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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20:47:32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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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공화국 제3대 연방총리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Kurt Georg Kiesinger
출생 1904년 4월 6일
독일 제국 에빙겐(Ebingen)
사망 1988년 3월 9일 (향년 83세[1])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 튀빙겐 (Tübingen)
정당
(1933~1945)
(1946~1988)
재임기간 1966년 12월 1일 ~ 1969년 10월 21일
(만 2년 10개월 20일)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서명.svg
독일연방공화국 제3대 연방총리 취임 선서
1. 개요2. 생애
2.1. 전반기2.2. 초기 정치 활동2.3. 연방총리2.4. 말년
3. 평가4. 어록5. 동시대인들의 평가

[clearfix]

1. 개요

독일(구 서독)의 제3대 연방총리.

당시만 해도 정치 성향 차이로 대화·타협보다 대립·갈등에 힘을 싣던 거대 양당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 사회민주당(사민당)을 하나의 정부로 묶는 대연정을 성사시켰고, 이 과정에서 보여준 특유의 뛰어난 언변·화법과 중재 능력으로 호평받으며 'Häuptling Silberzunge(달변가 대장)'로 불렸다.

다만 현실 정치에서의 뛰어난 감각과는 별개로 과거 나치에 가입해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이끄는 나치 독일 외무부에서 근무했던 이력으로 인해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으며, 이 비판 여론은 1968년 68운동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면서 극에 달했다. 결국 그 해 기민련 베를린 전당대회 공개 석상에서 한 청년에게 뺨을 맞고 "나치 물러가라"는 일갈을 듣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제2당인 사민당과 제3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연합해 연립정부를 구성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기민련이 야당으로 전락하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성 '키징어(Kiesinger)'는 독일어 발음에 따르면 '키징어'가 맞다. 독일어는 영어와 달리 ng의 발음에서 /g/소리가 덧나지 않으므로 '키징거'로 읽으면 틀린 발음이다. 다만 한국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g/소리를 첨가하여 '키징거'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이는 현지 발음보다 표기의 오랜 관용을 존중하여 규정을 정했기에 발생하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키징거'가 맞는 표기이지만 발음을 존중하여 '키징어'로 써도 틀린 것은 아니다.[2]

2. 생애

2.1. 전반기

1904년 4월 6일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에빙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섬유산업 분야에서 일했다. 그의 아버지는 개신교를 믿었으나,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였고, 그는 태어나 천주교 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지 6개월 후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후 그는 외할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자라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몇 년 후 카롤리네 빅토리아 파프(Karoline Victoria Pfaff)라는 여자와 재혼하여 새 가정을 꾸렸는데, 새어머니 카롤리네가 천주교 신자라서 키징어와 잘 맞았다고 한다.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서 무려 일곱 명의 이복 동생들이 태어났는데, 그 중 이복 여동생 마리아가 한 살 때 죽었을 때 큰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유주의 성향의 신문을 구독했고 그 덕에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카톨릭 공립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중학교를 거쳐 카톨릭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생 시절 그는 장래에 가톨릭 사제와 교사 중에서 뭐가 될 지에 대해 고민했다. 고교시절 그는 시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고등학생 시절은 지은 정치시 중에는 독일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게 된 베르사유 조약을 개탄하는 내용도 있었다.

1920년대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과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해 초유의 초인플레이션 겪게 되었고, 이런 경제적 파국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그가 18세 때까지만 학비를 대줄 수 있었고, 19세가 되자 그는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섬유산업계에 취직하여 일하게 되었다. 그가 일하던 섬유회사의 사장은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인물로 키징어가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계속하도록 자주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21세 때 그는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하여 1925년 튀빙겐의 에버하르트 칼스 대학에서 철학 역사학을 공부했다. 1926년 그는 교사가 되려는 꿈을 접고 법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베를린으로 가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학창 시절 3개 정도의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했는데, 주로 정치이념성이 없는 천주교 관련 단체들이었다. 특히 KStV Alamannia Tübingen 카톨릭 학생 협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민주주의와 문학을 확인하였다. 1927년 그는 이 단체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단체의 회장이 되면서 카톨릭 협회를 후원하는 중견 정치인이나 기업인들과도 다양하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자유주의, 민주주의, 온건 보수주의 성향의 인물들이 많았지만,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도 있었다고 한다.

1931년 그는 법률시험 1차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고, 법률회사에 법률 견습생으로 취업했다. 또 이때부터 법률시험 응시생들을 대상으로 개인과외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법률 견습기간을 마친 그는 1935년 법률시험 2차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증을 얻어 베를린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1933년 히틀러가 총리로 집권하고 몇 주 뒤, 평생을 논란으로 따라다니게 될 선택을 한다. 바로 나치당에 입당한 것. [3] 1933년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개전 2년차인 1940년까지 그는 나치당에서 활동이 없는 비활동 당원으로 머물렀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1940년 키징어는 징집 영장을 받게 되었다. 징집을 피하기 위해 그는 변호사를 접고 외무부 대외 방송부 채용 공고에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이미 변호사로서 걸출한 스펙을 가지고 있던 그는 사실 일반 공무원으로 일하기에는 오버 스펙이었고 여기서 고속 승진하여 1943년 부국장이 되었다.

종전 뒤 다른 나치 부역자가 그랬듯이 재판을 받았지만 단순 가담자(Mitläufer)로 판단되어 곧 풀려났다. 이 시기 그의 행적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따르지만, 적어도 그가 골수 나치 지지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실도 존재한다. 외무부 시절 직장 동료가 하인리히 힘러에게 '키징어가 패배주의에 물들어 있고 반유대주의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방해까지 하고 있다'는 내용의 비밀투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기 때문.[4]

어쨌든 명확한 진실은 키징어가 나치당원이었다는 점 하나이고, 일각에서는 중재의 달인이었던 그의 모습을 바탕으로 "키징어는 나치와도 타협을 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아이러니라면, 이 나치 시기의 경력이 후일 그의 최고의 장점이라 평가받는 중재술을 갈고 닦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는 것. 당시 대외선전 담당을 놓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외무부와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부가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이던 시기라 키징어는 늘 두 부서 사이의 싸움을 말려야 했기 때문이다.

2.2. 초기 정치 활동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그는 한동안 법률시험 응시자들을 대상으로 법학 개인과외 강사로 활동했다.

콘라트 아데나워가 단순 나치 동조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정책을 펼치면서, 1946년 키징어는 기민련에 입당하고 본격적인 정치행보를 시작하게 된다.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렌 주의 기민당에서 무급 간부로 활동했다. 1948년 변호사로 개업하여 생활비를 벌었다. 언변과 타협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평에 걸맞게 그는 입당 직후 빠르게 당내에서 주요 직책을 언거푸 맡으며 얼마 후 기민당 뷔르템베르크 지역당에서 지도자급 위치에 올랐다.

1949년 제헌 의회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연방의회의 외교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의회에서는 그는 엄청난 입법 활동을 기록하였고, 1951년에는 기민당 최고지도부(executive board)에 선출되었다. 1954년에는 의회 외교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렇게 정계 입문 후 승승장구하며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했지만 아데나워는 키징어를 입각시킬 생각이 없는 듯이 보였다.[5] 이에 실망한 키징어는 1958년 연방 하원을 떠나서 고향인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주 총리로 취임한다. 그리고 1966년 연방총리로 취임할 때까지 키징어는 이 지위를 계속하여 유지하였다.

2.3. 연방총리

1966년 기민당은 흔들리고 있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가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증세를 내걸자, 이에 반발한 자민당 출신 장관들이 내각에서 탈퇴해버리면서 기민당과 자민당의 소연정이 붕괴해버렸던 것. 이로써 기민당은 1949년 건국 이후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기민당에는 아직 콘라트 아데나워가 건재했다. 아데나워는 자신의 측근이었던 헬무트 콜을 움직여 새로운 총리 후보를 물색하게 했고, 치열한 당내 암투 끝에 승리를 거둔 것이 바로 키징어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키징어가 유약하다고 생각해서 별로 탐탁해하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총리로 밀었던 것은 본인이 총리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측근이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90년대 사민당 출신 총리와는 동명이인)였고 그 외에 라이너 바르첼 원내총무가 총리직에 대한 야망을 표출했다. 키징어가 기민당 대표이자 총리로 선택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주 총리 경력 덕분인데, 아데나워 말기부터 기민당 내에서 끊이질 않던 정치적 암투에 질려있던 당원들이 보기에는 '더러운' 중앙의 권력 다툼을 관망하면서 유유자적 주 총리 생활을 보낸 키징어가 청렴해보였던 것. 거기다가 주 총리로 활동하면서 깡촌이었던 바덴뷔르템베르크를 빠르게 발전시킨 행정 능력은 가산요소. 여기에 키징어를 임시 총리로 앉혀놓은 다음 차기 총리 자리를 기약하려고 했던 라이너 바르첼의 계산도 있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키징어의 협상 능력이 빛을 발했다. 이 당시 독일 연방 하원의 의석수를 보자면 중도우파 기독교민주연합과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이 250석, 중도좌파 독일 사회민주당이 217석, 그리고 자유주의 세력인 자유민주당이 50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캐스팅보터는 자민당이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 상황에서 키징어가 연정 파트너로 선택한 것은 자민당이 아니라 사민당이었다. 사민당의 반응도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로 40년 가까이 만년 야당으로 지내고 있던 사민당은 자신들의 계속되는 선거 패배 이유가 단순히 매카시즘뿐만이 아니라[6] 수권경험 부족에 따른 국민들의 외면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자신들의 국정운영 능력을 국민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당시 자민당의 대표였던 에리히 멘데는 "코끼리끼리의 결혼을 합의해놓고 우리를 감쪽같이 속였다."라고 분개했지만 이미 배는 떠난 뒤였다.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이후 대연정은 그저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개념이었지만, 기독교민주연합이 사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다는 발표가 있자 독일인들은 상당히 혼란에 빠진 사람도 많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자민당은 기민당에 이를 득득 갈게 됐다. 안 그래도 전임 에르하르트 총리 시절 증세 문제로 갈등이 있었는데, 자신들을 버리고 새 파트너를 구한 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 것.

여하튼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키징어의 총리 취임 직후 처음에는 기민당과 사민당의 동거가 과연 성공적일지에 대한 많은 우려가 존재했다. 당시 키징어 내각을 보면 나치 부역자인 총리 키징어에, 나치에 저항하다 망명을 해야했던 부총리 겸 외무장관 빌리 브란트, 전직 공산주의자 헤르베르트 베너, 극우라는 비판도 듣곤 했던 초강경 보수주의자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등에 이르기까지 내각 구성원들이 제각기 다양한 이념 스펙트럼에 산재했기 때문. 그러나 키징어는 성공적으로 내각의 의견을 조율해가면서 정부를 이끌어나갔다.

그렇지만 키징어의 나치 부역 경력은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양철북을 쓴 대문호 귄터 그라스와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 등 서독 사회 지식인들은 호되게 그를 비판했고, 특히나 연방하원 정원 중 90%를 차지하는 기민/기사련과 사민당간 대연정의 규모로 인해, 민주주의의 건전성에 대한 지식인과 학생들의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당시 키징어 내각이 추진하던 비상사태법(Notstandsgesetz)[7]는 나치 독일 시기 수권법의 기억과 맞물려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낳았다.[8]

그리고 1968년 11월 7일, 마침내 문제의 그 사건이 터졌다. 베를린에서 기민당의 전당 대회가 한창 열리고 있던 와중에 당시 30세였던 베아테 클라르스펠트(Beate Klarsfeld)[9]가 의장석에 앉아 있던 키징어에게 몰래 다가가서 나치라고 소리치면서 뺨을 후려쳐버린 것. 키징어에게는 약간의 찰과상과 염증만 있었을 뿐 큰 부상은 없었고, 곧 그는 클라르스펠트에 대한 모든 사법적 조치를 취하했지만, 그녀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총리 폭행사건이 아니라 신세대들이 나치에 부역한 기성세대들에게 지니고 있는 반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기 때문. 바로 68 혁명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 그 자체였다.

68혁명 세대들에게는 나치에 부역한 키징어야말로 타도해야할 과거 유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사회적 대격변의 소용돌이에서 당연히 사민당과의 대연정은 곧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에르하르트 내각 말년에 닥쳤던 경제 위기를 훌륭하게 수습하면서 키징어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기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열린 1969년의 총선에서 키징어는 야심차게 기민/기사련의 단독과반을 목표로 내걸었다. 개표 결과는 4년 전과 다를 바 없는 250석이었지만 기민/기사의 원내 제1 교섭단체 지위는 유지했고, 또 당시 서독 정치지형을 봤을 때 사민당과 자민당의 연정은 환상의 시나리오로 보였던지라 키징어의 재선은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개표완료 직후인 새벽에 키징어는 닉슨 미국 대통령 으로부터 재선을 축하한다는 전화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키징어가 사민당과 자민당을 상대로 배짱을 부리는 사이, 원내 제 2당과 제 3당이었던 사민당과 자민당이 손을 잡고 소연정을 구성했다. 자민당 입장에서는 1966년 기민련의 배신을 되로 받고 말로 갚아준 셈. 그리고 사민당은 1930년 헤르만 뮐러 내각 이후 40년만에 자당출신 총리를 배출하게 되었다. 69년 총선 당시 키징어는 비례대표제를 없애버리려는 시도를 하기까지 했었는데, 이는 비례대표 의석만으로 의석을 얻어왔던 자민당에게 있어서는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선거제도 개편 시도의 충격이 꽤 컸었는지 키징어의 선거제도 개편안 파동은 이후 13년간 안정적으로 사민당이 자민당과 연정하게 되는 토대가 된다.

2.4. 말년

총리직을 빌리 브란트에게 넘겨준 키징어는 총리직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올 것을 기다리며 1971년 7월까지 기민당의 당수 자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68 혁명 이후 그는 과거의 정치인이 되어버렸으며 기민당 내에서도 건국 이후 처음으로 여당 자리를 빼앗긴 장본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재집권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이후 당수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9년 동안 기민당의 원로 정치인으로서 활동했으나 1980년에는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리고 1988년 고향인 튀빙겐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3. 평가

2년 10개월이라는 그의 집권기간은 역대 독일 총리 중에서는 가장 짧은 편이었다. 일본이나 이탈리아같은 나라였다면 그 정도면 할만큼 했다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기간이지만, 총리들이 장수하기로 유명한 독일에서 그의 집권기간은 매우 짧은 것이었고, 전후임 다른 총리들이 긴 재임기간 동안 많은 업적들을 남겼기에 그는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하고, 실제로 그를 잊혀진 총리(Der Vergessene Kanzler)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그렇지만 그와 그의 대연정 내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법안 통과를 이끌어내면서 에르하르트 시기 정체됐던 경제 성장률을 다시 회복시키고 실업률도 낮추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오늘날 인정받고 있다.

4. 어록

나는 파워풀하게 정치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파워를 버라이어티쇼에서처럼 국민들에게 보여주진 않을 것이다.
혁명이 후손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도 갉아먹는다.
68혁명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연정의 총리라면, 기꺼이 말하고 싶은 것이라도 참아야 한다.
책임을 지게 되면 돈이나 시간, 그리고 생명도 아끼어서는 안된다.

5. 동시대인들의 평가

그는 분별력이 있는 정치가였다. 그의 정치에서는 책략만이 아니라 의미 그리고 합리적인 근거도 중요했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10]
그로부터 많은 것, 특히 무한한 인내심과 아주 침착하게 협상을 하는 능력을 배웠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키징어를 단지 과도기의 총리로 본다면 이는 그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처해있던 상황은 독자적인 정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헬무트 슈미트
그와 나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인생 행로와 인생관을 가지고 있어 견해가 약간 다를 뿐이다.
빌리 브란트
이 약골이 총리가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절대 안 된다네.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언론 전체가 이 모호한 총리의 재선을 막아야 한다.
하인리히 뵐
나치 당원과 반나치 인사가 총리/부총리로 함께 일한다는 것은 독일의 현실과 화해의 필요성을 반영한다는 사실로 보기에 좋았다.
에곤 바르[11]


[1] 83년 11개월 3일 [2] 비슷한 용례로 ' 튀링겐주'의 명칭을 '튀링겐'과 '튀링엔'으로 적는 것이나, 바이에른주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 정당 ' 자유 유권자'의 당대표 후베르트 아이방어(Hubert Aiwanger)의 성, 숄츠 내각의 연방 교육연구부 장관인 베티나 슈타르크-바칭어(Bettina Stark-Watzinger)의 성 등이 있다. 공산당 선언의 공동집필자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성 역시 현지 발음으로는 '엥엘스'가 맞다. [3] 자신의 회고록에서 키징어는 이 선택에 대하여 나치의 탄압을 피하는 한편으로, 안에서 나치의 이데올로기, 특히나 반유대주의를 변화시키기 위해 입당했다고 주장했다. [4] 이 투서가 발견된 덕분에 나치 이력으로 궁지에 몰렸던 키징어는 극적으로 총리 인준을 받을 수 있었다. 참고로 이 투서를 발견한 인물은 슈피겔의 창간인이었던 아우크슈타인으로, 4년 전인 1962년에 나토 관련 보도를 통해 국가 기밀을 유출했다는 이유로 국방부장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에게 반역죄로 기소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키징어의 적극적인 실드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은혜를 제대로 갚아준 셈. [5] 아데나워는 키징어가 너무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키징어에게 "자네는 너무 순진해. 좀 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6] 1959년에 이미 사민당은 마르크스주의 당의 이념으로써 포기했지만 그동안의 이미지가 그리 쉽게 사라지기는 힘들었다. [7] 국가 위기 사태시 질서 유지를 위해 중앙정부에 더 큰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이다. [8] 이 무렵 이른바 원외 반대파-Außerparlamentarische Opposition-라는 조직이 등장했고, 이들중 과격파 일부는 1970년대 중후반 적군파로 분화되어서 그 유명한 독일의 가을(Deutscher Herbst)시기 당시 유명인사에 대한 납치, 암살 등 테러를 자행한다. [9] 남편 세르주 클라르스펠트(Serge Klarsfeld)와 함께 유명한 나치 전범 추적 전문가. 2015년 독일 연방정부로부터 나치 전범 추적 공로를 인정받아 연방 공로훈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2012년 독일 연방 대통령 선거에서 요아힘 가우크에 맞서 좌파당 후보로 출마한 적도 있다. [10] 통일 독일의 초대 대통령. 나치 독일 외무차관이자 반전파였던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의 아들 [11] 사민당 정치인으로 빌리 브란트의 최측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