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차경창(車敬昌) |
생몰 | 1899년 9월 21일 ~ 1964년 6월 7일 |
출생지 |
경기도 인천부 덕적면 서포리 (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서포리)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포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차경창은 1899년 9월 21일 인천 덕적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당시 부천군 덕적면에 소재한 명덕학교(明德學校) 교사였다. 그러던 1919년 4월 9일 명덕학교 교사 임용우(林容雨), 서당 교사인 이재관(李載寬)과 함께 운동회에 참석한 학생 및 주민을 이끌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경성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그가 수감된 서대문형무소에는 리승엽도 있었고, 두 사람은 형무소 내에서 친분을 다졌다.출옥 후 전도지를 통해 복음을 접하고 피어슨 신학교, 감리회 신학교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목회활동을 벌였으며, 1939년 원주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8.15 해방 후에는 서울 수표교 교회 목사로 부임해 교인들이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교회의 신자 수를 크게 늘렸다. 그러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서울이 공산군의 손에 넘어간 뒤, 리승엽이 김일성에 의해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차경창에게 비서를 보내 자신에게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고, 차경창은 이에 따라갔다. 그러나 그는 그 길로 납북되었고,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차경창의 아들 차현회 목사는 1946년 수원에 있던 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학도반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김종필과 만났다. 그 인연으로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와 인연이 닿았고, 둘은 처음에는 원만한 관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의 독재 정치가 노골화되자 이에 비판적인 설교를 하다가 미국으로 간 뒤에는 영구 귀국 금지령을 받아야 했고, 이후로는 시카고감리교회에서 목사로 부임해 30여 명밖에 안 되던 교회 신자를 2,000명으로 늘려 미국 내 한인 교회 중 최고의 교회로 육성시키는 성공을 거두면서 1985년 미국연합감리교회로부터 표창을 수여받았다. 그는 2013년 한국에 영구 귀국한뒤 목회 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통일 운동도 병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