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1]
후한 말의 인물이며 자는 원직(元直) 또는 문직(文直)으로 형주에서 유표를 섬긴 유선의 조카. 형주 영릉군 사람.
삼국지 배송지 주 영릉선현전에 등장하는 인물로 영릉군 중안 사람으로 갓난 아이 때부터 재주를 발휘해 총명했다고 하며 숙부 유선이 유파에게 주불의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했지만 유파는 "옛날 형북으로 유학했다가 학문의 실제가 그 유명세가 못했는데, 원래 가지고 있는 조카의 봉황 같은 모습을 던지고 제가 사는 까치집 같은 곳에 놀러 오신다고 하니 참으로 부끄러워 말을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거절했다.
204년에 조조는 주불의의 평판을 듣고 면회를 요구해 주불의가 오자 조조는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게 했지만 주불의가 거절했으며, 조조가 의랑으로 등용하려고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당시 흰 참새가 나타난다고 하는 상서로운 소문이 있어 유생들은 모두 송을 만들고 있었는데, 주불의가 조조를 만나 종이와 붓을 빌려 그 자리에 작품을 만들어 내자 조조가 그 작품을 보고 매우 놀라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조조는 아들 조충을 귀여워 하면서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 주불의와는 좋은 동료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208년에 조조는 조충이 죽자 주불의를 꺼림칙하게 여겨 죽이려고 했다.
조비가 주불의를 살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조조는 그 인물은 너 따위가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서 자객을 보내 주불의를 살해했는데, 그 때가 17세로 집해에서는 주불의가 살해된 해를 조충의 죽음과 동년이라고 추측했다.
한편 당나라 시대의 백과사전인 북당서초에 따르면 주불의는 207년에 조조가 유성을 포위해서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자 진보라고 하는 10가지 방법의 계략을 헌상했으며, 조조가 주불의의 조언을 채용해 유성을 공격하자 눈 깜짝할 순간에 유성을 함락했다고 한다.
다만 노필은 주불의가 당시 조조의 원정에 동행했을지조차 의문이며, 동행했다고 한들 고작 열 몇살짜리 소년이 유세하는 전략을 받아들였을지도 의심스럽다며 주불의를 위한 영릉 사람들의 뻥이 너무 심하다고 깠다. 일단 조조가 유성에서 고전한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북당서초의 해당 기록은 고전하고 있던 조조가 지휘경험은 커녕 종군경험조차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십대 소년의 (구체적인 실상은 불분명한)천재적인 전략 덕분에 조조가 승리할 수 있었다는 판타지급 결론으로 귀결되는 데다, 전투의 전개 양상도 백랑산에서의 한타싸움이었던 기존 통설과 다르고 교차검증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주불의의 명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기록.
이 때문에 영릉선현전이나 기타 주불의 관련 기록은 후세에 '삼국시대를 전후로 촉과 오의 맹활약 덕분에 기존에 변방 취급을 당했던 장강 이남은 여러가지 면에서 급성장했고 그 자부심 또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는데,이 영릉선현전에서 보이는 조조도 감탄/경계한 비운의 천재 주불의, 유비와 제갈량이 설설 긴 위대한 선비 유파 등이 바로 이런 비뚤어진 애향심이 만들어낸 과장된 인물은 아닌가?'라던지, 아예 '영릉선현전의 대개가 괴롭히고자 적국이 비방했던 말이기에 믿을 것이 못된다', '정전과 그 사정과 일이 부합해서 믿을 수 있다고 여기기에는 부족하다'고 까이는 원인을 제공하게 만들었다. 하면 뭐 그게 다 사실이라면 '주불의의 스승 후보였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유파가 위나라 내에서 유명인사인게 충분히 납득 가능하긴 한데 기록의 신빙성은 낮다. 주불의의 스승이 될 뻔한 유파도 촉한의 법률인 촉과를 만들고 행정에 능숙한 명성이 있는 인사였지만 그렇다고 절개가 뛰어난 위대한 선비는 아니기 때문에 과장이 심하다는 비판인 것이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채부인과 유종 모자를 살해한 일이 허구라고 밝히는 부분에서 주불의의 일을 같이 언급하며 '채부인 모자를 죽인 것은 연의의 허구이나 조조가 냉혹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서술하고 있다.
[1]
집해에서 언급한 조충의 사망년과 나이를 대입하면 193-210.