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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2:24

카가 번

<colbgcolor=#000><colcolor=#fff> 카가 번
加賀藩
파일:img-map-kaga.png
중심지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다이묘 마에다 가문
고쿠다카 102만 석
지번 도야마 번(富山藩)
다이쇼지 번(大聖寺藩)

1. 개요2. 세력3. 역사4. 역대 번주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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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가 번(加賀藩)은 에도 시대 카가 국(加賀国), 노토 국(能登国)(현 이시카와현), 엣추 국(越中国)(현 도야마현)을 지배한 마에다 가문의 이다.[1] 이외에 오미 국 일부(현 시가현 타카시마시)를 월경지로 보유하고 있었다. 판적봉환 이후에는 본거지인 현재의 가나자와시에 위치한 가나자와 성의 이름을 따 잠시 가나자와 번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2. 세력

1664년 칸분 인지 당시에는 고쿠다카 102만 5000석, 막말 당시에는 우치다카(실질적인 고쿠다카) 133만 8000석으로 에도 시대 내내 에도 막부 쇼군가를 제외하면 모든 번들 중 가장 높은 고쿠다카를 자랑했으며 메이지 유신 직후 실시된 인구조사에서는 106만명의 인구를 기록하여 일본의 번들 중 유일하게 100만명이 넘는 가장 인구가 많은 번이었다. 번의 수도였던 가나자와 에도 시대 당시에는 삼도(三都)라 불린 에도, 오사카, 교토 바로 다음가는 일본 전체에서 4번째로 큰 대도시였다. # 번주가 1753년 에도에 행차를 할 때는 무려 2753명의 수행단을 거느렸다는 기록이 있을만큼 부유한 번이었다. 원래 막부가 정한 최소 수행단 제한은 450명(20만석 이상 기준)에 불과했다.

세력이 상당히 크다보니 카가번주인 마에다 가문은 시코세키(다이묘들이 쇼군을 배알하기 위해 기다리는 자리)에서 쇼군가의 친족인 도쿠가와, 마츠다이라 가문이 아닌 가문으로서는 유일하게 가장 상석인 오오로카에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쇼군에게는 배신(신하의 신하)이 되는 마에다 가문의 직속 가신들에게도 관위를 수여해주는 등 도자마 다이묘임에도 불구하고 막부로부터 고산케에 버금가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3. 역사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대로중 한명인 마에다 토시이에의 영지를 기원으로 하며, 마에다 토시이에 사후 토시이에의 영지 일부인 노토국은 그의 차남 마에다 토시마사(前田利政, 1578 ~ 1633)에게 분할 상속되었고 나머지는 장남 마에다 토시나가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토시마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西軍)으로 가담했기 때문에 전투 후 토시마사의 영지 노토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몰수되었는데 반해, 토시나가는 동군(東軍)으로 서군 다이묘들과 싸웠기에 전후 논공행상에서 영지(서군에 가담한 토시마사의 노토 국과 서군 다이묘의 영지 일부)를 가증 받아 카가, 노토, 엣츄 3개국에 걸쳐 120만석의 거대한 영지를 가진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에도막부가 세워짐으로써, 마에다 가문은 120만석을 가진 카가번의 번주가 되었다. 게다가 모리 데루모토,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 100만석 이상의 영지를 가진 다른 대영주들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를 적대한 서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에도 막부에 의해 대규모의 영지 감봉을 당해 고쿠다카가 대폭 삭감되면서 100만석 이상 대영주는 마에다 가문의 카가번만이 남아[2] 에도 막부 내내 고쿠다카 1순위를 지킬 수 있었다.

3대 번주(藩主) 마에다 토시츠네 시절(前田利常, 1594 ~ 1658)엔 토시츠네가 노년에 은거를 하면서, 120만석 중 18만석 정도를 각각 차남과 삼남에 분배해 지번(支藩 - 일종의 분가)인 도야마 번(富山藩, 메이지때 10만석이며 백작 작위 획득)과 다이쇼지 번(大聖寺藩, 메이지때 10만석이며 자작 작위 획득)을 세워 카가번의 최종 고쿠다카는 102만석이 되었다.

막말에는 막부의 편을 들어 금문의 변 당시 번주 마에다 나리야스(前田斉泰, 1811 ~ 1884)는 장남 요시야스를 교토에 파견해 교토고쇼를 지키게 했지만 존황양이파 인사들과 친했던 요시야스(前田慶寧, 1830 ~ 1874)는 막부와 조슈 번을 중재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월경지인 오미국으로 도망가 칩거한다. 이에 격분한 나리야스는 요시야스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고 요시야스와 친밀하던 번내의 존황양이파 인사들을 대규모로 숙청한다. 그러나 이후 요시야스가 나리야스의 뒤를 이어 번주 자리에 즉위한 후 보신 전쟁에서는 뒤늦게 신정부군에 가담하지만 이미 한참 늦어버린 뒤였고(...) 존황양이파 인사들은 나리야스에 의해 이미 다 숙청된 후라 번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신정부에서도 사실상 냉대받았고 공작 작위를 받은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과 조슈의 모리 가문보다 한단계 낮은 후작 작위를 받았다.[3][4]

사실 카가 번의 세력과 규모를 봤을때 이들이 메이지 유신에 좀 더 일찍 가담했다면 유신 이후에도 사쓰마, 조슈 못지 않은 번벌 세력이 될수도 있었겠지만 막부의 홀대와 견제를 받아오면서 도쿠가와에게 쌓인 것이 많아 도막파가 쉽게 정권을 잡을수 있었던 사쓰마, 조슈와는 달리 위에서 설명했듯이 카가번은 에도시대 내내 막부에게 상당한 우대를 받아온지라 막부에 쉽게 반기를 들기 어려웠다. 위에서 언급한 마에다 나리야스와 요시야스부터가 각각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사위와 외손자로, 막부와 밀접한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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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대 번주

5. 기타

파일:100116109.png


[1] 위 지도에서 초록색으로 나타낸 카가국뿐만 아니라 카가국 북쪽으로 튀어나온 반도인 노토국, 카가 동쪽의 엣추국까지 포함했다. [2] 다테 가문의 센다이 번이 지속적인 영지 개발로 실소출 백만석을 넘기긴 했지만 그게 명목 고쿠다카로 인정받지는 못하였고, 에도시대 중기 이후론 대기근의 여파로 큰 타격을 입어 카가 번 만큼의 대우를 받지는 못하였다. [3] 단, 이는 딱히 카가만 그런 것은 아니고 신정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도사 번이나 사가 번, 히로시마 번 등도 일괄적으로 석고 15만석 이상 다이묘들이 받는 후작위에 그치긴 했다. 신정부 실세 삿초 동맹만 특별대우를 받은 것 뿐이다. 다만 시마즈나 모리보다 대우가 낮은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20만에서 30만 석 수준의 도쿠시마 하치스카, 오카야마/돗토리 이케다, 아키타 사타케 등과 동급이 된 것은 다소 억울할 만 하다. [4] 이렇게 홀대받은 것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건지 구 카가 번사들이 메이지 신정부의 실세였던 오쿠보 도시미치를 암살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