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초철봉(楚哲鳳)·초금복(楚今福) |
본관 | 성주 초씨 |
출생 | 1917년 4월 1일 |
함경북도
명천군 하고면 교항동[1] (현 함경북도 화대군 교향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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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몰년 미상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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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초완석은 1917년 4월 1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고면 교항동(현 화대군 교향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가면 북간동(현 화대군 양촌리)으로 이주하였다.1934년 12월 초순경 자신의 자택에서 동지 몇 명과 회합하여 비밀결사 형태의 좌익농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좌익농민위원회는 1930년대에 전국에서 일어난 적색농민조합운동, 즉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일환으로서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기존의 지방 농민조합이 비밀결사 형태로 바뀐 것이었다. 이들은 주로 소작권 박탈과 고리대 착취 및 토지와 식량 약탈 반대, 친일 기관과 인사들에 대한 반대투쟁 등을 전개했으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함경북도 명천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었다.
1934년 11월 말부터 12월 초순에 걸쳐 명천군 상가면 일대에서는 각 동(洞) 별로 좌익위원회가 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35년 1월부터 12월 사이에 10여 차례 이상 동대표단회의(洞代表團會議)가 개최되었는데, 초완석은 이 자리에서 구원투쟁위원회 결성 등 제반 활동사항에 관해 지시를 내렸으며, 김몽득(金夢得)·김일천(金日天)·김남철(金南哲)[2]·김용남(金龍南)·박창길(朴昌吉)·김일성(金日星) 등과 함께 주로 친일 부유층을 습격하는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8월 14일 밤에는 동지들과 함께 구장(區長) 박태욱(朴泰郁) 외 1명의 집을 습격하여 응징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36년 2월 이전에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1년여 동안 경찰서에 구금되어 고문·취조를 받고, 1937년 2월 8일 소위 '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청진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후 재판을 받기도 전인 1939년 1월 이전에 옥중에서 순국한 것으로 확인된다.
201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