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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18:58:30

쾨프륄뤼 가문

1. 개요2. 역사
2.1. 메흐메트 4세의 즉위2.2. 개혁
3. 사드라잠(대재상) 목록4. 기타

1. 개요

튀르키예어: Köprülü ailesi
알바니아어: Familja Kypriljoti 또는 Qyprillinjtë
영어: Köprülü family

17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의 명문가. 쾨프룰루나 쾨프뤼뤼 등으로도 불린다. 본래 알바니아계로 가문 이름은 이 가문의 본관인 알바니아 지방의 '취프릴리우(Qyprilliu)' 마을에서 유래했는데 지금은 북마케도니아 중부에 위치해 있으며 '벨레스(Велес / Veles)'라고 불리고 있다.

오스만 제국 성립 초기의 찬다를르 가문과 함께 오스만 제국의 가장 대표적인 귀족 가문으로, 쾨프륄뤼 가문 출신이 재상직을 독점하였던 1656년부터 1683년까지를 쾨프륄뤼 시대[1]라고 부르는데 메흐메트 4세[2]의 치세와 거의 겹친다. 쾨프륄뤼 출신의 재상들은 17세기 전반에 일명 '여자 술탄 시대'[3]를 거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여러 개혁을 단행했으며, 따라서 쾨프륄리 시대는 쉴레이만 1세 이후 정체되어 있던 오스만 제국의 중흥기라고도 평가된다.

이 가문이 배출한 두번째 재상인 파즐 아흐마트는 15년간 (1661 ~ 1676년) 재상직을 맡으며 슬로바키아 남부 (노베잠키)와 크레타 정복 등 영토 확장을 주도하였다. 특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격파하고 포돌리아( 우크라이나 중부)를 얻은 1672년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가장 넓었을 시기지만 쾨프륄뤼 시대의 개혁은 보수 세력의 반발을 제대로 극복하지는 못하여 임시 방편에 그치는 한계를 보였다. 1683년의 제2차 빈 공방전에서 패배한 책임을 묻는다는 의미로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처형당하면서 세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잠시나마 쾨프륄뤼 가문과 혈연이 없는 인물이 재상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대 튀르크 전쟁에서 5번째 재상 파즐 무스타파가 전사하기도 했고 1710년부터 1711년까지 재임한 쾨프륄뤼자데 누만 파샤를 끝으로 더는 재상을 배출하지 못했다. 후손인 메흐메트 푸아트 쾨프륄리는 튀르키예 공화국의 외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오늘날에는 튀르키예와 미국에 이들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2. 역사

17세기 중반 ~ 18세기 초반의 오스만 제국사는 동유럽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는데 그 중심에 쾨프륄뤼 가문이 있었다.

2.1. 메흐메트 4세의 즉위

제국의 국정을 휘어잡고 있던 태황태후 쾨셈 술탄과 메흐메트 4세의 모후 투르한 하티제 술탄 사이에서 권력다툼이 일어났고 쾨셈 술탄은 메흐메트 4세를 폐하고 메흐메트 4세의 이복 형제인 쉴레이만 황자를 새 황제로 옹립하려는 정변을 계획하다가 1651년 투르한 술탄 측에게 살해 당한다.

투르한 술탄은 어린 아들을 보좌하는 섭정을 행하게 되었으나 내외정의 어려움을 겪어 국정개입의 한계를 인지하고 국정을 쾨프륄리 메흐메트 파샤에게 넘긴 후 본인은 공공건축 사업에 몰두하게 된다.

술탄 메흐메트는 사냥에만 몰두하였고 모든 국정은 재상이 알아서 처리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에게는 다행히도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는 상당히 유능하고 정직하며 야심찬 인물이었다.

2.2. 개혁

메흐메트 파샤는 공직자의 뇌물 수수를 강력히 금지하였고 예니체리의 군기를 바로잡았다.

3. 사드라잠(대재상) 목록

4. 기타



[1] Köprülüler Dönemi [2] 오스만 역사상 쉴레이만 대제 다음으로 오랫동안 재위했다. [3] Kadınlar Saltanatı. 휘렘 술탄(록셀라나), 미흐리마 술탄, 누르바누 술탄, 사피예 술탄, 쾨셈 술탄, 투르한 하티제 술탄으로 이어진 하렘의 태후와 황녀들의 국정 개입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