 중앙은 각지에서 '우경 기회주의' 반대 투쟁을 전개했는데, 타오주는 상급 기관이 지시한 비율에 따라 12명의 간부들만 "정당내 기회주의자"로 지정했다. 그리고 1961년 중앙 정부가 재검사 및 교정 지시를 내리자, 타오주는 앞서 기회주의자로 몰아 해임했던 12명의 신원을 회복시켰다.

1962년 중국 공산당 중앙이 소집한 7천인 대회에서, 남부국 제1서기 타오주는 중앙 및 지방 정부의 책임이 10중 7이라는 류사오치의 주장에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대약진 운동 실패의 책임은 주로 중앙에 있다고 생각하며 중앙 부서장은 지방 인민정부와 직접 대면하지 않고 서면으로 검토하기만 했으며 중앙위원회의 검토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1962년 가뭄이 든 이래 3년 동안 흉년을 겪으면서 수백만여 명이 굶어죽고 인민들이 인육을 먹는 참사가 벌어지는 광둥성의 상황을 지켜본 타오주는 탈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농민의 사유재산을 허용하고 국경 지역의 농어업 수출입 관리를 완화하기로 합의했다.

1962년 중순, 광둥성 각지에서는 "영국이 여왕의 생일을 맞이해 홍콩-중국 국경을 3일간 개방해서 이 기간 동안 허가없이 홍콩에 갈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광둥성에서 끔찍한 경제난과 흉년으로 거의 죽기 일보직전에 몰려있었던 광둥성 주민들은 앞다퉈 홍콩에 가려고 있다. 그리하여 6월 1일, 수만명에 달하는 광둥성 인민들과 다른 지방 사람들이 다사터우(大沙頭) 역에 모여 홍콩행 기차를 기다렸다. 광저우시 공안국은 선전차를 파견해 민중들에게 퇴거를 권했다. 그러나 민중들은 이에 불복해 돌과 유리병을 집어던졌고, 일부는 근처 경찰서를 습격했고 선전차 몇대를 뒤집었다. 현장에 달려온 광저우시 부시장 손낙의(孫樂宜) 역시 수백 명의 인파에게 둘러싸여 오도가도 못했다.

6월 2일 새벽 1시, 광저우시 당국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안을 투입해 민중 16명을 체포하고 22명을 노동교화형에 처했으며 행정 수감 대상자로 34명을 지정했다. 이후 타오주는 내부 회의를 열어 이 사건을 소위 "적과 아군의 모순된 충돌"이라고 규정하고 군대의 출동을 결정했다. 그후 당국은 6월 6일까지 완전 무장한 인민해방군을 파견해 다사터우 역을 봉쇄하고 군중을 밖으로 쫓아냈다. 이날 저녁까지 1600명이 체포되었으며 게엄군은 며칠 동안 기차역을 호위했다.

1964년 2월, 1964년 2월, 타오주가 집필한 〈인민공사는 전진한다〉라는 제목의 논문이 인민일보에 게재되었다. 마오쩌둥은 이를 주목하고 타오주를 중앙에 전격 발탁했다. 이후 타오주는 1965년 1월 4일 국무원 부총리에 취임했고 1966년 6월 4일 당 중앙서기처 상무서기 겸 중앙 선전부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그는 제8기 11중전회에서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그는 정치국 상무위원회 내에서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이에 제 4위에 해당하는 서열에 올랐다.

2.4. 문화대혁명의 시련과 사망

1966년 5월 23일, 중국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는 펑전. 뤄루이칭, 루딩이(陸定一), 양상쿤을 제명하는 처리 결정을 의결하고 타오주를 중국 공산당 서기처 상무위원회 서기 겸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장에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1966년 8월 중국 공산당 8기 11중 전회에서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된 타저우는 중앙문화혁명소조 고문 등 중요 직책을 겸임하며 저우언라이의 국무원 업무를 보좌했고 중국 과학아카데미, 경력 관리국, 중앙 군사위원회 회의에 참여했다.

1966년 6월 9일, 타오주는 항저우로 날아가 마오쩌둥이 주관한 회의에 참석해 문화대혁명의 공작대 파견 여부를 심각하게 토론했다. 류사오치 덩샤오핑은 보낼 것을 주장했고 타오주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천보다는 보내지 말 것을 제안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보낼 지 안 보낼 지를 결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공작대 파견 문제를 결정하지 않았다. 이후 류사오치는 1957년 반우파 투쟁 때 썼던 방식 대로 하기로 결정하고 1966년 6월 13일에 '문화대혁명에 관한 상황 및 의견에 관한 보고서'와 '베이징 관리국의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 전개에 관한 의견>을 채택하고 공작대을 투입해 각 중대의 학교에서 활동 중이던 다수의 교사와 학생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탄압했다.

1966년 6월 30일, 류사오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게 서한을 보내 '중공중앙, 공업교통기업과 인프라 건설단위가 어떻게 문화대혁명운동을 전개하는가에 관한 통지(초고)'를 보냈다.초고에 따르면, 중앙에서는 공업교통기업과 기본건설단위(설계시공단위 포함)를 이루는 문화대혁명은 반드시 사청운동과 결합하여, '스물3조'의 규정에 따라, 분할하여 지도 계획을 세워야 했다. 1966년 7월 2일, 마오쩌둥은 "당신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신속하게 통지를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타오주는 중국 공산당 제8차 중앙위원회 총회를 주관하고 인민일보에 "혁명을 일으켜 생산을 촉진하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또한 그는 중국 공산당 제8기 11중전회에 제출될 보고서의 수정을 수행했다. 마오쩌둥은 타오주가 수정한 보고서를 읽고 "잘 고쳤다."고 칭찬하면서도 직접 "문투하라. 무장하지 마라."는 항목을 삽입했다.

1966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자산계급 반동노선"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이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당시 류사오치는 이미 실각해 홍위병들의 갖은 탄압을 당하고 있었지만,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각급 지도 간부들은 문화대혁명에 쉽사리 따르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자산계급 반동노선'은 이 지도간부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왕리는 아예 "자산계급 반동노선을 철저히 비판하자"는 구호를 제시했다. 일각에서는 이 구호가 타오주를 겨냥한 것이라고 여겼다.

한편, 타오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개국절인 10월 1일을 기념하는 행사에 관한 신화일보의 보도를 살펴보던 중 정치위원회 상임위원들을 촬영한 사진에서 덩샤오핑이 임의로 누락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 신화통신에게 덩샤오핑을 반드시 넣으라고 요구했고, 신화통신은 덩샤오핑의 머리를 천이의 몸과 결합하여 사진에 삽입시키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1966년 11월14일,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확대회의에서, 타오주는 중앙문혁팀과 군 장성들과 함께 참석했다. 마오쩌둥은 회의 시작 직후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꺼내 공민의 권리와 집회 결사의 자유라는 조문을 읽은 후 지난 11월 10일에 조반파 홍위병들이 설립한 공총사를 불법 집회로 간주한 상하이시 당서기 장춘차오(張春橋)를 비판했다. 이후 장춘차오는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장춘차오는 타오주의 파벌에 속했기 때문에, 혁명의 광기는 곧장 타오주에게 덮쳤다. 1966년 12월 6일, 타오주는 장춘차오를 제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센 비난을 받았고 왕리 등은 타오주가 생산으로서 혁명을 제압한다고 간주하고 격리 심문을 실시했다.

1967년 1월 4일 오후, 저우언라이와 타오주 등 다른 중앙 지도부는 베이징 노동 대회장에서 교육계 , 문화계, 신문 출판계, 스포츠계 대표들을 접견했다. 오후 2시 인민대회당으로 돌아온 저우언라이는 중국 공산당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려 했고, 중앙문혁팀과 전군 문혁팀 멤버들도 배석했으며 타오주도 참석했다. 그러나 베이징 거리에선 "타도 타오주", "타오주를 끄집어내라."라는 큰 표어가 내걸렸고, 장칭, 캉성, 천보다는 "중국 최대의 보황파 타오주 타도"라는 구호가 적힌 전단을 베이징 거리에 뿌렸다. 그날 밤 9시, 중남해 서문 밖의 고음 스피커에서 "타도 타오주"를 외치며 당일 중앙문혁조 접견 당시의 담화 내용을 낭독했다. 이후 타오주는 신변의 자유를 상실하고 중난하이에 연금되었다.

1967년 1월 7일 새벽 1시. 저우언라이는 '타오주 연락소 비판' 대표를 접견하며 "타오주는 중앙상위다.중앙상위가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를 열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1월 23일 밤, 저우언라이는 수도대 중학생 대표를 접견한 자리에서 장칭과 천보다의 타오주에 대한 비판에 대해 "타오주는 8기 11중전회에서 선출된 것으로 나는 그를 믿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1967년 9월, 야오원위안은 인민일보에 <타오주의 두권의 책에 대한 논평>이란 사설을 게재하며 타오주가 흐루시초프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다고 비난했다. 과거 타오주는 '혁명의 견고성'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는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서 바위처럼 견고해야 한다. 바위는 폭풍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폭풍이 끝나면 바람이 바위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려 한다. 비는 해변으로 그들을 몰고 가려고 한다. 파도는 그들을 바다로 끌고 들어가려 한다. 그러나 바위는 움직이지 않는다. 폭풍이 몰아치든, 파도가 내리치든, 그들은 여전히 바다 옆에 서서 하늘을 가리키고 바다를 마주 본다.

야오원위안은 이 문단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바다를 마주 본다는 것은 대만과 마주 보는 것을 의미하고 푸른 하늘을 가리킨다는 것은 국민당의 '푸른 하늘'과 '밝은 달', 즉 장제스를 갈망하는 의미다.

1967년 상반기, 타오주는 매일 경위에게 압송되어 중난하이로 끌러나와 규탄을 받앗다. 그리고 1968년 8월 중앙 문혁소조는 천안문에서 100만 명이 모인 가운데 류사오치 부부, 덩샤오핑 부부, 타오주 부부 규탄 대회를 열었다. 이러한 탄압을 견디지 못한 타오주는 1969년 3월 중국인민해방국 제3진영 제2 병원으로 보내졌다. 의사는 검사 결과 담낭에 암이 발견되었으므로 즉시 수술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소식을 접한 저우언라이는 타오주를 외과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게 했다. 그러나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세가 다시 악화되었고, 1969년 10월 그는 홀로 안후이성 허페이에 가서 요양 생활을 보냈다. 이때 그는 암의 증상이 악화되어 재수술을 할 수 없었다. 결국 1969년 11월 30일, 그는 6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 11기 3중전회는 타오주의 혐의를 무고로 판명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12월 24일 중국 공산당 중앙은 타오주를 위한 추도대회를 거행했고 천윈 중앙 부주석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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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주와 부인 쩡즈(曾志), 외동딸 타오쓰량(陶斯亮)

1933년, 타오주는 공산당원이자 홍4군 공농운동위원회 여성팀장, 민남특위 조직부장 등을 맡고 있던 쩡즈와 결혼했다. 쩡즈는 1923년 호남성 제3여자 사범학교에 입학했고 1926년 10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그녀는 타오주와 결혼하기 전에 하명진(夏明震)과 1927년에 결혼했으나 국민혁명군과의 전쟁 도중 남편이 죽자 1929년 채협민(蔡協民)과 재혼했으나 그 역시 전사했다. 쩡즈는 1937년 9월 허베이 임시성 당서기, 탕지 농촌 합작 훈련반 당지부 서기 겸 교원을 역임했고 1940년 가을엔 중앙부위 비서장을 맡았다. 국공내전 시기엔 중국 공산당 선양시 위원회 위원 및 상무위원, 요길성 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그녀는 우한시 군관회 물자인수부 부부장, 중남군정위원회 위원, 중남국 공업부 부부장 겸 광저우 발전국장, 광저우시 당서기 등을 역임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쩡즈는 타오주의 아내였기 때문에 홍위병들의 위협을 받았지만 마오쩌둥이 "그녀는 내 옛 교우이니 건드리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1977년 업무에 복귀하여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 부부장을 지내면서 문화대혁명 시기 억울한 처벌을 받은 이들의 누명을 바로잡는 데 참여했으며 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98년 6월 21일, 쩡즈는 북경에서 병사했다. 향년 87세.

타오주의 외동딸 타오쓰량은 1941년 4월 4일 후난성 치양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61년 중국 인민해방군 제2군 의학대학에 입학하고 1965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67년 졸업 후 장기간 의사로 일했다. 1978년 12월, 타오쓰량은 1만 자에 달하는 '한통의 편지-내 아버지 타오주에게 보내는 편지'를 인민일보에 게재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딸의 끝없는 그리움은 난세의 아픔을 겪은 수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타오쓰량의 이름을 전국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1987년 중국 공산당 중앙 통전부 6국 부국장으로 전임했다. 현재 그녀는 중국 시장협회 전임부회장 겸 비서장이며 중국 의학기금회 부주석 및 중국 도시 발전보고 이사회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4.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