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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14:01:59

캠던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3.2. 대륙군
4. 전투 경과5. 결과6. 창작물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80년 8월 16일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이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캠던에서 영국군과 맞붙은 전투.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대륙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북미 대륙 남부 일대의 지배권을 굳힌다.

2. 배경

1780년 5월, 헨리 클린턴 소장이 이끄는 영국군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수도인 찰스턴을 공략했다.( 찰스턴 공방전) 이후 클린턴은 찰스 콘월리스 소장에게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나미지 지역을 점령하는 임무를 맡긴 뒤 뉴욕으로 귀환했다. 5월 18일, 콘월리스는 버포드 대령이 지휘하는 대륙군을 추격하기 위해 배내스터 탈턴 대령이 지휘하는 용기병 부대를 파견했다. 탈턴 대령은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접경지인 캔든에서 버포드 대령의 대륙군을 따라잡아 그들을 격파했다. 이후 콘월리스는 나머지 군대와 함께 캔든에 도착한 뒤 캠던을 작전 기지로 삼고 상당량의 물자를 그곳에 모았다. 콘월리스는 라우돈 경에게 캠던 주둔 영국군을 지휘하게 한 뒤 자신은 찰스턴으로 돌아갔다.

1780년 7월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휘하 대륙군이 북쪽 식민지에서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진군했다. 사실 대륙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자신의 참모인 내서니얼 그린 소장이 남부 일대의 영국군을 상대하는 데 적합한 인재라며 그야말로 남부 방면 대륙군 사령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존 애덤스 등 게이츠를 지지하는 이들은 새러토가 전투의 영웅인 게이츠야말로 사령관이 되기에 적합한 인재라고 반박했고사실 새러토가 전투는 전적으로 베네딕트 아놀드의 덕이고 게이츠는 입만 나불댄 것이지만[1], 결국 대륙의회는 게이츠를 남부 방면 대륙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게이츠가 이끄는 대륙군이 캠던으로 접근하자, 라우돈 경은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찰스턴에 전령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콘월리스는 8월 14일 캠던에 도착한 후 8월 15일 밤 병사들을 이끌고 야간 행진을 벌여 대륙군에게 접근했다. 이후 8월 16일 아침, 영국군이 자신들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게이츠는 즉시 병사들에게 전투 대형을 갖추라고 지시했다. 이리하여 북미 식민지 남부 일대의 패권을 둘러싼 대륙군과 영국군의 전투가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3.2. 대륙군

4. 전투 경과

1780년 8월 16일 아침, 양군은 캠던 평원에서 전투 대형을 갖췄다. 이 들판은 측면과 전방 사이에 늪지대가 형성된 좁은 개활지였다. 콘월리스는 웹스터 대령에게 제23 왕립 웨일스 전열 연대와 제 33 전열 연대 및 대포 2문을 맡겨 우익에 포진시켰고, 라우돈 경의 아일랜드 자원병대를 좌익에 배치했으며, 탈레톤 대령의 보병대와 영국 충성파 민병대, 그리고 대포 2문을 중앙에 배치했다. 또한 프레이저 대령의 제 71 하이랜드 보병대와 용기병대를 후방에 예비대로 편성했다.

이에 맞선 게이츠는 우익에 모르데카이 기스트 장군 휘하 제2 메릴랜드 정규연대와 제1 델라웨어 정규연대, 그리고 대포 2문을 배치했다. 그리고 중앙엔 카스웰 장군 휘하 노스 캐롤라이나 민병대 및 대포 2문을 배치했고, 좌익엔 스티븐스 장군 휘하 버지니아 민병대와 대포 2문을 배치했다. 또한 후방엔 스몰우드 장군 휘하 제1 메릴랜드 정규 연대와 대포 2문으로 편성된 예비대를 배치했다.

양측 모두 자신의 우익에 정예병을 배치했고, 좌익에는 민병대를 배치했다. 따라서 전투가 시작되면 양측의 우익이 상대의 좌익을 공격하며 반시계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형국이 벌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경우 어느쪽의 좌익이 오래 버티느냐가 승부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였다.

전투가 개시되자, 콘월리스가 명령한 것 역시 바로 그것이었다. 영국군은 우익이 공격하고 좌익이 방어하는 태세로 전투를 개시했다. 하지만 게이츠의 명령은 예상밖이었다. 그는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에 배치된 버지니아 민병대에게도 영국군 우익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에 따라 버지니아 민병대가 전진하자, 영국군은 즉각 반격했다. 당시 잘 훈련되지 않았던 버지니아 민병대는 적이 일제사격을 가하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당시 이들은 너무나 빨리 도망가서 사상자가 단 3명의 부상에 불과했다고 한다. 한편 좌익의 아군이 패주하는 걸 목격한 우익의 대륙 정규병들도 동요했다. 웹스터가 지휘하는 우익의 영국 연대는 도망가는 버지니아 민병대를 추격하기보다는 대륙군 우익 측면으로 진입해 타격을 입히려고 시도했다. 이제 이들을 막아야 할 중앙의 노스 캐롤라이나 민병대에서도 대규모의 도주가 발생했으나 일부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으며, 대륙군의 드칼브 장군[2]은 후방의 메릴랜드 연대를 전진시켜 이들을 지원하려 했다. 하지만 메릴랜드 연대 역시 도중에 겁을 먹고 멈춰버렸으며, 마침내 탈레톤의 영국군 기병대가 출격해 대륙군 우익의 후방으로 진입하자 우익의 대륙군 정규 연대를 비롯한 전 군대가 전의를 상실하고 붕괴되었다. 영국 기병대는 도주하는 대륙군을 35킬로미터나 추격했다.

당시 호레이쇼 게이츠는 민병대 1개 부대와 함께 전장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지켜보다가 아군의 전열이 무너지자 급히 도주했다. 반면 드칼브는 어떻게든 병사들을 수습해 영국군에게 저항하다가 총탄을 8번이나 맞고 총검으로 세번 찔린 뒤 포로가 되었으며 이틀 후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하지만 드칼브가 끝까지 싸워줬고 영국 기병대들이 늪지대를 건너 적을 추격하는데 애를 먹은 덕분에, 대륙군은 완전히 섬멸될 위기에서 벗어나 상당한 전력을 보존한 채 후퇴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캠던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영국군은 캠던 전투에서 324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반면 대륙군은 1,0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1,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으며, 대포 7문과 모든 보급품을 상실했다. 영국은 이 전투를 계기로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장악했다. 게이츠는 캠던 패전 후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패전 책임을 추궁당한 뒤 다시는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1782년 뉴버그로 가서 참모 노릇을 하다가 전쟁 후 퇴역하여 버지니아로 돌아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6. 창작물


멜 깁슨 주연,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패트리어트에서 이 전투를 묘사한다. 전투를 지켜 보던 벤저민 마틴(멜 깁슨)은 "게이츠 놈은 병신이야. 영국군에 너무 오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평지에서 레드 코트와 정면으로 맞붙다니. 미친거지. 이 전투는 싸우기도 전에 이미 진거야."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묘사하는 전투 모습은 실제 전투와는 약간 다르다.
[1] 호레이쇼 게이츠는 존 애덤스 등과 친분이 있었지만 아놀드는 정치가와 인맥이 없었기 때문에 공을 홀라당 도둑맞았다. 그렇다고 배신때린 놈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2] 독일 출신이었으나 프랑스군에서 복무했고,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서 공을 세워 남작이 되었다. 라파예트와 함께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장군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