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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0 00:58:39

킨츠바 지효에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복자 킨츠바 지효에
수도명 토마스 아우구스티노
출생 1600년
일본
사망 1637년 11월 6일 (향년 37세)
사망지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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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레오 코에몬 (부) 클라라 오키야 (모)
학력 세미나리요
종교 가톨릭
직업 신부, 수도자
소속 아우구스티노회

1. 개요2. 상세3. 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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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복자 킨츠바 지효에(金鍔次兵衛)는 일본 가톨릭 신부이자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자이자 순교자이다.

2. 상세

그는 1600년, 히젠오무라의 키리시탄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레오 코에몬, 어머니는 클라라 오키야라고 알려져 있으며, 후에 순교자가 되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세례명은 토마스라고 한다. "金鍔"라는 이름은 나가사키에서 하급 관리를 사칭할 때 꽂았던 칼의 쇠붙이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6세 무렵 사제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아리마의 세미나리요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서 금교령이 내려지자 마카오로 추방되어 계속 그곳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1620년 마카오의 세미나리요가 폐쇄되었고 그는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1622년, 그는 필리핀 마닐라로 건너가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였다. "토마스 산 아우구스티노(성 아우구스티노의 토마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도자로서 살았다. 1627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후 그는 일본으로의 귀국을 희망했으나, 당시 박해가 갈수록 심해지던 상황이어서 수도회 장상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631년에 일본으로의 입국에 성공한다. 입국한 뒤 킨츠바는 선교에 힘을 쏟았으며 낮에는 나가사키의 봉행소에서 막부의 하급 관리 행세를 하며 감옥에 갇힌 선교사와 신자들을 격려하였고 밤이 되면 변장하고 숨어있는 신자들을 격려하며 사목하였다.
1634년에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게 되자, 그는 자취를 감추고 나가사키의 깊은 산 속으로 도주하여 잠적하게 된다. 바쿠후는 그의 행적을 보고는 마술을 부린다고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현재도 그가 은거했다는 동굴과 지명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1636년에 포박당하여 고문을 받았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이를 끝까지 거부하였다. 1637년 8월 21일에 첫 번째로 거꾸로 매달리는 형벌을 받았으나 8월 23일에 입항한 포르투갈 선박의 선원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일단 돌려보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뜻을 굽히지 않자 11월 6일 나가사키 니시사카 언덕에서 두 번째로 거꾸로 매달린 형벌을 받고 순교했다.

3. 시복

킨츠바 신부는 이후 2008년 1월 24일 나가사키현영 야구장에서 열린 시복식에서 복자 대열에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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