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최경원(崔慶源) |
자 | 학서(學瑞) |
본관 | 해주 최씨[1] |
생몰 | 1878년[2] 8월 16일 ~ 1965년 2월 19일[3] |
출생지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안평면 거촌동 (현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걸촌마을) |
사망지 | 경상북도 의성군 |
추서 | 대통령표창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최경원은 1878년 8월 16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안평면 거촌동(현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걸촌마을)에서 최종록(崔鍾祿)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8일 대리동 교회 영수인 박락현(朴洛鉉)과 대구성경학교 학생 윤영주(尹營柱)가 대구에서의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돌아온 뒤 3월 12일 대리동 교회 인사들에게 대구 만세운동의 정황을 설명하고 의성에서도 3월 18일 의성읍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때 최경원은 이 계획에 적극 동참했으며, 거사 당일 배포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 규합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이 날의 거사에는 의성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도동동(道東洞) 공자묘(孔子廟) 뒷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장터로 들어가기로 계획을 세워놓았다.그런데 거사 전날인 3월 17일, 일제 경찰이 만세운동의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고,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한편 중심인물의 색출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최경원과 중심인물들은 3월 18일에 장터로 잠입하여 거사를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장터에 모인 수천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여 나갔다. 이로 인해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의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5년 2월 1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최경원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