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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1:02:45

카구야히메(밴드)


1. 개요2. 역사3. 디스코그래피

1. 개요

일본의 포크 밴드. 1970년 ~ 1975년까지 활동.

2. 역사

1970년 미나미 코우세츠(南こうせつ), 모리 신이치로(森進一郎), 오오시마 산페이(大島三平)가 모여서 데뷔하였다. 당시의 그룹명은 미나미 코우세츠와 카구야 공주(南高節とかぐや姫)였으며, 당시의 대표곡은 주정뱅이 카구야 공주(醉いどれかぐや姫)였다.

이후 미나미 코우세츠는 모리 신이치로와 오오시마 산페이 대신 이세 쇼우조우(伊勢正三), 야마다 판다(山田パンダ)와 함께 미나미 코우세츠와 카구야히메(南こうせつとかぐや姬)를 결성하여 첫 싱글 청춘(青春)으로 데뷔한다.

1973년 9월에는 그들의 대표작인 칸다가와(神田川)를 발매한다. 칸다강은 카구야히메의 다섯번째 싱글로 여기서부터 정식으로 카구야히메란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칸다강은 최종적으로 160만장이 판매된 카구야히메의 최대 히트작이 되었으며 안보투쟁 당시에 불리어졌던 사회파 포크(社会派フォーク)[1]를 대신한 생활파 포크(生活派フォーク),[2] 4첩반 포크(四畳半フォーク)[3]의 대표작으로 당대의 젊은 세대[4]에게 사랑받았다. 현재에도 일본에서는 첫 기타 연습곡으로 널리 연주되고 있으며, 나카노구의 스에히로교 근처 공원에는 칸다강의 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후 데메 마사노부(出目昌伸)에 의해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후 미나미 코우세츠는 22세의 이별(22才の別れ) 혹은 때늦은 눈(なごり雪)의 발표를 준비하였지만, 음반사의 압력에 의해 붉은 초롱(赤ちょうちん)을 먼저 발매하였고, 이런 음반사의 전횡 때문에 카구야히메는 1975년 도쿄 칸다공립강당(神田共立講堂)에서 해산 콘서트를 가진 후 동년 4월 12일 해산하게 된다.

이후 1978년, 1999년, 2005년, 2006년에 콘서트와 라이브 공연 등을 목적으로 하여 재결성되었다.

노래의 분위기는 4첩반 포크라는 장르에 걸맞게 전체적으로 사회비판적인 내용이 아닌, 개인의 일상과 가족애, 연인간의 사랑 등을 주로 다루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한국의 포크송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며, 적당한 빠르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분위기의 곡이 많다. 나는 무엇을 해도 안되는 남자입니다(僕は何をやってもだめな男です)와 같은 코믹한 분위기의 노래도 있으며, 청춘(青春), 칸다강(神田川)과 같이 학창시절을 추억하거나 과거를 회상하는 노래들 또한 많다.

대표곡은 칸다강(神田川)을 위시하여 붉은 초롱(赤ちょうちん), 여동생(妹), 22세의 이별(22才の別れ), 때늦은 눈(なごり雪) 등이 있다.

3. 디스코그래피

싱글 및 앨범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싱글 목록

주정뱅이 카구야 공주 (酔いどれかぐや姫)
변조 타바루 언덕 (変調田原坂)
혼자 잠드는 카구야 공주 (ひとり寝のかぐや姫)
청춘 (青春)
타나카 군이 아닌가 (田中君じゃないか)
나는 무엇을 해도 안되는 남자입니다 (僕は何をやってもだめな男です)
내 가슴에서 잠드세요 (僕の胸でおやすみ)
칸다강(神田川)
붉은 초롱(赤ちょうちん)
여동생 (妹)
청춘의 아픔 (青春の傷み)

- 앨범 목록

레츠 고! 카구야 히메 (レッツ・ゴー! かぐや姫)
처음 뵙겠습니다 (はじめまして)
카구야히메 온 스테이지 (かぐや姫おんすてーじ)
카구야히메 서드 (かぐや姫さあど)
3층집 노래 (三階建の詩)
카구야히메 라이브 (かぐや姫LIVE)
카구야히메 포에버 (かぐや姫フォーエバー)
카구야히메 오늘 (かぐや姫・今日)
Best Dreamin'
베스트 드리밍 콘서트 (ベスト・ドリーミン コンサート)

[1] 사회파 포크란 안보투쟁 당시 불렸던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포크를 말한다. [2] 생활파 포크는 때로 사소설 포크(私小説フォーク)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회파 포크의 쇠퇴 이후 사회비판적인 내용 대신 개인의 생활과 사랑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3] 4첩반 포크(四畳半フォーク)란 생활파 포크 중에서도 특히 가난하지만 행복한 연인과 같은 순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던 포크를 말한다. 다다미 4첩반의 크기는 약 2평으로 당시 동경의 고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열악한 주거환경이였다. [4] 흔히 무관심 세대(しらけ世代)라고 불렸다.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당시의 젊은 세대에서는 안보투쟁의 실패로 인해 무관심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한 무기력, 무관심, 무책임의 3무주의가 중심이 된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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