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충청북도 문화재연구원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忠州 白雲庵 鐵造如來坐像. 충청북도 충주시의 사찰인 백운암에 위치한 9세기~10세기경 통일신라 시대의 철조 불상. 현재 충북 충주시 엄정면 내창로 617-80, 백운암(괴동리)에 소재 중이며, 대한민국 보물 제1527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충주시 백운암의 대웅전에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는 신라시대 철조여래좌상으로, 현재 충주 지역 3대 철불 중 하나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제작 연대는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로 추정된다.
충주는 고대로부터 한반도 내에서 순도 높은 철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때문에 본 지역에는 철로 된 고전 작품들이 많이 전하고 있는데 이 철조여래좌상은 그 중 하나로,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98호)과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12호)과 함께 충주 지역 3대 철불로 유명하다.
본 작품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신라 말, 고려 초에 2km 쯤 남쪽에 창건된 억정사(億政寺)라는 사찰에서 관리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억정사가 조선시대에 폐사된 후 공터에 버려져 있던 것을, 1886년에 진령군(眞靈君, 혹은 臻靈君) 여대감(女大監) 윤씨[1]라는 인물이 현재의 위치에 백운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만든 후 이리로 가져온 것이다.
이 철불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 진다. 1882년( 고종 19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명성황후가 충주지방으로 도망쳐왔는데 이 때 한 여성 무당이 나타나 명성황후의 운명을 점치며 황후께서는 걱정할 필요없고 곧 다시 환궁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이후 정말로 그 예언대로 환궁하게 되자 이 무당에게는 진령군이라는 벼슬이 내려졌는데 조선시대에 여성이 군(君)으로 봉해진 것은 이것이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였다.
이러한 대박을 건진 후 어느 날 진령군의 꿈에 흰옷을 입은 철불이 나타나 자신이 너무 고통스러운 상태라며 지금의 위치에 자신을 안치하여 달라고 하였다. 이에 현 자리에 암자인 백운암을 짓고 공터에 버려져 있던 본 불상을 가져와 봉안했다 한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의 특징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 수많은 충주 지역 철불 중에서도 가장 연대가 오래된 상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전에는 근현대의 다른 불상들과 마찬가지로 후대인들에 의해 황금으로 전체 몸통을 개금한 상태였으나, 2006년에 불상의 개금을 벗겨내는 작업을 실시하여 신라시대 당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으로부터 1,000여년~1,100여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철조 불상으로, 당시 충주 지역의 철조공예술 및 불교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에 2007년 10월 24일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주백운암철조여래좌상
- 두산백과 :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 한국어 위키백과 :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 향토문화전자대전 :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 답사여행의 길잡이 12 - 충북 : 백운암 철불좌상
4. 보물 제1527호
충주시에 소재한 백운암은 1886년 무당의 신분으로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받아 여자 대감이 된 윤씨에 의하여 창건된 사찰로 전해진다. 이 사찰에서 주존불로 봉안하고 있는 이 철불은 원래 이곳에서 전하던 불상은 아닌데, 인근에 고려시대 대규모 사지인 억정사지(億政寺址)가 있어서 아마도 이곳에서 옮겨온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충주는 철의 산지로 백운암의 철조여래좌상 이외에도 대원사(大圓寺)의 충주철불좌상(보물 제 98호)과 단호사(丹湖寺)의 철불좌상(보물 제512호)이 전하고 있어서, 이 세 구의 철불은 충주 지방의 3대 철불로 알려져 있다.
백운암의 철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8세기 석굴암 본존상 이래로 유행한 편단우견(偏袒右肩)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여래 좌상으로, 규모는 높이 87㎝정도의 크지 않은 상이다. 얼굴은 몸 전체에 비해 작은 편이나 이목구비의 표현이 뚜렷하고 근엄한 표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이고 어깨가 넓으며 가슴이 융기되었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의 폭이 넓어서 당당한 자세를 보인다. 몸의 표현이 전체적으로 양감있게 조각되었고 대의 자락에서 부분적으로 번파식 옷주름을 볼 수 있어서 이 불상이 통일신라 8세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는 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감이 8세기 불상만큼 풍부한 것은 아니며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도 전형적인 형식이 아니어서 8세기보다는 시대가 내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정도로 추정된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비교적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특징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 충주 지역 철불 중에서는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상으로 추정된다. 또한 상호도 원만하며 전체적으로 크게 손상된 부분이 없고 조각 양식도 좋은 편으로, 통일신라시대 이래 철불 연구에 매우 중요한 상이다.
백운암의 철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8세기 석굴암 본존상 이래로 유행한 편단우견(偏袒右肩)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여래 좌상으로, 규모는 높이 87㎝정도의 크지 않은 상이다. 얼굴은 몸 전체에 비해 작은 편이나 이목구비의 표현이 뚜렷하고 근엄한 표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이고 어깨가 넓으며 가슴이 융기되었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의 폭이 넓어서 당당한 자세를 보인다. 몸의 표현이 전체적으로 양감있게 조각되었고 대의 자락에서 부분적으로 번파식 옷주름을 볼 수 있어서 이 불상이 통일신라 8세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는 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감이 8세기 불상만큼 풍부한 것은 아니며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도 전형적인 형식이 아니어서 8세기보다는 시대가 내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정도로 추정된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비교적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특징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 충주 지역 철불 중에서는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상으로 추정된다. 또한 상호도 원만하며 전체적으로 크게 손상된 부분이 없고 조각 양식도 좋은 편으로, 통일신라시대 이래 철불 연구에 매우 중요한 상이다.
[1]
교수 조혁연은 윤尹씨 아니라 이李씨 라고 한다
https://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469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