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식사에 대한 내용은 사형 문서
의
마지막 식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 복음서의 에피소드
(The) Last Supper기독교의 신약성경 중 복음서에 있는 에피소드로 4복음서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대체적으로는 예수가 체포되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제자들 가운데 배신자가 있음을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고[1] 빵과 포도주를 들어 기도한 후 이것이 자신의 피와 살이라 말하면서 나누어준다. 여기에서 성체성사 혹은 성만찬 의식이 나오게 된다.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시고,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잘 들어두어라.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올리브 산으로 올라갔다.
마태오 복음서 26장 26-30절, 공동번역성서
마태오 복음서 26장 26-30절, 공동번역성서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눠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건네시자, 그들은 잔을 돌려가며 마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잘 들어두어라.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나는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그들은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올리브 산으로 올라갔다.
마르코 복음서 14장 22-26절, 공동번역성서
마르코 복음서 14장 22-26절,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자, 이 잔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잘 들어라.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는
포도로 빚은 것을 나는 결코 마시지 않겠다." 하시고는, 또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음식을 나눈 뒤에 또 그와 같이 잔을 들어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하셨다.
루카 복음서 22장 17-20절, 공동번역성서
루카 복음서 22장 17-20절, 공동번역성서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코린토1서 11장 23-25절, 공동번역성서
이 저녁식사를 두고서 파스카(
과월절)을 기념하는 저녁식사였나 아니었나에 대한 논쟁이 좀 있다. 이는 공관복음서(파스카)와 요한 복음서(파스카 준비일)의 증언이 엇갈리기 때문이다.코린토1서 11장 23-25절, 공동번역성서
다만 어느쪽으로 생각하든 교리적으론 문제가 없고[2] 각각 의미는 있다. 공관 복음서에 따라 "최후의 만찬은 파스카 만찬이다"로 본다면, 예수는 만찬 자리에서 먹는 파스카 양고기를 자신으로 대신한 것이 된다. 반면 요한 복음서에 따라 "십자가 죽음이 파스카 날에 있었다"고 본다면, 예수는 파스카 날 성전에서 도살되는 양을 자신으로 대신한 것이 된다. 즉 '먹히는 양'이냐 '도살되는 양'이냐의 차이이지, 둘 다 예수의 희생을 드러내는 것이며, 실질적 차이는 없다. '먹히는 양'은 도살을 전제하고, '도살되는 양'의 목적은 먹히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최후의 만찬에 쓰인 잔이 성배라는 전설도 생겨났다.
2.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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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246> 문화유산 |
1979년 발 카모니카의 암각화 Incisioni rupestri della Val Camonica |
1980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와 도미니코 수도원 및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Chiesa e convento domenicano di Santa Maria delle Grazie con l'Ultima Cena di Leonardo da Vinci |
1980년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Centro storico di Roma, le proprietà extraterritoriali della Santa Sede e la 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
1982년 피렌체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Firenze |
1987년 베네치아와 석호 Venezia e la sua laguna |
1987년 피사의 두오모 광장 Piazza del Duomo di Pi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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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산지미냐노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San Gimignano |
1993년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교회 I Sassi e il parco delle chiese rupestri di Matera |
1994년 베네토의 비첸차 시와 팔라디오 양식 건축물 Città di Vicenza e le ville palladiane del Vene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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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시에나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Siena |
1995년 나폴리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Napoli |
1995년 크레스피 다다 Crespi d'Ad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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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르네상스 도시 페라라와 포 삼각주 Ferrara, città del Rinascimento, e il suo delta del Po |
1996년 몬테 성 Castel del Monte |
1996년 알베로벨로의 트룰리 Trulli di Alberobell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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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라벤나의 초기 기독교 기념물 Monumenti paleocristiani di Ravenna |
1996년 피엔차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Pienza |
1997년 카세르타의 18세기 궁전과 공원, 반비텔리 수도교, 산 레우초 Palazzo Reale del XVIII secolo di Caserta con il Parco , l' Acquedotto di Vanvitelli e il Complesso di San Leuci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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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사보이아 궁중저택 Residenze della Casa Reale di Savoia |
1997년 파도바 식물원 Orto botanico di Padova |
1997년 포르토베네레, 친퀘테레와 섬들 (팔마리아 섬, 티노 섬, 티네토 섬) Portovenere, le Cinque Terre e le isole (Palmaria, Tino e Tinet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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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모데나의 대성당, 토레치비카, 피아차 그란데 Cattedrale, Torre Civica e Piazza Grande di Modena |
1997년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그리고 토레 아눈치아타 고고 지구 Aree archeologiche di Pompei, Ercolano e Torre Annunziata |
1997년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 Costiera amalfita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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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아그리젠토 고고 지구 Area archeologica di Agrigento |
1997년 카살레의 빌라 로마나 Villa romana del Casale |
1997년 수 누락시 디 바루미니 Su Nuraxi di Barumi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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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아퀼레이아의 고고 지구와 가톨릭 성당 Area archeologica e Basilica patriarcale di Aquileia |
1998년 우르비노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Urbino |
1998년 칠렌토 ・ 발로 디 디아노 국립공원, 파에스툼과 벨리아 고고 유적지 Parco nazionale del Cilento e Vallo di Diano con i siti Archeologici di Paestum e Velia e la certosa di Padu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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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티볼리의 빌라 아드리아나 Villa Adriana, Tivoli |
2000년 베로나 시 Città di Verona |
2000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과 프란치스코회 유적 Assisi, la basilica di San Francesco e Altri siti Francesca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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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빌라 데스테, 티볼리 Villa d'Este, Tivoli |
2002년 시칠리아 남동부 발디노토의 후기 바로크 도시 Città tardo barocche del Val di Noto (Sud est Sicilia) |
2003년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의 사크리 몬티 Sacri Monti del Piemonte e della Lombard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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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체르베테리와 타르퀴니아의 에트루리아인 네크로폴리스 Necropoli etrusche di Cerveteri e Tarquinia |
2004년 발 도르차 Val d'Orcia |
2005년 시라쿠사와 판틸리카 바위 네크로폴리스 Siracusa e la necropoli di Pantali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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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제노바 : 르 스트라다 누오보와 팔라치 데이 롤리 Genova: Le Strade Nuove ed il Complesso dei Palazzi dei Rolli |
2008년 알불라 ・ 베르니나 지역의 래티셰 철로 Ferrovia Retica nei paesaggi dell'Albula e del Bernina |
2008년 만토바와 사비오네타 Mantova e Sabbione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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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 : 권력의 장소 (568년 ~ 774년) Longobardi in Italia : I luoghi del potere (DLXVIII al DCCLXXIV d.C.) |
2011년 알프스 주변의 선사 시대 호상 가옥 Siti palafitticoli preistorici attorno alle Alpi |
2013년 토스카나의 빌라 메디치와 정원 Ville e giardini medicei in Tosca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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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피에몬테의 포도밭 경관 : 란게 - 로에로와 몬페라토 Paesaggio vitivinicolo del Piemonte : Langhe-Roero e Monferrato |
2015년 아랍 - 노르만 팔레르모 그리고 체팔루 대성당과 몬레알레 대성당 Palermo arabo-normanna e le Cattedrali di Cefalù e Monreale |
2017년 16~17세기 베네치아의 방어 시설 : 스타토 다 테라 - 스타토 다 마르 서부 Opere di difesa veneziane tra XVI e XVII secolo : Stato da Terra-Stato da Mar occidenta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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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이브레아 : 20세기 산업도시 Ivrea, città industriale del XX secolo |
2019년 프로세코 디 코넬리아노와 발도비아데네 구릉지 Colline del Prosecco di Conegliano e Valdobbiadene |
2021년 파도바의 14세기 프레스코화 Cicli di affreschi del XIV secolo di Padov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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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유럽의 거대 온천 도시들 Grandi città termali d'Europa |
2021년 볼로냐의 포르티코 Portici di Bolog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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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유산 |
2000년 에올리에 제도 Isole Eolie |
2003년 몬테 산 조르조 산 Monte San Giorgio |
2017년 카르파티아 및 유럽의 기타 지역에 생육하는 고대 및 원시 너도밤나무 숲 Antiche faggete primordiali dei Carpazi e di altre regioni d’Europ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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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돌로미티산맥 Dolomiti |
2013년 에트나 산 Monte Et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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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Ultima C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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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 레오나르도 다 빈치 |
국가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제작 | 1490년 |
사조 | 르네상스 |
종류 | 벽화 |
기법 | 석고벽 위 제소와 수지(resin)에 템페라 |
크기 | 880cm × 700cm |
소장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왼쪽부터 바르톨로메오, 대 야고보, 안드레아, 베드로, 유다 이스카리옷, 사도 요한, 예수 그리스도, 소 야고보, 토마스, 필립보, 마태오, 유다 타대오, 시몬 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으로, 예수가 자신의 열두 제자들에게 "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제자들이 깜짝 놀라는 순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3] |
영어 | [4] | |
프랑스어 | [5] | |
국가·위치 |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밀라노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0년 | |
등재기준 | (i)[6], (ii)[7] | |
지정번호 | 93 |
(작품 소개 영상)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템페라 벽화.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1495~1497)>.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가 잡혀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최후의 만찬은 성화의 소재로도 자주 쓰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 다빈치가 그린 것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벽화는 훼손이 심한 편이다. 다 빈치의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벽을 약간 뜯어낸 뒤, 뜯어낸 크기만큼 축축한 회반죽을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빠르게 그리는 프레스코화가 일반적이었다. 이 기법은 그림을 단순히 벽 표면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벽에 미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이 물리적으로 벽의 일부가 되며, 내구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그런데 매우 이례적이게도 다빈치는 가능한 한 매끄럽게 만든 벽에 달걀 노른자 등의 수성 접착제를 입히고 그 위에 유화를 그리는 템페라 기법을 활용했다. 이는 프레스코 기법이 생각하면서 천천히 그리는 다 빈치에게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 벽화는 프레스코화보다 쉽게 변질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림이 많이 훼손되었다.[8]
다 빈치는 엄청나게 큰 벽[9]에 벽화를 그리는 동안 비례가 어긋날 것을 고려해 종이에 미리 스케치한 후, 선을 벽에 따서 세심하게 칠했다. 또한 다빈치는 창문 밖과 식당 조명을 고려해 그림자를 매우 능동적으로 이용해서 인물 한 명 한 명을 생동감 있게[10] 묘사해 원본이 막 완성되었을때 보았다면 거의 실물 묘사에 가까웠을것이라고 하며, 원근법을 잘 살려 그림 상단에 성당 벽 무늬[11]를 이어 그려서 마치 그림이 그려진 성당 내에서 최후의 만찬이 실제로 진행되는 듯한 착시 효과를 일으키도록 하면서도 아름다운 구도를 해치지 않았다.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의 모델을 찾다가 한 착한 청년을 만나서 그를 모델로 예수를 그린 후, 세월이 지나서 다시 범죄자를 찾아서 그를 모델로 유다 이스카리옷을 그렸는데 둘이 실은 동일인물이었다는 속설도 있다.[12] 다만 이는 역사적 사실은 아닌 듯하다. 또한 다 빈치에게 "그림이 완성되려면 아직 멀었냐"며 항상 닦달했던 모 수도자가 유다의 모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역시 확인되지는 않은 이야기. 다빈치의 라이벌이었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경우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 최후의 심판'을 그리던 도중 체세나 추기경이 '그림이 너무 불경하다'고 비판하자, 체세나 추기경의 얼굴을 지옥의 왕인 미노스의 얼굴로 그려버린 것.
일설에는 이 그림을 그리는데 2년 9개월이 걸렸는데 사람들을 그리는 데는 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고, 나머지 기간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림에 그릴 메뉴를 고르는데 걸린 시간이었다고.[13]
현재 보는 최후의 만찬 그림이 오리지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1977년 복원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최후의 만찬은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고, 이 그림은 22년에 걸쳐서 복원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부 전문가들은 원본에 없는 색을 덧칠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영국의 언론이나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등에서도 원작이 아니라 화가들이 덧칠한 수준이라는 비판을 내놓기도 했다. 특히 논란이 된 부분은 예수의 얼굴로 예수의 얼굴에서 수염을 제거해버린 배경이 되었던 드로잉이 다 빈치의 작품인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평가가 있다. 복원이 완료된 시점에서는 원본과 변경점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 그림은 실제 역사 기준으로 한 묘사와 꽤 다른 부분이 많다. 먼저 최후의 만찬은 파스카의 만찬으로 파스카 식사는 해가 진 다음에 먹는 건데, 그림에선 창 밖 풍경에서 보이듯 대낮이다. 성경에서는 포도주를 마셨다고 하는데 포도주 병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테이블 위의 빵이 덩어리 모양인데 유대인들은 파스카에는 네모나게 생긴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는다. 몇몇 사람의 복장이 르네상스풍이다. 원래 고대 유대인들의 식사에서 사용한 탁자는 매우 낮은데 그림에 묘사된 식탁은 유럽식 테이블이다.
전통적인 고대 유대인들의 식탁은 이렇게 생겼다. 유데아뿐 아니라 당시 고대 로마 시대는 연회 때 평상에 누워서 먹었다. 고대 근동지역 아시리아 및 이집트 신바빌론 지역에서 왕 같은 최고 권력자들이 누운 자세로 식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에 유데아 및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까지 이런 식사자세가 자유민 남성에게 보편적인 생활 방식였다.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ㄷ’자 모양의 ‘트리클린니움’ 식탁에서 먹었고, 방의 출입문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일수록 식탁의 주인이나 높은 사람이 앉는 자리로 여겼으며, 높은 자리의 좌석 왼편에는(즉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 입장에서 오른편에는) 가장 높은 자리를 두어 엄밀하게 상하를 구분했다. 연회 인원이 많다면 상석끼리 또 다시 ㄷ자 모양의 상하자리를 배치했다. 오른손으로 먹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에, 주로 왼손을 베개에 기대고 우측을 위로 하여 비스듬히 엎드렸다.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왼편으로 누웠다. 왼팔은 몸을 지탱하기 위해 받치는 데 쓰였고, 오른팔은 자유롭게 사용했다. 따라서 예수 오른쪽에 있던 제자는 자신의 머리를 예수 바로 앞에 둘 수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에 맞갖게 그가 예수의 가슴에 기대었다고 말한 것이다. 분명히 그는 예수와 친밀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는 아니었다. 가장 높은 자리는 주인의 왼편이었다. 그렇지만 사랑 받는 제자가 차지한 자리는 친밀한 친구의 자리였다.
-Charles K. Barre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Westminster, Philadelphia, 1978
-Charles K. Barre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Westminster, Philadelphia, 1978
그러나 이러한 배경을 알고 보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오늘날에 통용되는 '시대고증'에 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때이며, 그 당시는 교회 식당의 벽면을 장식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그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식사모습과 그 시대 음식을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묘사된 식사 자리의 배치 모습은 레오나르도 시대 당시의 일반적인 식탁의 풍경이다.[14]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피사체의 조화 대칭 비율 등에서 완벽한 명화로 평가 받으나 사실상 역사적인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실제 파스카 식사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일부 가톨릭 성당에 사본이 걸려있기도 한다.
이 그림을 실제로 관람하기 위해서는 약 3달 전부터 인터넷과 전화로 예약을 해야 하는데, 티켓을 놓고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따라서 방문 계획이 있다면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다만 당일 상황에 따라 여유가 있으면 선착순으로 현장판매를 하기도 하고, 예약 시간에 좀 늦더라도 웬만하면 들여보내주는 듯 하니 참고하자.
영국왕립미술관에 있는 해당 그림의 복사본이 Just Stop Oil이라는 환경단체에 의해 2022년 7월 5일에 훼손된 사건이 발생했다.
2.1. 음모론
이 그림은 음모론에 기반한 소설인 다빈치 코드에 의해 다시금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댄 브라운은 예수 옆에 앉은 사람이 실은 예수의 제자인 마리아 막달레나이고 베드로가 그녀를 위협하는 것이며 예수와 그녀 사이의 V자형 틈이 바로 성배를 가리키는 암호라는 떡밥을 풀기도 했다. 다만 예수 옆의 여자 같은 인물은 실은 사도 요한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사도 요한은 12제자 중 제일 어린 막내며, 전통적으로 젊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림 속에서 베드로 왼쪽 인물의 등에 가려진, 난데없이 식칼(?)을 들고 있는 손이 있는데,[15] 댄 브라운은 이 역시 다 빈치가 숨겨놓은 요소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스펀지를 비롯한 몇몇 방송에서 재현한 결과, 베드로의 오른팔이 꺾여서 그려진 거라고 한다. 다만 소매 색깔이 다르다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2.2. 패러디
유명한 그림들이 다 그렇지만, 패러디가 상당히 많은 그림 중 하나다. 직접 보자.- 2024 파리 올림픽: 개회식 중 이 작품을 연상시키는 일부 장면이 있었다. 문제가 된 장면은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 누워 있는 파란 디오니소스 주변에 여러 사람이 등장한 장면이다. 디오니소스 뒷편에 예수처럼 가운데에 서있는 인물이 뚱뚱한 여성으로 표현되었고, 해당 장면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도 드랙 컨셉의 성별을 바꾸어 옷을 입는 차림으로 등장했다. 이는 기독교를 믿는 서양권을 중심으로 논란이 되었다. 자세한 건 2024 파리 올림픽 기독교 조롱 논란 참고. 이에 대해 예술감독 토마 졸리(Thomas Jolly)는 그 의도가 아니었다고 밝혔다.
- 개그야 - 크레이지: 2007년경 즈음에 오정태가 이 그림을 '쫑파티'라고 했다가 개신교 단체로부터 항의를 받은 바 있다. 웃긴 건 정작 오정태 본인은 개신교 신자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 발견물로 나오는데, 게임에 밀라노가 없어서인지 제노바 교회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3. 대한민국의 영화
자세한 내용은 최후의 만찬(2003년 영화) 문서 참고하십시오.4. 일본의 영화
자세한 내용은 최후의 만찬(2005년 영화)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요한 복음서에서는 아예 내가 '빵을 찍어서 주는 사람'이라고
예수가 지목하고 그걸
이스카리옷 유다에게 주는데도 제자들이 눈치채지 못한다. 대체 뭘 보고 있던 거냐 몰래 줬을지도 모르지
[2]
애초에 공관 복음서도 요한 복음서도 둘 다 정경 복음서이다. 그나마 이 문제가 중대해지는 건 서방 교회(파스카 만찬에서 쓰는 무교병으로 성찬)와 동방 교회(일반 빵으로 성찬)의 전례 차이인데,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라틴 예법은 무교병을 쓰고 비잔티움 예법은 일반 빵을 쓰는 것에서 볼 수 있듯 교의적 문제는 아니다.
[3]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와
도미니코 수도원 및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4]
Church and Dominican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with “The Last Supper” by Leonardo da Vinci
[5]
L'église et le couvent dominicain de Santa Maria delle Grazie avec « La Cène » de Léonard de Vinci
[6]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7]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8]
당장 템페라 기법에
달걀이 들어간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게다가 성당이라는 습기가 차기 쉬운 환경도 그림의 변질을 가속화했다.
[9]
위에 그저 소장이라고 되어있어 착각할 수도 있지만, 이 그림은 성당 식당 벽 한면 전체를 사용해 그려진 그림이라 크기로 알려진 피카소의
게르니카보다도 크다. 폭이 10m 조금 못 미치는 정도.
[10]
이 그림 이전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 그림은
예수와
12사도가 경건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게 보통이었으므로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 거기다 12사도의 상징성을 잘 묘사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표징이 없어도 누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 수 있다.
[11]
위 그림의 왼쪽을 자세히 보면 벽이 약간 나와있는데, 똑같이 이어 그린 것이 보인다.
[12]
만화
사랑의 학교에도 나오는 천사와 악마 버젼의 변형인데, 이건 유명한 일화라는 말만 있을 뿐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지도 불명확하다. 그냥 설로 이해하는 것이 속편할 듯.
[13]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요리사 활동도 했는데, 다재다능하기로 유명했던 그의 다른 활동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성공적이었다. 당시에 다 빈치가 추구하던 요리 활동은 시대와 맞지 않았기 때문.
[14]
흥미롭게도 이 그림을 보면, 도자기가 수입되기 전까지 유럽인들이 식사 때 유리잔과 주석 접시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
[15]
이 부분은 최후의 만찬 직후 예수가 잡혀갈 때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 저항하는 것을 암시하는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 속에서 예수를 배반하는 유다가 돈 주머니를 움겨쥐고 있는 장면도 같은 맥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