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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그룹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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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최준문 (1945~1977) |
제2대 최원석 (1977~1998) |
제3대 고병우 (1998~2000) |
제4대 최동섭 (2000) |
<colbgcolor=#00a651><colcolor=#fff> 동아그룹 제2대 회장 최원석[1] 崔元碩 | Choi Won-su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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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3년 4월 24일 |
대전광역시 | |
사망 | 2023년 10월 25일 (향년 80세) |
가족 |
아버지
최준문 슬하 4남 2녀 장남 최우진[A] 차남 최은혁(1977 ~ 2013)[3][B] 삼남 최용혁[B] 사남 최재혁[B] 장녀 최선희(1967년생)[7] 차녀 최유정[A] |
학력 |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 / 학사) 조지타운 대학교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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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동아그룹 제2대 회장으로 동아건설 창업주 최준문의 장남이다.2. 생애
2.1. 성장 및 초기 이력
1943년 충청남도 대전부(現 대전광역시)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한양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를 졸업했다.귀국 후인 1966년 불과 23세의 나이로 동아콘크리트 사장에 올랐고[9], 1968년 동아건설 대표이사를 맡은 다음 대한통운 대표이사, 동아생명 회장 등을 거쳐 1978년 불과 35세의 나이로 동아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이 시절 창업주 최준문은 환갑도 안 된 58세였고 이로부터 7년이 지난 1985년 향년 65세로 별세했기에 어떤 이유로 이렇게 빨리 물려줬는지는 불명.
1985년부터 동아방송예술대학교와 동아마이스터고가 소속된 학교법인 공산학원 이사장직을 맡아왔다.
20세기의 대역사로 불리는 1983년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수주하고 지휘하면서 동아건설을 세계적인 건설사로 성장시켰다. 이 일로 당시 리비아의 권력자 무아마르 카다피와도 친해져서 카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카다피 역시 그를 헤잔님(회장님)이라고 친근하게 불렀을 정도. 한때 최원석 회장의 동아그룹은 22곳의 계열사를 거느렸고 재계 서열은 10위에 달했다.
2.2. 몰락
하지만 1994년 동아건설이 시공한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발생했고, 1997년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1998년 경영권을 내놓아야 했다. 이후 동아건설은 1998년 워크아웃에 들어가 2001년 파산선고를 받았다.최원석 본인의 주장으로는,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있긴 했어도 1기 신도시의 성공으로 인해 동아건설의 재정상태는 매우 우량했었고 이를 바탕으로 김포 간척지 개발사업(현 청라국제도시 및 검단신도시가 들어선 부지)에 눈을 돌려 거금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현 수도권 매립지가 들어선 부지를 인천시와 환경부에 무상으로 제공하고, 농지로 묶여있던 청라와 검단 일대의 간척지를 택지와 업무용지 등으로 변경을 요청했으나 외환위기 도중에 출범한 국민의 정부가 변경 요청을 모조리 거절했다고 한다. 차입은 물론 최 회장의 개인 사재까지 털어서 무리하게 진행한 사업이였기에 동아건설은 물론 대한통운을 비롯한 주요 계열사의 자금줄까지 마르기 시작했고 급기야 주거래 은행과 채권단이 그룹을 해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최 회장의 퇴진과 최 회장 일가 지분 및 선산을 포함한 부동산 등 사유재산의 헌납까지 요구했다고 한다. 선친이 일군 그룹을 공중분해시키기 싫었던 최원석 회장이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 및 지분 및 사유재산 헌납에 동의하고 물러났지만 결과는 동아그룹의 공중분해였다.
단 이 주장은 모두 최원석 본인의 주장이니만큼 자기변명의 가능성이 있기에 어느 정도 걸러들어야 하며 이게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불경기인 상황에서 차입에 사유재산까지 쏟아부어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도 없는 간척지 사업에 기업의 자금력을 몰빵한 것은 경영자로서 명백한 실책이다. 실제로 경기가 회복된 2000년대 초반부터 검단신도시 및 청라국제도시 개발사업이 삽을 뜨긴 했으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인해 청라국제도시는 한동안 개발을 중지했었고 검단신도시 역시 미분양이 속출했었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곳이 많아 저 당시의 최원석 회장의 뜻대로 개발이 진행되었더라도 동아건설이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고 최악의 경우 동아건설이 개발 도중 부도가 났다면 금싸라기 같은 간척지가 죄다 유령도시가 됐을 수도 있다.
2.3. 말년과 사망
동아건설 부도 후에는 동아방송예술대학교와 동아마이스터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공산학원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동생으로는 최원영 전 국제언론문화사(현 시사저널사) 회장 및 예음문화재단 이사장이 있다.사망 약 4개월 전인 2023년 6월 MBC 유튜브 채널 소비더머니에서 인터뷰를 가졌고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2023년 10월 25일 향년 80세로 사망했다. #
3. 가정사
4번 결혼했으나 모두 이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1964년 미스코리아 진이면서 전 국회의원 신도환 의원의 첫째 딸 신정현(본명 신영태, 1943년생, 2018년 사망)
- 장녀 최선희 (1967년생) - 사위 이재찬 (1964 ~ 2010)
- 외손자 이준호, 이성호
- 두 번째 부인은 원로배우 김혜정(1941 ~ 2015)[10]
- 장남 최우진
- 차녀 최유정
- 세 번째 부인은 가수 배인순(1948 ~ )[11]
- 차남 최은혁
- 3남 최용혁
- 4남 최재혁
- 네 번째 부인은 92년 미스코리아 선이면서 KBS 아나운서로 활동했던 장은영(1970 ~ )이며, 1999년 결혼 후 2010년 이혼했다.
- 자녀 없음
4. 기타
1981년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서울 중구 2선거구)에 민주정의당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제12대 대통령 선거 선거인단 선거벽보 |
1979년 4월 27일 민투위 강도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다.
1985년 9월 극비리에 방남한 허담과의 회담은 보안을 위해 최원석 회장이 소유한 가평 별장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