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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8-20 22:22:50

콜린 F. 그레이

콜린 F. 그레이(Colin Falkland Gray : 1914년 11월 9일~1995년 8월 1일)

1. RAF에 입대한 쌍둥이2. 초전을 치르다3. 인사의 파행4. 에이스 지휘관5. 종전 후

1. RAF에 입대한 쌍둥이

1914년 11월 9일, 일란성 쌍둥이 형제인 케네스 그레이(Kenneth)와 함께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태어났다. 쌍둥이 형제 위로는 형이 둘 더 있었는데, 소싯적부터 큰형들과 다툴 때면 늘 둘이 뭉쳐 다녔다고 한다.

형제는 24살이 되던 해인 1938년에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공군에 입대했지만 케네스 그레이는 폭격기 조종사가 되었다가 1940년 5월 1일에 비행 사고로 순직해버려 콜린 그레이 혼자만 남겨졌다. 신체검사에 떨어졌던 탓에 케네스 보다 늦게 RAF에 들어갈 수 있었던 콜린 그레이는 전투기를 타게 되었는데, 훗날 쌍둥이 형제가 죽던 순간 불가사의하게도 즉시 알아챌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1939년 10월에 하트퍼드셔(Hertfordshire)에 있는 제11비행학교에서 전투비행 교육을 마친 그는 11월에는 수령한지 반년 남짓 된 최신예 전투기인 스핏파이어 MkI을 갖춘 제54비행대(No.54 Squadron RAF)에 배속되었다.

2. 초전을 치르다

해가 바뀌고 1940년 5월 25일에 콜린 그레이는 스핏파이어 MkI(N3173)을 몰고 연합군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혼처치 비행장에서 이륙해 도버 해협 방면으로 초계를 나갔다. 당시 소위였던 그레이는 이 임무에서 처음으로 독일 전투기를 목격했고, 곧바로 교전에 들어가 메서슈밋 Bf 109를 1기 격추시켰으나, 교전 도중에 자신도 엄호기의 사격에 피탄되어 기체에 큰 손상을 입었다. 에일러론이 거의 잠기고 플랩도 망가진 데다 조종석에도 총격을 당해 계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돌아와 간신히 혼처치 비행장에 착지했지만 아뿔싸! 유압 계통이 터진 것인지 브레이크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엉망으로 망가진 스핏파이어였지만 다행히도 콜린은 무사히 땅을 밟고 설 수 있었다. 54스쿼드론은 덩케르크 철수를 지원하면서 31대의 적기를 격추시켰고, 7대의 스핏파이어를 잃었다. 그중 전사는 4명이었는데, 콜린도 이 중에 낄 뻔했던 것이다.

서툴게 데뷔한 콜린 소위였지만 곧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금세 다가왔다. 7월 13일에 출격을 나갔다가 칼레 상공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 콜린 그레이는 한꺼번에 2대의 메서슈밋 전투기를 해치워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중 1대의 Bf 110에 타고 있던 한스 요아힘 랑게(Hans-Joachim Lange) 중위는 전사가 확인되었다. 그 후 영국 본토 항공전의 막이 열렸고, 콜린 그레이는 2개월 이상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면서 자신은 한 번도 격추당하지 않고 14대나 격추시켜 동료와 상관들로부터 주목을 끌게 된다. 그는 이 공로로 8월 15일에 공군 우수비행 십자장(Distinguished Flying Cross : DFC)을 수여받았고 진급도 이루어졌다. 이 기간 중에 그가 격추시킨 독일 파일럿 중에는 유독 지휘관이나 에이스가 여러 명 포함되어 있었는데, JG 52의 8중대장인 로싸르 에를리히(Lothar Ehrlich)나 하인리히 헬드(Heinrich Held) 중위, 그리고 JG 3의 6중대장 카를 베스터호프(Karl Westerhof) 같은 경우이다.

3. 인사의 파행

그런데, 영연방 파일럿 중에서도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뉴질랜드 출신 조종사들은 RAF 상부에서 같은 국가끼리 묶었다가 다시 해체시켜 다른 영국 출신 조종사들과 함께 복무하게 하는 등, 여러모로 고심하게 되는 존재였다고 한다. 따라서 콜린 그레이 역시 원대에서 빠져나와 이따금씩 제43비행대로 소속을 옮기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1년 1월에는 그에게 소령 계급장이 주어지며 원래 부대인 제54비행대로 지휘관 보직과 함께 되돌려졌다. 7월에는 제1비행대 지휘관에 임명되었다가 월말에는 다시 제616비행대장으로 근무처가 자주 바뀌었다.

4. 에이스 지휘관

1941년 9월 20일에는 17기 격추의 공적에 의해 두 번째로 공군 십자장을 받았다. 1942년 12월부터는 중동에서 알제리에 기지를 둔 제81비행대를 지휘하면서 5대의 적기를 더 제물로 삼은 콜린 그레이는 1943년 5월 13일에 두 번째 수훈 메달(Distinguished Service Order : DSO)을 수상했다. 이즈음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말타에 기지를 두고 이탈리아 침공 작전에 참가하는 제322비행단(No. 333 Group)의 지휘봉이 맡겨졌다. 이 전선에서 추가로 마키 C.202 같은 이탈리아의 신예 전투기를 포함하여 5대를 더 격추한 그는 세 번째로 공군 우수비행 심자장을 수여받았다. 9월 초에 영국으로 귀국한 콜린 중령은 기지 근처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1945년에는 베티 쿡(Betty Cook)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 부부는 2남 2녀를 슬하에 두고 평생을 함께하게 된다.

5. 종전 후

전쟁 동안 그가 거둔 공인 격추 기록은 27대로, 여기에 더해 협동 격추 2대, 그리고 비공인 격추 6대와 불확실한 협력 격추 4대를 플라이트 로그에 남기고 있다. 전후에도 공군에 계속 남게 된 그는 지휘관 및 참모를 역임하면서 말레이시아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종군하고 있었고, 워싱턴 D.C.에 연락장교로 파견을 가기도 했었다. 콜린 그레이는 1961년에 대령으로 예편한 다음 자신의 고향인 뉴질랜드로 돌아가 다국적기업 유니레버의 중역이 되었다. 1979년에 은퇴한 그는 와카나에 섬의 해변에 집을 짓고 노후를 즐기게 된다. 1990년에는 "스핏파이어 초계(Spitfire Patrol)"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펴내는 등 전쟁 기념행사에서도 가끔 얼굴을 내밀다가 1995년 8월 1일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RAF 인식 번호 41844에 대령으로 전역한 콜린 F. 그레이는 지금까지도 2차 대전 도중에 영국 공군에서 복무한 뉴질랜드 출신 파일럿 중에서 가장 많은 격추를 기록한 에이스 파일럿인 동시에 뉴질랜드인 최고의 톱 에이스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