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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27 22:44:02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이름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영어: Constantine Doukas, 그리스어: Κωνσταντίνος Δούκας)
출생 미상
사망 913년 6월 9일
직위 동방군 사령관
반란 대상 콘스탄티노스 7세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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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반란자. 콘스탄티노스 7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2. 행적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군직에 복무하여 동방 제국군 부대를 지휘했다. 904년 아랍 태생의 내시 사모나스가 아랍으로 도망치려 하자, 헬라스 강 근처의 시리카에 있는 성잡자가 수도원에서 체포했다. 레온 6세는 사모나스를 총애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스에게 사모나스가 실제로는 아랍으로 망명한 게 아니라 시리카의 성지로 순례하러 가는 중이었다고 진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는 원로원에게 진실을 밝혔고, 사모나스는 가택연금에 처했다가 레온 6세에 의해 4개월만에 사면되었다.

905년 가을, 아탈레이아 총독을 맡던 안드로니코스 두카스는 레온 6세로부터 제국 해군 사령관 이메리오스와 협력하여 타르소스로 진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보다 앞서, 트리폴리의 레온이라는 동로마인 출신의 전향자가 사라센 함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를 거쳐 마르마라 해로 진입했다가 격퇴되자 테살로니키로 진군해 904년 7월29일 제국 제2의 대도시였던 테살로니키를 함락하고 일주일간 살육을 자행하고 귀중한 전리품과 3만여 포로를 노획한 일이 있었다. 레온은 이에 보복하기 위해 육군과 해군의 합동 공세를 계획한 것이다.

그런데 앞선 일로 두카스 가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사모나스가 이메리오스가 안드로니코스를 잡아서 실명형에 처할 거라는 거짓 편지를 안드로니코스에게 보냈다. 안드로니코스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기함 승선을 단호히 거부했다. 하지만 이메리오스는 육군의 협력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타르소스로 진군해 사라센 함대를 완전히 격파하고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안드로니코스는 제국에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다가 토벌대를 피해 이코니온 부근의 카발라 요새로 도망쳤다. 거기서 6개월을 버티다가, 제국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콘스탄티노스와 함께 사라센 영토로 넘어가서 파괴된 타르소스에 잠시 체류한다음 바그다드로 피신했다.

레온은 바그다드로 사절단을 보내 포로 교환 협상을 벌였다. 이때 황제는 사절단에게 비밀 서신을 맡겨 안드로니코스에게 전하게 했다. 그 서신의 내용은 예전처럼 충성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원대 복귀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서신은 도중에 발각되었고, 안드로니코스 두카스는 이슬람교로 개종해 처형을 피했지만 철저한 감시를 받다가 910년경 사망했다. 한편 콘스탄티노스는 바그다드에서 탈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였고, 레온 6세의 용서를 받고 동방군 부대 지휘관이 되었다. 처음에는 에우스타시오스 아르히로스가 이끄는 하르시아논 테마 방면군 참모로 임명되었고, 913년경에는 동방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아랍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했다.

913년 6월, 콘스탄티노스 7세가 황위에 올랐지만 나이가 7세에 불과해서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를 위시한 섭정단이 황제를 대신하여 나라를 이끌었다.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는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황태후를 수도원으로 보내버리고 권력을 독점했다. 하지만 시메온 대제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의 압박이 날로 거세지자, 그는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에게 수도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지금이 황위를 찬탈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몇몇 추종자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잠입했다. 이후 장인인 그레고리오스 이베리체스의 집에 숨어서 파트리키오스 직책을 맡던 콘스탄티노스 헬라디코스 등 고위 관료들과 협의한 뒤 다음날 아침 동트기 전 원형 경기장으로 가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제 다 끝났다고 여기고, 소규모 병사만 거느린 채 칼케 대문으로 향했다. 그가 보기에 궁전의 대문은 내통자들에 의해 활짝 열려 있을 테니 이 정도 병력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섭정단의 한 사람인 마기스테르 요안니스 엘라다스는 그가 올 것을 예상하고 민병대를 급히 모집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두카스 일행이 오자 급습했다. 두카스는 전투 도중 자신의 아들인 그리고리오스를 비롯한 병사 몇 명이 죽자 달아나려 했지만 그가 탄 말이 젖은 포도 위에 미끄러졌다. 그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수비병 한 명이 한 칼에 그의 머리를 베었다.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는 자신이 두카스와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부인했고 두카스와 연루된 혐의가 있는 모든 이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장대에 꽂혀 보스포러스 해협의 아시아 쪽 해안에 전시되었다. 매질과 실명의 형벌을 당한 사람도 많았고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한 사람들도 끌고 나와 삭발시키고 수도원으로 추방했다. 두카스의 아내는 가문이 소유한 파플라고니아의 외딴 영지로 유배되었고 두카스의 또 다른 아들은 거세형을 당했다. 섭정단이 "너무 무자비하지 않냐"고 항의할 때에야 그는 비로소 유혈극을 중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