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평강 채씨[1] |
출생 | 1895년 8월 17일 |
함흥부
함흥군 영천사 동평리 (현 함경남도 신흥군 영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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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9년 3월 23일 (향년 73세) |
미상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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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채규연은 1895년 8월 17일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읍 동평리에서 아버지 채한묵(蔡漢默)과 어머니 전주 김씨 김양진(金亮珍)의 딸 사이의 네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만주일보> 지국장을 지냈고, 1920년 6월 함흥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회원 박경구 등과 함께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지단인 비밀결사 함경도의용대(咸鏡道義勇隊)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함경도의용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대원 및 군자금을 모집하고 문서 배포 등을 통한 선전활동을 주요 활동지침으로 삼았다. 그는 함경도의용대의 재무계 주임으로 활동했으나 1921년 1월 24일 조직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4년 8월 시대일보(時代日報)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한편 1925년 3월 함남청년회(咸南靑年會) 집행위원으로 함남지역 청년운동을 이끌어 나가기도 했다. 1925년 5월에는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 발기준비위원, 7월 함남기자대회(咸南記者大會) 발기인, 11월 함흥고용인상조회(咸興雇傭人相助會)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1926년 8월에는 조선공산당이 발각될 때 관련자로 체포되어 고초를 치렀다.
8.15 해방 후 서울에 상경한 그는 1946년 1월 16일 김구 등이 조직한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위원회'의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6.25 전쟁 때 북한군에게 납북되었으며, 다만 1969년 3월 23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채규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17년엔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1]
24세 규(奎)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